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파끼리 연정을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다 끌어모아봐야 과반수가 안되고, 제2당인 노동당이나 이번 선거 최대의 승자로 등극한 제3당 사회당과 정부를 구성하자니 힘의 균형이 좌파 쪽으로 너무 기울기 때문이다. 총선에서 기독민주당은 41석을 차지했고 노동당은 33석, 사회당은 25석을 얻어 좌파 쪽이 절대 우세를 보이고 있다.
이같은 좌파의 수적 우세는 의회가 구성된 지 여드레 만인 지난달 30일 국민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처음 열린 새 의회 회의에서 난민 추방을 중단하라는 결의안이 통과된 것이다. 우파 연정의 핵심 정책이었던 난민 추방 반대 결의안을 두고 기독민주당을 비롯한 우파 정당들이 모두 반대표를 던졌음에도 결의안을 부결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75대 74, 단 한 표 차이 승리에서 좌파 정당들은 향후 사안별 연대를 통해 과반수를 이룰 수 있다는 능력을 과시했다.
이 결의안은 노동당의 대표 바우터 보스가 제안했다. 보스는 선거 패배로 당 안팎의 비판을 받고 있었으나 개원하자마자 사회당, 녹색좌파당, 기독연합, 민주주의 66, 동물보호당(Party for Animals) 등으로부터 지지를 얻어 결의안을 통과시킴으로써 기독민주당이 의회를 마음대로 요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해 내는 동시에 앞으로 4년간 우파 견제가 충분히 가능함을 입증해 보인 것이다.
결의안이 통과되자 기독민주당 내에는 당혹스러움이 역력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노동당과 사회당을 겨냥해 "연정 구성에서 논의할 사안을 섣부르게 표결에 붙였다"고 불쾌감을 표하면서 두 당이 이런 식으로 나올 경우 연정 구성이 어려워 질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좌파의 참여 없이는 연정을 구성하지 못할 뿐 아니라 의회에서도 수적 열세를 겪어야 할 기독민주당이 언제까지 이런 당당함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좌파연합, 막무가내 난민 추방에 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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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유럽의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지만 네덜란드에는 유고 내전과 아프리카의 내전, 기근 등으로 인해 수많은 난민들이 몰려들어왔다. 네덜란드는 정치적인 난민에 대해서는 영주권을 주었기 때문에, 일부 불법 이민자들은 정치적인 난민 지위를 신청하기도 했었다. '아메리칸 드림'과 비슷한 '유러피안 드림'을 꿈꾸는 동유럽, 중동, 아프리카인들은 브로커들에게 거액을 주고 유럽 밀입국을 추진했다.
정부는 급증하는 난민들을 거주할 수용소 마련하랴, 난민들에 대한 심사 진행하랴 바빴고 주민들은 갑자기 늘어난 외국인들과 크고 작은 마찰을 빚으며 반외국인 감정을 키웠다.
이런 반외국인 감정은 9.11 테러 이후 증폭됐고 2002년 네덜란드 사회를 뒤흔든 핌 포르타운 폭풍으로 폭발했다.(11월 28일자 '네덜란드 총선, 해리포터의 승리는 틀렸다' 참조) 외국인에 대한 강경정책은 우파 정권의 중요한 화두였고, 당시 곪을 대로 곪아 있던 난민정책이 도마에 올랐다.
난민심사에서 탈락해 네덜란드를 떠나야 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떠나지 않고 있던 난민의 수는 2만6000명에 이르자 정부는 이들을 법대로 추방하기로 결정하고 강경한 추방조치를 밀어붙이기에 이르렀고 우파는 이를 대표적인 '개혁조치'로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정부의 불도저식 추방조치에 불복한 난민신청자들이 단식 농성에 돌입하고 추방당할 것을 두려워한 난민들의 자살이 이어지고 이들의 사정을 딱하게 여긴 교회와 이웃들이 이들을 숨겨주고 심지어는 일부 지방정부들까지 중앙 정부의 정책에 불복 운동을 벌이면서 이 조치는 큰 논란을 불러왔다. 심하게는 2차대전 당시 나치가 유태인들을 잡아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보낸 것처럼 우파정권이 외국인들을 잡아 추방하고 있다는 비난까지 나왔다.
이 같은 논란의 와중에 의회에서 통과된 난민 추방 중단 결의안은 이들 난민에 대한 대규모 사면과 영주권 부여의 길을 터 놓은 셈이다. 나아가 우파 정부의 막무가내식 정책에 새로 구성된 의회가 적극적으로 제동을 건 첫 사례로 여겨진다.
네덜란드 이념대결, 이제 시작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의회 과반수의 세력을 규합해 정부를 꾸리려면 기독민주당은 좌파 진영과 손을 잡을 수밖에 다른 수가 없다. 네덜란드 역사에서 좌우연정 자체는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다. 의회 내에만 열 개의 정당이 진출해 있는 다당제 체제에서 좌파나 우파만으로 연정을 구성하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게 현실인 만큼 제1당과 제2당 또는 제3당의 주도로 정부를 구성하는 것이 가장 편리한 경로였기 때문이다. 좌우 대립이 분명한 한국과 달리 네덜란드에는 대화와 타협의 전통도 깊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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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2002년 이후 좌우 간의 대립이 심화돼 온 상황에서 좌우 동거 연정이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라고 전망하기는 어렵다. 선거가 끝난 지 15일이 지났고 기독민주당이 연정 구성을 위해 노동당, 사회당과의 접촉을 계속하고 있지만 벌써부터 기독민주당과 사회당은 물과 기름과 같은 관계라 동거가 불가능할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인 것이다.
기독민주당은 노동당과 중도성향의 기독연합으로 연정을 구성하는 것을 최선책으로 고려하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기독연합은 6석의 소수당으로 기독민주당의 우경화를 비판해 왔을 뿐 아니라 사회복지에 방점을 찍고 난민추방에 반대하면서 기독민주당에서 이탈한 유권자들에게 표를 얻어 성장해 온 만큼 기독민주당의 러브콜에 즉각적으로 반응할지 의문이다.
이에 연정 구성은 내년 봄까지도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까지 있다. 내년 3월에는 지방선거가 있고 그 결과에 따라 상원이 구성되므로 지방선거가 지나봐야 의회의 판도가 분명히 결정되겠기에 많은 전문가들이 연정의 완성 시기를 3월 이후로 내다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내년 봄까지 제2, 제3의 난민 결의안 사태가 나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지난 4년 간 우파가 절대 우위를 점했던 권력구도가 깨지면서 좌우의 팽팽한 대결이 시작된 것이다.
대립이 심화될수록 일반 시민들의 정치에 대한 관심도 역시 높아지고 있다. 지난 총선 투표율은 80.1%였다. 투표일이 수요일이었고, 공휴일도 아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폭발적 참여다. 이제 이념의 대결 시대는 끝났다느니 정치적 무관심이 팽배하다느니 하는 일반론은 네덜란드에서는 통하지 않는 얘기가 될 듯 하다. 네덜란드의 겨울은 깊어가고 있지만 네덜란드 정치는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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