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카 금지법, '여성인권' 빙자한 인종차별주의
작년 11월 30일, 헤이그에 소재한 네덜란드 국회 의사당 앞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부르카 금지법 제정에 반대하는 시위였다. 막상 이 자리에서 외신들의 주목을 받은 것은 시위대가 아닌 시위대를 촬영하려는 카메라의 숫자였다. 시위대의 곱절이 넘었다.
부르카를 착용한 여성 앞에 너도나도 카메라를 들이댈 정도로 부르카 착용 빈도가 낮은 네덜란드에서 굳이 금지법이 발의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의 단편이라 할 수 있겠다.
부르카 금지법은 '이슬람 반대'를 기치로 내세우며 당을 조직한 히어트 빌더스 하원의원이 2005년에 발의했던 것을 강력한 이민자 억압정책으로 우파들의 사랑을 받아온 리타 페르동크 외국인 담당장관이 지난 11월 총선 기간 중 정부안으로 다시 발의해 '우파 정책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히어트 빌더스 의원은 "부르카는 회교의 여성억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탈레반 정권이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하고 있을 당시 여성들에게 강제로 씌웠던 부르카가 자유와 인권을 중시하는 네덜란드에서 존재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논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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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현재 네덜란드에서 부르카를 쓰고 길거리에 나서는 여성은 극소수인 상황에서 고작 이들을 규제하기 위해 법까지 만들어야 하냐는 반론도 가능하다. 또한 부르카를 강요하는 회교국가와 달리 네덜란드에서는 본인에게 선택권이 있는 만큼 부르카 금지가 부르카 착용보다 더 한 강요라는 것이 반인종주의 단체와 이슬람 신자들의 공동된 의견이다.
우파의 단독 집권이 어렵게 된 선거 결과 덕에 부르카 금지법이 당장 힘을 받을 우려는 적어 보인다. 리타 페르동크 외국인 담당장관도 의회의 불신임을 당해 사실상 직무가 정지된 상태다.
그렇다고 속단은 이르다. 부르카 금지법을 추진하면서 표면에 드러난 우파 진영의 '이슬람 혐오증'은 언제라도 그 마각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이 싫어서 멀쩡한 학교도 폐교?
지난 12월 초 우파 정당들이 암스테르담의 이슬람계 고등학교 폐교를 요구하고 나선 것은 이슬람 억압 시도의 다른 예로 꼽힌다. 해당 고등학교들이 암스테르담 고등학교 중 성적이 가장 낮다는 신문보도가 우파 정당들의 표면적 명분이 됐다.
일정 조건만 갖추면 학교 설립이 가능한 네덜란드에서 이 고등학교의 성적이 좋지 않았던 것은 교육계 경력이 없는 교장과 일부 학부모들의 독단적 운영 때문인 것으로 분석됐다. 운영 상의 문제를 개선하면 될 것을 굳이 학생들이 다니고 있는 학교를 없애겠다는 우파 정당의 주장이 석연치 않은 것이다.
만약 이 학교가 기독교 계통 학교였다면 일개 고등학교의 성적 문제에 이렇듯 뜨거운 관심이 쏠렸을까?
이슬람과 관련된 것이라면 네거티브할수록 잘 팔리는 뉴스시장의 추세와 이슬람 공격으로 이슬람에 반감을 지난 보수층의 결집을 도모하는 우파 정당들의 계산이 맞물려 멀쩡한 학교가 폐교 위기에 내몰린 것이다.
단편적인 사건은 아니지만 네덜란드 내 아랍계 청년 실업률이 40%를 넘는다는 최근 조사결과는 이슬람에 대한 반감이 사회 전반에 확산된 정도를 보여준다.
아랍계 청년들이 백인 청년에 비해 상대적으로 빈곤한 가정 출신이고 네덜란드어 실력이 떨어지며 저학력이라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백인 청년 실업률보다 두 배 이상이 높은 실업률은 인종차별이 아니고서는 설명하기 어려워 보인다.
'모하메드'나 '무스타파', '알리'와 같은 이름이 붙은 이력서에는 일단 '정서적 감점'이 붙는다는 것이 기업 측의 설명이다. 아랍계 청년들은 취업의 첫 관문인 현장실습 기회마저 어려워 정부가 대책 마련을 약속했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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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내 아랍인구 1800만…미국보다 유럽이 위험한 이유
문제는 9.11로 촉발된 '반(反) 이슬람 정서'가 네덜란드는 물론 유럽 전반에 걸쳐 점점 강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말 '안네 프랑크 협회'에서 펴낸 '인종주의와 극단주의 모니터'에 따르면 2006년 한 해동안 유럽 내 인종주의 폭력은 두 배 가량 늘어났고 그 중에서도 아랍계 인종에 대한 폭력은 세 배 이상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네덜란드 내에서는 국제적인 나치 스킨헤드 조직인 '블러드 앤 아너(피와 명예)' 조직의 급성장이 두드러졌다.
반 이슬람 기치를 내걸고 정당을 구성한 히어트 빌더스가 11월 총선에서 9석을 얻은 것 역시 같은 맥락으로 풀이된다.
"네덜란드에 이슬람 쓰나미가 몰려온다"거나 "네덜란드 문화는 이슬람 문화에 비해 천 배는 더 우월하다" 등의 말로 의회에서 9석을 얻을 수 있게 됐다는 것 자체가 네덜란드 대중이 갖고 있는 이슬람에 대한 반감을 여실히 드러내 주는 것이다.
빌더스의 정당이 많은 표를 얻은 지역들은 외국인 유입이 막 시작되는 중소도시와 국경지역에 편중돼 있다는 것은 유의해 보아야 할 지점이다. 이는 반 아랍, 반 외국인 정서가 실제 갈등에 기반했다기 보다는 그저 낯설고 다른 문화와 인종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과 거부감 때문이라는 해석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9.11 이전까지만 해도 유럽은 미국보다 진보성향이 강하고 차이와 다양성 인정을 중요한 가치로 여겼었다. 그러나 9.11 이후 이슬람 문화를 테러와 폭력으로 직결시키는 미국식 논리가 유럽마저 경직시켰고 당위처럼 인정되던 '유럽식 다문화주의'는 그 권위를 잃게 된 것이다.
이슬람이 말 그대로 '소수'에 불과한 미국과 달리 식민지 역사와 인접성 때문에 유럽 내 아랍계 인구는 1800만에 이른다. 다수가 분명한 이슬람을 '소수'로 따돌리고 있는 유럽의 경직성이 결국 또 다른 분쟁의 씨앗이 되지 않을까 우려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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