그러나 이것은 대북 정보가 없더라도 사회주의체제, 특히 북한체제에 대한 기본적 인식만 제대로 하고 있었어도 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문제였다. 사회주의체제에서는 최고지도자가 대내 행사와 현지지도에 부인과 동행하지 않는다. 구소련과 중국의 서기장과 주석들 중에 부인을 대내 행사에 대동했던 사람은 없다. 특히 북한에서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현지지도와 행사에 한 번도 부인과 동행하지 않았고 다른 여인을 대동하지도 않았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때도 김대중 대통령은 이희호 여사와 동행했지만,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혼자였다. 그런데 김정은이 현지지도와 행사에 여인과 동행하여 친숙한 모습을 보인 것은 파격이었다. 이것은 김정은이 추진하는 개혁과 개방의 사인으로서, 이 여인은 다른 여인일 수가 없고 바로 부인이었다.
▲ 김정은 제1서기장이 부인 리설주와 함께 팔짱을 끼고 평양 릉라인민유원지를 시찰하는 모습. 조선중앙통신은 지난 26일 이 사진을 보도하면서 김정은의 부인 리설주의 이름을 처음으로 밝혔다. ⓒ연합 |
실제로 사회주의체제에서 처음으로 구소련의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부인 라이샤를 대동하고 대내 행사도 했고 유럽방문 때도 같이 왔다. 그때 서방 언론은 이것을 큰 사건으로 보도하고 부인 라이샤가 입은 옷의 패션은 전 세계 패션계의 화제가 되고 유행이 되었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서방 세계의 대통령이나 수상들처럼 부인 라이샤와 동행한 것은 바로 소련을 개혁과 개방,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하겠다는 사인이었다. 서방 세계는 이 사인을 바로 알고 고르바초프의 개혁과 개방을 적극 환영했고, 결국 동서 냉전 체제가 종식되고 화해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우리나라가 소련과 수교하는 과정에서도 1990년 노태우 대통령이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그리고 1991년 정상회담을 위해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제주도에 왔을 때,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부인 라이샤와 동행했다.
그럼에도 김정은 제1서기장이 동행한 여인을 누이동생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북한체제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무지한 판단이다. 북한은 1인 수령지배체제인 권력구조이기 때문에 동생을 대동할 수가 없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딸 박근혜를 퍼스트레이디로서 대동했지만, 세계에서 누이동생을 대동한 지도자는 한 사람도 없다. 더욱이 사진보도에서 이 여인은 김정은과 팔짱을 끼기도 했다.
뒤늦게 국정원이 김정은 제1서기장이 동행한 여인은 부인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리설주라는 이름의 이 부인은 2005년 인천 아시아육상경기대회 때 인천에 왔었다고 했다. 만약 이때 왔던 리설주가 부인 리설주라면 이것은 매우 의미 깊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북한에서 최고지도자가 연애결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후계자로 삼은 아들 김정은의 아내, 자기 며느리를 리설주로 택한 것은 남한과의 관계를 멀리 내다본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북한 여성들을 통상 한복을 입는데 이 여인은 멋진 양장을 했다. 다른 사회주의체제에서도 그랬지만 북한에서 최고지도자의 의상은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곧 리설주의 의상은 개혁과 개방의 메시지이다. 사실 이미 북한은 자기들 공연에서 미키마우스와 미국의 대표 팝송을 등장시켰다. 이것은 미국과 서방세계를 향한 개혁개방의 사인이었다.
얼마 전 북한은 '중대보도'로 김정은 제1서기장이 원수로 추대되었다는 사실을 북한방송만이 아니라 로이터통신 중계로 전 세계에 알렸다. 로이터 통신이 김정은이 '공화국 원수'로 추대되었다는 것을 전 세계에 알린 것은 단지 김정은의 계급이 올랐다는 것을 말하려고 한 것이 결코 아니다. 김정은은 이미 당 제1서기이고,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고, 최고사령관 동지였기에 더 이상 계급적 승진이 불필요했다. 그럼에도 김정은이 원수로 추대되었다는 것은 내각, 당, 군을 완전히 장악하고 안정된 체제를 구축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것은 김정은이 확고하게 권력을 장악했다는 의미도 있지만, 동시에 그동안 추진하려 했던 개혁을 힘 있게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로이터통신을 통해 세계에 이 메시지를 전하려고 한 것이다.
김정은은 그동안 경제제일주의를 강조했고,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으라고 했다. 외국인 투자를 늘리도록 힘쓰라고 했고, 젊은이들을 선발해서 외국에 보내 북한경제가 살 길을 찾아오라고 했다. 협동농장을 축소하고 가족농장을 늘리도록 하고, 기업경영의 자율권도 확대했다. 이런 조치들은 자본주의경제를 수용하겠다는 것이다. 사실 사회주의국가가 인민들에게 식량을 제대로 배급하지 못해서 굶어 죽는 주민이 발생하면 사회주의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중국은 등소평 주석이 '쥐를 잡는데 검은 고양이면 어떻고 흰 고양이면 어떠냐'는 흑묘백묘(黑描白描)론으로 중국을 개혁 개방해서 3년 만에 굶주림에서 벗어나고 쌀 수출국이 되고, 세계에서 미국과 G2가 되는 경제대국으로 발전했다. 또 베트남은 1986년 공산당 제6차 대회에서 새로운 변화를 뜻하는 '도이모이(doi moi)' 개혁 개방정책을 추진할 것을 선언했다. 이것은 호치민 주석이 말한 '과거를 잊지 말되 과거에 매이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정신과 원칙에 근거한 것이다. 베트남은 '도이모이'정책으로 미국과 수교하고 우리나라와도 수교했다. 베트남은 도이모이 정책으로 굶주림에서 벗어나 세계에서 두 번째 쌀 수출국이 되고 년 7∼8% 경제성장을 지속하고 있다.
북한은 그동안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 정책이 구소련 체제를 무너뜨리게 했다는 것 때문에 개혁개방에 대한 불안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중국식, 베트남식의 개혁개방을 계속 탐색하면서도 추진하지 못했는데, 최근 일련의 북한 변화는 이제 김정은 체제가 개혁개방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려고 한다는 단초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북한 총참모총장 리영호가 전격 해임당한 것도 단순한 권력 다툼이 아니다. 이것은 김정은이 개혁개방을 위해 명실공히 군의 보수 강경세력을 제거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오랫동안 기득권을 가진 군 장성들과 강경세력들의 반발로 갈등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리영호를 해임했다는 것은 군의 권력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군이 가지고 있던 외화벌이 수단, 곧 경제권을 김정은 원수 체제로 일원화한 것이기 때문에 북한은 그동안 주창했던 선군(先軍)정치, 즉 '권력은 총부리에서 나온다'는 선군정치에서 '권력의 기반은 경제'라는 선경(先經)정치로 전환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70세 이상 당 간부들과 장성들을 퇴진시킨다는 것도 과거 세력으로부터 새로운 변화, 개혁개방을 적극 추진하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이런 일련의 개혁개방 조치들은 김정은의 고모인 김경은이 노동당 비서로서 인사권을 장악하고 있고, 고모부인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은 법과 행정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추진될 것이다.
그러므로 북한 김정은 원수 체제의 이런 개혁개방 변화들을 과거 적대감과 반공의식에서 무지한 판단을 하거나 연예계 뉴스 정도의 냉소적인 인식으로 일소한다면, 남북관계 발전은 물론 우리나라가 외톨이가 될 수 있다. 특히 모 언론은 리설주가 예술단 가수라고 해서, 김정일과 김정은 부자가 모두 딴따라를 처로 삼았다고 비아냥했는데, 이것은 언론으로서 품위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일 뿐 아니라 국익에도 저해되는 것이다.
북한의 예술단, 은하수 악단은 우리의 대중예술에서 소위 말하는 딴따라 수준이 아니다. 사회주의국가는 예술을 매우 중시하는데, 그것은 사회주의 리얼리즘 예술은 공산주의로 나가는 역사 발전을 선도하는 미학이고 철학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김정일과 김정은이 예술단원과 결혼한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북한에서 예술단원이나 만수대 창작사의 미술가들은 권력구조와는 다른 차원에서 상당히 높은 사회적 지위의 생활을 한다.
우리는 그동안 북한의 개혁개방을 촉구했다. 그런데 김정은 체제의 개혁개방 노력을 환영하고 협조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런 노력을 여인네와의 놀음이나 권력다툼 정도로 폄하하는 것은 남북의 평화적 발전은 물론 우리나라 발전에도 해가 되는 언행이다. 특히 우리 언론보도처럼 북한이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가 원수가 된 이후 어린 김정은 원수를 어른처럼 보이려고 부인과 동행하는 모습을 의도적으로 보도했다면, 권위적 현지지도 모습을 보이지 어린이 놀이기구를 타는 등의 파격적인 모습을 보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런 북한의 보도에 담긴 의미를 파악하려 하지 않고 가십 정도로 웃고 넘어가서는 절대로 안 될 것이다.
도리어 우리나라는 이런 변화들을 예의 주시하면서 김정은 원수의 개혁개방 정책이 대내외 보수 강경세력들에 의해 좌절되지 않도록 우리 민족과 우리나라의 미래를 내다보면서 중국보다 더 적극적으로 개혁개방 정책을 지지하고 협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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