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컨 폴리의 <아담의 오류>(김덕민·김민수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는 경제학설의 역사에 관한 훌륭한 교과서로 손색이 없다. 다만 경제학 전공자가 아닌 일반인이 교양 삼아 읽기에는 이해하기 힘들고 재미를 느끼기도 힘들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 책은 경제학설사의 여러 쟁점과 논쟁을 깊이 다루고 있다. 나는 지금까지 이 책만큼 애덤 스미스, 토머스 맬서스, 데이비드 리카도, 카를 마르크스, 윌리엄 스탠리 제본스, 존 케인스 등 역사적으로 중요한 경제학자의 주장과 이론의 핵심 내용을 잘 정리한 책을 보지 못했다.
▲ <아담의 오류>(던컨 폴리 지음, 김덕민·김민수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 ⓒ후마니타스 |
이 책이 다른 책에서 발견할 수 없는 장점이 있다면, 바로 폴리의 이렇듯 해박한 지식과 뛰어난 능력을 바탕으로, 경제학에 내포된 (도덕) 철학 담론의 여러 주제들과 함께, 자유주의, 사회주의, 실용주의(케인스주의) 등 세 가지 경제 사상 전통의 여러 이론적 측면을 깊이 있고 균형 감각을 가지고 평가하는 데 있다.
예컨대 이 책을 읽게 되면, 경제학이 사상적으로는 애덤 스미스가 창시했지만 이론적 발전의 측면에서 보면 데이비드 리카도가 자유주의. 사회주의, 실용주의라는 세 가지 학설 전통의 직접적인 출발점이라는 점도 알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이 책의 부제를 "경제 신학의 안내서"가 아니라 "경제 이론사 안내서"라고 했으면 그 내용과 딱 어울렸을 것이다.
그런데 왜 폴리는 이 책의 부제를 하필 "경제 신학의 안내서"라고 붙였을까?
신학으로서의 경제학?
경제학의 역사와 관련한 기초적 상식 하나. 애덤 스미스(1723~1790년)는 경제학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 그는 도덕 철학 교수였다.
최초의 직업적 경제학자는 토머스 맬서스(1766~1834년)이며 최초의 경제학과는 1903년에 와서야 겨우 앨프레드 마셜(1842~1924년)에 의해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설립되었다. 애덤 스미스 당시 인문학은 (자연) 신학을 기초 학문으로 하면서 도덕 철학과 법학을 응용 학문 분야로 삼고 있었는데, 여기에 경제학을 새로 추가하는데 애덤 스미스가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폴리는 책의 부제목으로 "경제 신학에 대한 안내서(A guide to economic theology)"를 붙였다.
부제 그대로 폴리는 경제학을 엄밀한 과학으로 간주하는 통상적인 경제학자들과는 다르게 생각한다. 그는 경제학은 과학이기 이전에 (그런 면도 일부 있으나) "자본주의적인 경제적 삶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며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복잡하고도 모순적인 경험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것이 온당한지에 대한 논의"(12쪽)라고 본다. 경제학은 "과학이 아니라 사변적인 철학 담론"이라는 것이다.
경제학 : 과학인가 사회 도덕론인가?
그렇다면 폴리는 경제학을 다시금 애덤 스미스 당시의 학문적 지위로, 즉 신학의 하위 학문으로 되돌리려는 것인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이 책은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실용주의 (또는 실용적 개혁주의) 등 통상적인 경제학 저서들에 등장하는 철학적 담론은 거의 다루지 않는다. 또 윤리학적 도덕 철학적 주제도, 이른바 과학에 대한 비판적 논평의 맥락에서 잠깐 언급할 뿐,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이 책에서 폴리가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하는 것은 그가 "애덤 스미스의 오류"에 빠져 있다고 비판하는 이른바 '과학' 또는 '과학으로서의 경제학'을 주장하는 경제학자들의 이론들에 대한 논평이다.
애덤 스미스는 개인은 오로지 자기 이익에 이끌려 경제 행위를 하지만 그것이 결국은 그 대립물인 타인의 이익 나아가 사회 전체의 이익(=국부의 증진)에 봉사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 주장은 "타인에게 해로울 수도 있는 냉혹한 이기심의 추구가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에 의해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도덕적 선으로 변형될 수 있다"(64쪽)는 식으로, 좀 더 도덕적인 내용을 내포하는 표현으로 바뀐다.
이 책에서 폴리가 집중적으로 비판하는 '애덤 스미스의 오류'란 위와 같은 도덕적 명제 자체보다는 <국부론>에 내포된 생각, 즉 '경제적 삶의 공간을 그 밖의 사회적 삶의 공간으로부터 분리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가 보기에 시장 자본주의는 안정적이고 자기 조절적인 체계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에 따르는 자동적이고 자생적(자연 발생적)인 과정이 아니다. 시장 자본주의가 온전하게 기능하도록 하려면 의식적이고 정치적인 노력이 필요하며, 또한 이기심의 추구가 궤도를 이탈하지 않도록 정치적이고 규제적인 개입이 끊임없이 요구된다(275~6쪽).
자본주의는 상당히 유연하고 적응력이 높은 체제이다. 그러나 환경 재앙과 자원 고갈, 빈곤과 불평등, 거시 경제적 불안정 등 모순적 효과를 낳는 것도 사실이다. 여기에서 필연적으로 도덕적 사회적 대립이 발생하게 된다. 폴리가 이 책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경제적 삶과 사회적, 도덕적 삶이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제(과학)자들은 겉으로는 '과학자'라고 자신을 부각시키지만 실제로는 어쩔 도리 없이 사회적, 도덕적 문제들에 대해-소극적으로 또는 적극적으로-발언해 왔다. 결국 경제학은 과학적인 것만큼이나 신학적, 도덕 윤리적이고 가치 의존적이었다. 실증 경제학과 규범 경제학의 구분도 사실은 불가능하다.
이 책은 일부 경제학자들(대표적으로 마르크스와 베블런)은 애덤 스미스의 오류를 어느 정도 피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 오류에 빠져 있다는 명제를 중심으로 경제학의 역사를 개관하고 있다.
애덤 스미스의 수수께끼 : 이기심과 공감
여기서 잠깐! 폴리가 경제학의 대가들에게 휘두르고 있는 칼을 저자 자신에게 들이대 보자. 혹시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이랬다저랬다 동요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폴리 자신 또는 보다 넓게 말해서 저자의 거의 비슷한 입장을 가지고 있는 케인지언(엄밀히 말해 포스트 케인지언)은 아닌가?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1776년)에서 '경제' 영역을 다룰 때는 분명 이기심과 경쟁에만 의존해서 설명한다. 그러나 그는 <도덕 감정론>(1759년)에서 '사회' 질서를 설명할 때는 이기심과 함께 공감(sympathy)을 핵심 개념으로 등장시키고 있다. 공감이라는 인간 본성이 공평무사한 마음의 관찰자(양심)를 개인들의 마음에 형성하도록 유도하고, 이 양심이 이기심의 무한질주를 적절히 제어하여, 어떤 외부 강제가 없이도 사회질서가 형성된다고 스미스는 보았다.
통상 경제는 사회의 일부라고 보았을 때 왜 스미스가 경제를 설명할 때는 공감을 쏙 빼버리고 이기심만으로 그 질서 원리를 설명한 것인지 의문이 생긴다. 이 의문을 후에 애덤 스미스 연구자들은 '애덤 스미스 수수께끼(Adam Smith puzzle)'라고 이름 붙였다.
데이비드 리카도와 존 스튜어트 밀을 거쳐 근대 경제학은 19세기 후반 이후 크게 보아서 자유주의 학설과 사회주의 학설, 그리고 마셜에서 케인스로 이어지는 개혁주의 학설로 분화해 나갔다. 이들 세 학설이 애덤 스미스 수수께끼를 어떻게 나름대로 풀어나가는지의 관점에서 경제학설의 역사를 정리해 보자.
이기심과 공감에 관한 3개의 경제 사상적 전통
자유주의 경제학은 완전 경쟁만 보장되면 이기심에 이끌리는 개인들의 합리적, 계산적 행위가 개인적 효율성과 사회적 효율성(파레토 최적)을 동시에 달성한다고 보았다. 여기서, '이기심'이 아닌 '공감'에 이끌리는 국가 개입은 예외적인 상황을 제외하고는 불필요하다는 결론이 필연적으로 나온다.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경제학은 '이기심'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시장의 운동은 결국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낳고, 궁극적으로 사회주의가 도래할 것이며, 사회주의에서는 '공감'의 원리가 지배적 원리가 될 것이라고 보았다.
이 두 대립되는 중심 학설에 비해, 케인스의 경제학은 시장의 긍정적인 작용, 따라서 '이기심'의 긍정적인 작용을 승인하는 한편, 시장의 과도한 이기심은 '공감'의 정신(공공성의 정신)에 의해 사회적으로 통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보았다.
자본주의에서 이 '공감'의 정신을 조직하는 대표적인 제도적 장치는 '국가'이므로 케인지언 경제학자들은 국가 개입을 시장만큼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 개입의 명분으로 다양한 '도덕적' 기준을 동원한다.
이기심의 제국과 경제학 제국주의
이기심이 아닌 공감의 원리가 예외적인 상황에서만 필요하다고 보는 자유주의 경제 신학(?)의 입장에서는, 시장이 아닌 사회 즉 비경제적 삶을 경제학의 영역에 끌어들이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공감'의 원리에 의해 움직이는 비경제적, 비시장적 삶은 실제 삶에서 아주 작은 예외적 영역에 불과하다고 자유주의 경제학은 보기 때문이다.
오늘날 자유주의 계열의 대표적 학설인 신고전파 경제학에 속하는 게리 베커 같은 학자는 '이기심'에 기초해서 도출되는 '경제' 원리로 범죄, 인구, 결혼 그리고 여타 대부분의 '사회적' 삶도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극단적 자유주의 학자들은, 폴리의 주장과는 달리, '사회적' 삶을 무시하기는커녕 사회적 삶에도 경제적 삶과 동일한 원리가 적용된다고 보고 '사회적' 활동도 암묵적으로 '시장' 활동이라고 보면서 '시장'의 논리로 그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도덕도 한 꺼풀 벗기면 이기심에서 유래한다는 생각이다.
이렇듯 폴리가 주장하는 바와 달리 자유주의 신고전학파는 그렇게 순진하지 않으며, 야심적으로 사회 도덕적 삶도 경제학에 끌어들이고 있다. 다만 그들은 시장=사회라고 보면서 경제적 삶과 사회적 삶이 별개가 아니라고 볼 뿐이다. 이리하여 자유주의 경제학은 '경제학 제국주의'가 되어 사회학과 도덕철학 등 여타 학문들까지 정복하려 한다.
자유주의 경제학의 '입장'에 '오류'는 없다!
지면 관계상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고 결론만 정리해보자. 내가 보기에 경제와 분리된 삶, 도덕의 영역이 따로 있다고 전제하는 폴리의 입장 자체가 하나의 신학이며, 그가 책에서 전개하는 모든 논의는 이 신학의 자기 독백이다. (하긴 모든 철학은 인간의 자기 독백이라고들 하지만….)
폴리가 말하는 애덤 스미스의 오류는 그의 입장에서 보면 오류이지만 다른 입장에서 보면 오류도 아니고 진실도 아니다. 오로지 그의 절충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인 (케인스주의) 경제학설의 관점에서만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좀 단순화하여 정리하자면, 그가 오류라고 지적하는 애덤 스미스 이래의 자유주의 사상은 사회=시장이라고 보며, 그 입장에서는 시장(경제)이 아닌 사회(도덕)적 삶이 따로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와 같은 '입장' 자체를 '오류'라고 할 수 없다. 이에 반해 마르크스는 처음부터 경제를 '사회 속에서' 설명하고 있다. 단지 폴리와 같은 절충주의자들만이 경제와 사회를 분리된 것으로 보고 상호 보충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모든 경제학은 하나의 신학, 증명되지 않은 철학적 입장을 가지고 있다는 폴리의 주장은 타당하다. 이 주장은 이미 철학에서 합의된 견해이며 특별히 논란거리도 아니다. 문제와 혼란은 하나의 철학적 '입장'을 가지고 다른 '입장'의 경제사상을 '오류'라고 비판/비평하는데서 야기되는 것이다.
폴리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오류를 범하고 있는 사람은 폴리 자신이다. 내가 알기에 폴리는 경제학자로서는 일급의 학자이다. 그는 자신의 경제학 이론을 전개할 때 그 어떤 '오류'도 없다. 다만 이 책에서처럼 그가 메타 학문(즉 철학)에 주목하는 순간 그는 조금 이상해져 버렸다. 그는 '오류'와 '입장'의 차이를 혼동하는 기초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 책을 독자들에게 권하며
이런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글머리에서 소개했듯이 이 책만큼 경제학과 경제학사의 역사에서 중요한 사상가들과 학자들의 주장과 이론의 핵심 내용을 잘 정리한 책은 지금까지 없었다. 따라서 나는 이 책을 "경제 신학 안내서"가 아닌 "경제 이론사 안내서"로서 독자들에게 권하는 바이다. 특히 경제학을 학부에서 전공하고 있거나 전공했던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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