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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짱이던데요?"…'거짓 죽음' 판치는 야만의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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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짱이던데요?"…'거짓 죽음' 판치는 야만의 세상!

[프레시안 books] 전상국의 <남이섬>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 지능, 언어 그리고 문화 등을 답으로 쉽게 말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다른 점은 바로 그 '다름'에 대해 집착하는 것 그 자체가 아닐까 싶다. 인간이 스스로 동물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그것에 맞추어 답을 개발하고 찾아나가면서 인간만의 역사를 쓰게 한 원동력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동물의 야성을 비웃으면서 스스로 그와는 다르다고 생각하는 우리들이 저질러온 그간의 역사를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동물의 야성과는 다른 지점에 스스로를 위치시키고 그것만으로는 모자라 다시 인간 종족의 내부에서 무수히 많은 '다름'을 찾아내서 나와 다른 것은 기어이 소외시키고 배제해 나가는 동안 피로 얼룩져온 그 역사 말이다.

반세기 가까운 시간 동안 소설쓰기에 몰두하면서, 한반도에서 벌어졌고 또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바로 그 '역사'를 탐구해 온 전상국은 그런 면에서 가장 '비인간적'인 작가이다. 그의 열 번째 소설집인 <남이섬>에 이르면 '다름'을 유지시키는 모든 경계들이 작가의 붓끝을 통해 닳고 닳아 문득 사라져버리고 마는 것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남이섬>(전상국 지음, 민음사 펴냄). ⓒ민음사
가령 소설집의 처음에 수록된 '꾀꼬리 편지'를 보자. 막연한 기다림과 그 기다림이 변해버린 욕정을 끌어안고 평생을 살아가던 '나'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도 우리는 깊고 무거워져가는 사랑의 진정한 모습과 따뜻한 포옹을 나누게 될 것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네댓 살 나이에 귀청을 잃었다는 용 씨"(14쪽)를 중심으로 읽다보면 더 흥미로운 지점에 가 닿게 된다.

용 씨는 '연상인 조카'와 '세 살 아래인 삼촌' 간이면서도 서로 마음이 잘 맞는 술친구 지간인 '초헌'과 '우목'의 사이에서 우목을 경원하면서 그 둘의 차이를 부각시킨다. 심지어 '나'에게는 용 씨가 먼저 간 초헌을 따라 같은 곳에 수목장을 지낼 예정인 우목의 유골함이 들어오는 것을 훼방 놓을지도 모를 존재로 여겨진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용 씨는 우목의 죽음을 누구보다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슬퍼함으로써 갈등을 일으키는 모든 경계선들을 스스로 내려놓는다. 그리고 결국 이 소설은 작가가 화자의 입을 빌려 직접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죽음이라는 문제에 이른다.

드디어 늙음도 없고 죽음도 없으며 늙음과 죽음이 모두 없어졌다는 생각조차 없다는 절간의 말씀처럼 모든 것을 관통하여 하나 되기, 그 없음이 바로 죽음이 아니겠는가. (37쪽)

이렇게 <남이섬>에 실린 작품들은 경계 대신 죽음을 품고 있는 이야기가 된다. 가령 표제작 '남이섬'은 나미라는, "섬에서 죽어 거기 어딘가 묻혀 있더라도 그 넋만은 뭔가 다른 형상으로 환생하여 섬 주변을 떠돌고 있을"지 모를 여자의 정체(43쪽)를 좇는 이야기이고, 중편 '지뢰밭'은 어릴 적 경험한 불확실한 전쟁의 기억 속에서 "죽은 것이 확실한 상황에서도 그 시신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끝내 실종"으로 여기고 그 죽음들을 찾는 이야기(196쪽)인 것처럼 말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들은 죽음을 극복의 대상으로만 여기면서 그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일에 인색해지거나 오히려 죽음의 가치를 희석시켜 희화화된 언어적 표현의 영역에 가두고 말았다. '지뢰밭'에서 문학 답사를 나온 어떤 대학생이 마을의 이야기를 채록하고자 초등학교 교감인 '나'에게 던지는 질문을 보자.

"중학교 때 <태극기 휘날리며>란 영화를 봤는데 정말 짱이던데요. 선생님이 직접 겪은 그 전쟁은 어떠셨어요, 무서웠나요, 아니면 영화처럼 그렇게 재밌었나요?" (162쪽)

이처럼 현실은 실제적인 죽음조차 밀어내버리는 시뮬라크르들로 가득 차 있는 공간이 된다. 특히 자본주의적 가치 실현이 유일한 목표가 되면서 나눔의 가치를 제한적이고 일회적인 것으로 국한시킨 것처럼, 죽음의 의미 역시 퇴색되어 엔터테인먼트 산업 속의 박제품으로 전락한다. 이제 이마무라 히토시(今村仁司)의 지적처럼 근대적 기술들이 죽음을 추방한 자리에는 경제적 합리성 등을 내세운 '효율적인 살육'만이 남게 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한국전쟁을 천착해 온 전상국이 <남이섬>을 통해 그 경계 지우기를 넘어 죽음이라는 사건에 이르게 된 과정이 예사롭지 않다. 이것은 단순히 죽음을 갈등의 봉합으로 사용하는 소설적 장치가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죽음을 보다 긴밀하게 끌어들임으로써 인간의 삶이 살육과도 같은 효율성을 막는,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임을 보여주고자 하는 작가의 웅변으로 여겨진다.

순서상 소설집의 마지막에 실려 있는 '드라마 게임'의 '아버지'와 '아내'를 보자. 두 인물은 모두 이야기 구성상 중심인물인 '고모'가 자신들의 부모를 전쟁 중에 돌아가시게 했다고 여겨 기피하거나, "보험 설계사에서 파출부에 이르기까지 평생 가리는 일 없이 열심히"(231쪽) 살아 온 고모의 억척스러운 삶을 오히려 징그럽다고 여긴다. 그러고는 아무 목적이 없는 "집 뒤꼍의 땅굴 파기"(247쪽)에 맹목적으로 매달리거나(아버지), 대인기피증에 걸린 듯 낮에도 어둡게 만든 집 안에만 머물러 있다(아내). 하지만 2년 전부터 계획된 고모의 죽음-자살은 우여곡절 끝에 아버지를 땅굴 속에서, 그리고 아내를 어두운 집에서 세상의 바깥으로 나오게 만든다.

이는 진정으로 죽음의 앞에 서서 타인의 죽음 역시 그 자체로 공감해보는 경험만이 우리를 구원해 줄 것이라는 작가의 바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거짓 죽음으로 가득 찬 이 야만의 세상 속에서 말이다.

"나 넘 좋으면 죽고 싶거든."
"알았어, 오빠. 내가 오늘 밤 죽여줄게." (1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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