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듯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1~2세대 학자들은 서양사 연구의 기본을 충실하게 다지는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하였다. 이들에게는 서양사의 큰 줄기를 이해하는 일만으로도 버거운 작업이었던 만큼, 서양학자들의 연구를 우리의 눈으로 비판하는 작업들은 어찌 보면 사치에 가까왔으리라.
80년대에 3세대 학자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예전보다 수월해진 외국 유학길에 올랐다. 90년대부터는 외국 유학을 다녀온 해외유학파들이 서양사의 새로운 흐름들과 그동안 소홀했던 서양사의 영역들을 소개하였을 뿐만 아니라, 1차 사료 분석을 통한 예전보다 훨씬 깊은 연구물들을 생산해내었다.
또한 70~80년대의 국내문제에 천착하여 고민하고 있던 국내파들이 서양사의 사례들을 통해 그들의 문제의식을 좀 더 세련되게 발전시킴으로써, 국내 서양사연구를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하지만 3세대 학자들도 여전히 우리의 눈으로 서양사를 바라보는 시각은 부족했다. 특히 해외유학파들은 유학국가에서 배운 새로운 서양사 영역들을 국내에 소개하는 데에만 급급하였고, 서양학자들의 시각을 그대로 답습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런 의미에서 강철구 교수가 유럽중심의 세계사를 비판하고 우리의 관점에서 세계사를 보려는 노력을 해온 것은 무척 반가운 일이다. 강교수는 국내파로 특히 민족주의와 제국주의 문제를 중심으로 고민해오면서 오래전부터 서양사학의 유럽중심주의에 대해 연구해왔다. 어쩌면 강교수가 서양사학의 유럽중심주의에 대해 전면적으로 비판하고 나선 것은 그가 국내파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싶다. 프랑스에서 공부한 필자만 하더라도 오히려 프랑스 학자들의 연구에 매몰되어 유럽중심주의에 대해 돌아볼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 <우리 눈으로 보는 세계사>(강철구 지음, 용의숲 펴냄). ⓒ프레시안 |
강 교수의 이번 저서는 <프레시안>을 통해 그동안 발표해왔던 칼럼들을 모은 책이다. 이 책의 첫 번째 장점은 서양학자들의 유럽중심주의에 대해서 대중을 상대로 다양한 그림들과 사진들을 통해서 흥미롭고 알기 쉽게 서술했다는 점이다. 페이지마다 넘쳐나는 대형사진과 그림들, 친절한 설명은 독자들을 즐겁게 하기에 충분하다.
두 번째 장점은 쉽게 서술하면서도 학계의 깊이 있는 논의들을 균형 있게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대중을 상대로 글을 쓰다 보면 정작 학계에서 논의되는 중요한 논점들을 놓쳐버리는 경우가 많아 아쉬움을 남기곤 했는데, 강교수는 학계의 논의를 중심으로 균형감각을 유지하면서, 대중을 상대로 알기 쉽게 그러나 심도 있게 글을 썼다는 점에서 매우 바람직하다고 하겠다.
세 번째 장점은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논의를 서양고대사부터 현대사까지 골고루 취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 제 1권에서 강교수는 고대 그리스문명, 유럽중세도시, 르네상스, 유럽의 해외 팽창, 근대 자본주의 발전, 근대 자연법의 형성과 식민주의와 같이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가장 핵심적인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역사 전반에 걸쳐 어떤 논의가 있는지 소개하는 것은 사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저자는 방대한 영역에 걸쳐 해박한 지식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어서 매우 고무적이다.
그의 논의는 우선 우리가 알고 있는 서양사에 대한 기본 상식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면서 그러한 기본 상식이 과연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여도 되는지를 묻는다. 예전에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관점이다. 기본 상식 속에 유럽중심주의의 관점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고 나서, 강교수는 기본 상식에 대해 최근 학계의 비판적 논의들을 알기 쉽게 설명하면서, 기본상식을 뒤엎는 신선한 주장들을 펼친다.
예컨대 그리스문명은 서양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리스문명은 인류 역사에서 매우 독창적이며 인간중심적인 문명으로 서양문명의 본질을 차지한다고 그동안 알려져 있다. 과연 그렇게 독창적인 문명일까?
강 교수는 마틴 버널의 <블랙 아테나>의 주장을 소개하면서, 실제 그리스문명은 대부분 이집트문명으로부터 크게 영향 받은 것으로 이제 알고 있는 것처럼 독자적으로 발전한 문명이 아니라고 주장한다.(1권 57~97쪽) 매우 설득력있는 주장이다. 이와 함께 마턴 버널의 주장에 대한 학계의 비판도 잊지 않고 소개하는 학문적 신중함을 더하여 학문적 논의를 균형있게 다루고 있다.
그의 논의에서 아쉬움이 있다면, 그의 비판적 논의 대부분이 서양학자들의 비판에서 시작한다는 점이다. 총론에서 칼 맑스, 헤겔, 막스 베버 등에 대한 비판도 유럽중심주의를 비판하는 서양학자들로부터, 그리스문명 비판도 마틴 버널로부터, 그리고 르네상스에 대한 비판도 서양학자들의 주장에서 시작하고 있다.
이에 대해 강교수도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비판도 대체로 제 3세계 출신이기는 하나 서양학자들이 주도하고 있고, 서양 학문 체계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라고 이 사실을 고백하고 있다.(1권 53쪽). 그러면서도 서양의 대표적인 역사가들의 "주장이나 이론에 지레 겁을 먹고 주눅이 들 것이 아니라 감연히 맞서려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는데 그의 주장에 적극 동의한다.
시작단계인 현 상황에서 "당장은 서양 사람들이 해 놓은 자기반성의 수준이라도 따라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강교수의 입장에 약간 옹색해 보이는 점이 없지는 않으나, 아직도 규모나 연구수준에서 서양의 학계보다 턱없이 열등한 국내학계의 현실을 생각하면 지당한 주장이다. 사실 유럽중심주의 비판은 한국인으로서 서양사를 공부할 때에 가져야할 가장 기본적인 학문적 자세가 아닐까? 근, 현대 부문을 다루는 제 2권의 빠른 출간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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