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그녀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자서전을 통해 보여줬다. 그렇다면 그녀의 자서전은 진실인가? 그녀가 자서전에서 언급한 사람들은 그녀는 거짓을 썼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검찰 조사라는 지옥의 터널을 통과한 그녀가 과연 거짓된 자서전을 출판하는 죄를 짓고도 무사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쌍방이 진실 공방을 필사적으로 벌인다 해도 결국 실체적 진실은 밝혀지지 않을 것이다. 말은 말을 낳는 악순환으로 책 선전만 하는 꼴이 될 것이 뻔하므로 그녀 자서전의 희생자들은 침묵으로 대응한다. 진실과 거짓은 동시에 존재할 수 없는 모순관계에 있는데도 왜 이런 사태가 발생하는가? 문제는 사람들 대부분이 자신에게 유리한 사실들만을 자신의 관점으로 구성해서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진실 공방이 이야기 대 이야기의 담론 투쟁으로 전개되는 상황에서 진실과 거짓의 구분은 결국 수사학적인 문제로 귀결되고 만다.
근대 이전 역사란 본래 수사학의 일종이었다. 우리 시대 가장 훌륭한 미시사가인 카를로 긴즈부르그의 말대로 "수사학은 역사의 어머니다." 근대에서 역사가 하나의 과학으로 성립하기 위한 전제조건은 역사의 탈수사학화다. 그 결과 역사학이 상실한 것은 이야기다. 오늘날 대학에 역사를 연구하여 논문을 쓰는 역사학자는 많아도 실제 역사를 쓰는 역사가는 많지 않다. 분석과 논증으로 점철된 역사 논문은 재미가 없다. 따라서 역사의 탈수사학화와 과학화가 오늘날 역사학의 위기를 발생시킨 근본 원인이다.
대중이 <로마인 이야기>와 같은 이야기체 역사에 열광하는 이유는 시오노 나나미가 역사를 인간의 드라마로 썼기 때문이다. 그녀는 역사란 곧 인간이라며, '역사가 딱 질색'이라고 말하면 '인간이 딱 질색'이라고 고백하는 꼴이라고 말했다. 우리 대중문화에서 역사를 인간 드라마로 보여주는 것은 사극이며, 그래서 사극 열풍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이에 대한 역사가의 염려와 비난은 계속된다. 역사학자들은 역사의 허구화는 역사 왜곡을 넘어 역사학의 종말을 초래하기 때문에 막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극 제작자들은 사극을 역사가 아닌 드라마로 봐달라고 주문한다. 하지만 문제는 대중이 사극에서 재미만 얻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배운다는 데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학자의 걱정은 기우가 아니다. 역사학자의 위기의식을 더욱더 고조시키는 것은 "텍스트로 서술된 역사밖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탈근대 해체주의자들의 주장이다.
그들은 과거 실재는 없고 서사로서 역사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역사가는 '과거로서 역사'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로서 과거'를 만들어내는 일을 한다고 말한다. 이들은 진실과 거짓의 문제를 서사로서의 역사를 어떻게 그럴 듯하게 구성하느냐의 문제로 환원한다. 이는 역사를 다시 근대 역사학 이전의 수사학적 전통으로 회귀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학자가 보기에 이것은 결국 역사학의 종말이다.
▲ <실과 흔적>(카를로 긴즈부르그 지음, 김정하 옮김, 천지인 펴냄). ⓒ천지인 |
우리 삶에 진실과 더불어 거짓이라는 불순물이 들어가는 이유는 무엇이 진실인지를 해명하는 이야기는 구성되어진 허구이기 때문이다. 역사가는 과거의 특정 사실들만을 선택해서 자신의 관점에 따라 이야기의 줄거리를 구성한다. 이렇게 구성된 역사란 결국 진실과 거짓, 그리고 허구의 삼각관계로 구성된 이야기다. 그래서 헤이든 화이트는 역사적 사실은 발견되는 만큼 발명된다고 주장했다.
과거는 없고 이야기만이 흔적으로 남아있기에 역사가는 이야기를 실마리로 삼아 과거의 진실을 찾아나갈 수밖에 없다. 역사가란 "모든 사람들의 삶의 일부에 해당하는 그 무엇, 즉 진실한 것, 거짓된 것,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줄거리인 허구적인 것의 매듭을 풀어가는 것을 직업으로"(16쪽) 하는 사람이다.
신정아는 책을 써서 한풀이를 했지만, 장자연은 편지와 유서를 남겼을 뿐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기에 장자연 사건은 묻힐 가능성이 많다. 하지만 만약 후대에 21세기 초 한국 사회 지배층의 '밤의 문화사'를 연구하는 미시사가가 출현한다면, 장자연이라는 불쌍한 여인은 다시 역사로 부활할 수 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그의 친구 발터 벤야민에게 "우리는 좋은 옛 것에서보다 나쁜 새로운 것들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말을 했고, 긴즈부르그는 이 말을 책 서문의 제목으로 인용하여 미시사의 모토로 삼았다.
미시사가는 역사가 대체로 '승자의 역사'로 서술되기 때문에 '새로운 나쁜 것들'에 대한 현미경적 관찰을 통해 성찰할 가치가 있는 달갑지 않은 진실을 드러내고자 한다. 종래의 역사가 일반적으로 과거의 풍경을 롱숏(long shots)으로 찍은 거시사였다면, 미시사는 사소한 것을 클로즈업(close up)해서 무의미하게 여겨졌던 것들에서 의미를 찾아내고자 한다. 미시사가는 "신은 세세한 것 속에 있다"는 믿음으로 사소한 것에 대한 '치밀한 묘사(thick description)'를 통해 진실을 드러내고자 한다. 따라서 미시사란 '작은 것으로부터의 역사'의 시각으로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추구하는 일상사라고 정의할 수 있다.
긴즈부르그가 탈근대 역사 이론에 대항해서 역사의 진실을 옹호하고자 할 때 넘어야 할 큰 산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테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제 일어난 일회적 사실을 서술하는 역사보다는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허구를 말하는 시가 보편적 진실을 말하기 때문에 더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이 테제에 입각하면 사실은 진실이고 허구는 거짓이라는 근대 역사학의 사실주의 문법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수사학이 역사의 어머니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역사가는 연구한 사실을 이야기로 구성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스와 로마의 역사가들은 훌륭한 역사 서술의 제일요건을 '에나르게이아'(enargeia, 생동감)로 보았다. '에나르게이아'란 "자신의 눈으로 직접 관찰한 것 또는 즉각적인 비전을 소통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22쪽)을 의미한다. 고대의 역사가들은 '에나르게이아'를 묘사의 목적으로 삼음으로써 진실을 '에나르게이아'의 효과로 보았다.
여기서 문제는 진실의 효과를 만드는 '에나르게이아'란 결국 허구라는 사실이다. 유명한 예가 투키디데스가 그의 <역사>에 삽입한 페리클레스 연설문이다. 이 연설문은 사실이 아니라 정말로 페리클레스가 그 상황에서 했을 법한 것이다. 고대의 역사가는 '에나르게이아'로 과거가 눈앞에서 전개되고 있는 것과 같은 진실 효과를 만들어냈지만, 근대의 역사학자들은 인용과 각주로 신빙성과 객관성을 주장한다.
각 시대의 역사가는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역사의 진실을 대변한다. 고대 역사 서술의 생동감을 주는 묘사가 구술성과 제스처에 근거한 소통 문화에 근거했다면, 인용과 각주는 근대 인쇄 문화의 소산이다. 그런데 오늘의 역사가들이 생동감 있는 이야기를 하는 것 대신에 많은 각주와 인용이 달린 논문을 쓰는 데에만 전념함으로써 대중과의 소통을 상실하여 역사학 위기가 발생했다.
마샬 맥루언의 예측대로 구텐베르크 은하계가 저물어 가고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면서 구술 문화가 부활하고 있다. 긴즈부르그는 미시사를 하나의 완성태가 아니라 앞으로 역사가들이 내용물을 채워나가야 할 하나의 그릇으로 보았다. 전근대에서 스토리(story)와 히스토리(history)는 같은 의미로 쓰였다. 이탈리아어와 프랑스어의 단어가 바로 그러한다.
미시사는 거짓과 진실 사이에 존재하는 허구라는 제3의 영역을 재인식하여 '이야기체 역사의 부활'을 꾀함으로써, 근대 역사학이 설정한 스토리와 히스토리 사이의 경계를 허문다. 미시사는 이런 방식으로 그릇의 내용물을 채움으로써 과연 역사학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탈근대 해체주의에 대항해서 역사의 진실을 구해낼 수 있을 것인가?
긴즈부르그는 <실과 흔적>에서 그럴 수 있다는 믿음을 피력한다. 하지만 이 책을 다 읽은 나에게 그런 믿음은 별로 안 생긴다. 그 이유는 긴즈부르그의 묘사가 생동감이 없어서일까, 아니면 번역 문장의 애매함 때문일까? 이에 대한 판단을 나는 이 책을 치밀하게 읽는 독자들의 몫으로 남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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