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29년간의 억울한 옥살이…38년만의 재심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29년간의 억울한 옥살이…38년만의 재심

야마구치가 본 '일본 사회와 미디어' 〈5〉

언론의 무비판적, 중계방송식 보도 문제가 크게 부각되고 있는 가운데 38년동안 무죄를 주장하던 일반 시민에 대한 재심 판결이 내려졌다. 경찰의 엉터리 조사에도 불구하고 언론의 무분별한 발표 저널리즘에 의해 범죄자로 전락한 무고한 두 시민이 29년 동안 옥고를 치르고 난 후다. 언론의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언론의 역할을 다시 한번 생각케 하는 글이다. 〈역자〉

***후카와 사건 재심개시 결정/ 미디어는 보도검증으로 누명 씌운 책임 물어야**

"재심개시가 결정되고 난 뒤 2개월. 취재에 응하거나, 직장 동료들이 인사를 건네는 등 인생이 변했습니다. 이긴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검찰의 항고로 인해 싸움은 도쿄 고등법원으로 옮겨갔습니다. 여기서 진다면 100% 지는 것이고, 이긴다면 100% 이기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여러분의 도움을 빌려서 더욱 열심히 하겠습니다." - 스기야마 씨

"이렇게 즐거운 일이 인생에 두 번 없을 것입니다. 반드시 이길 것으로 생각했고, 고등법원에서 100% 이길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재심 결정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검찰 측은 자신들이 한 일에 대해 추호도 반성하고 있지 않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무고한 죄를 뒤집어 쓰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 사쿠라이 씨

11월 27일, 이바라기현 도리데시에서 후원회 '유라유라 하루'가 개최한 '후카와 사건 재심 결정 보고회'. 38년간, 무죄를 주장해 온 스기무라 씨와 사쿠라이 씨는 9월 21일 미도 지법 츠치우라지부의 '재심 개시 결정'에 만감이 교차하는 심정을 밝혔다.

후원회의 명칭인 '유라유라 하루'는 사쿠라이씨가 옥중에서 작성한 시에 본인이 작곡한 노래에서 따왔다. 노래의 2절.

"기쁨과 슬픔에 계절은 흘러 간다/ 하늘 아래 사람의 위에 어딘가 어딘가/ 봄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꽃피는 날은 언제인가/ 언젠가 반드시 그렇게 꽃피는 꿈 같은 아침이/ 설렁설렁 봄날은 오네, 설렁설렁 봄날은 오네"

이날 집회의 마지막 순서로 참가자 전원이 마음을 모아서 합창했다. 구속되었을 때 21세였던 스기무라씨는 올해 59세, 스무 살이던 사쿠라이 씨는 58세가 되었다. '강도 살인범'의 죄수복을 입고, 가출옥 될 때까지 29년의 옥중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던 두 사람에게도 38년 만에 봄날은 설렁설렁 그렇게 다가왔다.

1967년 8월 30일 새벽. 이바라기현 도네마치 후카와에서 한 남성(62세)이 자택에서 살해됐다. 도리데 경찰서는 현장 정황, 목격자 정보 등을 근거로 두 명에 의한 강도 살인으로 단정, 생활불량자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벌였다.

지방지와 전국지의 지방판은 "유력 참고인 부상"(9월 7일자, 〈요미우리〉), "2명에 의한 범죄로 단정"(9월 8일자, 〈이바라기 신문〉) 등의 제목 아래 조사 결과를 상세히 보도했고, 10일 이후 각 신문은 "주요 참고인이 조사중"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그 후로는 "유력 용의자 찾지 못해"(9월 30일자, 〈아사히〉), "조사는 장기화 돌입"(10월 2일자, 〈마이니치〉) 등 조사가 난항에 빠졌다고 전했다.

그로부터 약 2주 후, 10월 18일자 이바라기신문에 "청년 두 명을 체포, 도네마치 살인사건 한 달반만에 해결/범행 일부를 자백"이라는 특종기사가 게재됐다. 체포된 두 명은 스기무라 씨와 사쿠라이 씨였다. 사쿠라이 씨는 10일, 스기무라 씨는 16일, 두 사람 다 경범죄의 다른 사건으로 구속된 상태였지만, 장시간 조사를 통해 자백을 강요받았다. 두 사람은 무죄를 주장했다.

그렇지만 사쿠라이 씨는 '목격자가 있다', '알리바이가 없다', '부정한다면 사형될지도 모른다'는 형사의 협박에 못이겨 5일 만에 '허위자백'을 하게 된다. 스기무라 씨도 '사쿠라이가 너하고 함께 했다고 자백했다'는 강요에 의해서, '재판정에서 제대로 판단을 내려질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에 용의를 인정해 버렸다. 두 사람이 강도 살인 용의로 재구속된 것은 10월 23일. 그러나 19일자 각 신문사 조간에는 이미 연행 당시의 사진과 얼굴사진이 게재된 것은 물론, 두 사람을 강도살인범으로 단정한 기사가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 아사히 "도네마치 강도살인 48일만에 해결/ 경륜 귀가 시 범행/ 두 명 체포, 알리바이 추적에 단념"
- 마이니치 "경륜에 빠져서/ 도네마치 목수 살해/ 경륜 비용 대출 거절 당해/스기무라와 사쿠라이/ "울컥해서 저질렀다""
- 요미우리 "도네마치 목수 살해 51일만에 해결/ 사쿠라이, 스기무라 두 명을 지명/끈질긴 조사 열매 맺어"

그렇지만 68년 2월, 첫 공판에서 두 사람은 기소사실을 전면적으로 부정했다. 자백 이외에는 증거가 없고, "피해자 집 앞에서 두 사람을 봤다"는 '목격자'가 첫 공판 이후에 나타나는 등 부자연스러운 면이 있었다. 그러나 1심인 미도 지법 츠치우라 지부는 70년 10월 '자백은 신용할 수 있다'며 두 사람에게 무기징역의 유죄판결을 내렸다. 73년 12월 도쿄 고법은 두 사람의 항소를 기각했고, 78년 7월 최고법원도 두 사람의 상고를 기각해서 유죄가 확정됐다. "재판정에서 제대로 된 판단이 내려질 것"이라던 스기무라 씨의 바람은 3번이나 이뤄지지 않았다. 상고가 기각된 날, 스기무라 씨는 구치소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사람이 왜…"라며 통곡했다.

사쿠라이 씨는 투옥되던 날, "언젠가 반드시 진실이 밝혀질 것이다. 하루하루 긍정적으로 살아가자"고 마음속으로 결심했다. 83년 12월 두사람은 재심을 청구했지만, 이것도 기각 당했다. 결국 96년 11월의 가출옥까지 29년간 옥살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쿠라이 씨의 '옥중 시집/ 담장의 노래'에서는 무죄를 믿고 면회를 계속해 온 부모에 대한 뜨거운 마음이 넘쳐나고 있다. "76년에 어머니를, 91년에 아버지를 저 세상에 보냈다. 살아서, 밖에서 만나고 싶었다. 두 분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다. 그것이 가장 가슴 아팠다"고 적고 있다.

2001년 12월, 두사람은 제2차 재심청구를 제기했다. 변호단은 다음과 같은 새로운 증거를 제출했다.

1. 현장에서 두 사람의 지문이 하나도 검출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백대로 사쿠라이 씨가 맨손으로 재현한 현장검증에서 다수의 지문이 채취됐다.

2. 자백대로 유리문은 발로 차도 유리가 깨지지 않았다는 것이 현장검증에서 과학적으로 검증됐다.

3. 첫 공판 후 나타난 목격자 증언대로 실시한 목격자 실험에서는 야간에 오토바이를 운전해 가면서 사람을 식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4. 자백, 확정 판결에서는 살해 방법이 양손으로 목을 조르는 것이었다고 되어 있지만, 해부 감정서의 소견은 목에 무언가를 감아서 질식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사쿠라이 씨는 "검찰이 지금 제시한 증거를 38년 전에 내놓았더라면, 그때 무죄가 되었을 것이다"고 증거은폐에 대해서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미도 지검은 결정에 불복해서, 도쿄 고법에 즉각 항고했다. 변호단의 야하기 요이치 변호사는 "재심 개시가 확정되기까지 다시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두 사람의 인권보다는 검찰의 체면이 중요한 모양이다"고 검찰의 항고를 비판했다.

미디어는 이번 결정을 크게 보도했다. 당일 석간으로 마이니치, 요미우리, 도쿄신문 등이 1면, 사회면 톱으로 아사히는 사회면 톱으로 각각 다뤘다. 다음날 조간으로는 이바라기신문이 1면, 사회면 톱, 산케이신문은 사회면 사이드톱으로 보도했다. "38년만에 무죄 밝혀져"(요미우리), "무죄 주장 38년 "꿈과 같다""(아사히) 등의 제목이 실렸다.

마이니치는 22일자 사설에서 '다시 한번 드러난 자백 중심의 오류"와 조사 및 재판과정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아사히는 23일자 사설에서 '잘못된 재판은 다시 조사해서 고쳐야'라며 '엉터리 조사와 이를 추인한 재판'을 비판했다. 그렇지만, 사건 당시 '거짓자백'을 경찰정보대로 크게 보도해 엉터리 조사를 추인함으로써 두사람을 살인범으로 단정한 미디어의 책임은 어떻게 되는가. 이를 자문하고, 검증하는 보도는 어느 신문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구치소에서 당시의 신문을 봤습니다만 완전히 범죄자 취급이었습니다. 그것이 이번에는 속바닥을 뒤집듯이 보도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번 보도를 보고는 여러 사람들이 잘됐다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미디어의 힘이 대단하네요."(스기무라 씨)

"만약 당시 날카로운 기자가 있어서, 제대로 취재를 했다면 무죄였다는 것을 알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미디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면, 경찰 조사나 재판을 움직이는 힘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사쿠라이 씨)

미디어는 후카와 사건에 무엇을 했고, 무엇을 하지 않았는가. 이런 보도 검증을 통해서 누명의 구조와 무서움을 전달했다면 하루라도 빨리 재심개시에 대한 힘이 되었을 것이다. '자백 편중 보도'의 잘못을 고치고, '무책임한 보도'를 다시 살펴봐야 할 것이다. 이것이 두 사람의 누명, 보도피해자에 대응하는 미디어의 책임일 것이다.

〈슈칸 킨요비〉 12월 9일자

번역: 이홍천(게이오대 정책미디어 대학원 박사과정)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