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워킨의 자유주의(liberalism), 그것은 현대 서구 자유주의를 대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고, 또 우리 사회 주류 언론 그래서 대중들에게 퍼져 있는 자유주의와는 아주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이 책에서 우리는 자유주의의 믿을 만한 지성을 접할 수 있고, 자유주의에 대한 우리 사회의 편협한 인식을 재고해 볼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제1부는 드워킨과 우리 학자들 간의 대담이고, 제2부는 우리 학계의 드워킨에 대한 연구 및 소개 논문들이다. 2008년 한국학술협의회는 세계 석학 강연 시리즈로 드워킨을 초청하였고, 그는 80세 노익장을 과시하며 세미나 4회, 강연 2회, 인터뷰 2회라는 바쁜 일정을 소화하였다. 책의 제1부는 그 세미나, 강연, 인터뷰에서의 질의응답을 담은 것이며, 제2부의 논문들은 그를 위한 한국법철학회 독회의 성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드워킨 강연의 본문은 그의 최근 저서
로널드 드워킨, 그는 현대 법철학과 정치철학을 대표하는 학자이다. 굳이 그 명망을 따지자면, 한국 출판계에 선풍을 일으켰던 마이클 샌델보다 한 수 우위일 것이다. 그는 비록 한국 사회에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학계에서는 주요 인물이었다. 법철학계에서는 1980년대부터 이미 논의가 시작되었고, 이어서 정치철학계에서도 본격적인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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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주의의 가치들>(김정오 외 지음, 아카넷 펴냄). ⓒ아카넷 |
이후 드워킨은 그 사상의 폭과 깊이를 계속 넓혀, 철학 일반, 정치철학, 법철학을 포괄하는 거대 체계를 세워나갔다. 그 가운데 정치철학, 특히 정의와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저서는
이번 <자유주의의 가치들>의 국내 기획 출간은 말하자면, 드워킨의 사상의 전체 면모를 일람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할 수 있다. 드워킨과의 대화를 포함한, 국내 최고 전문가들의 압축 설명으로 구성된 '속성 과정'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드워킨의 사상과 논의는 상당히 정교하고, 세밀하며 또 논쟁적이다. 이 책도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드워킨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고, 관련 학문 분야의 기본 이론이 낯설다면, 좇아가기 힘들 수도 있다. 책의 제1부인 대담 부분조차도 매우 학구적이다. 그러나 다행이라면 책의 부피가 크지 않고, 또 앞뒤로 계속하여 핵심 내용이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지적 인내심 혹은 퍼즐 맞추기와 같은 호기심을 가지고 임한다면 법철학 및 정치철학의 핵심에 닿는 보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더욱 권하고 싶은 독법은 한국 사회 자유주의의 미래를 위한 고민과 의문으로 읽는 방법이다. 복잡 난해한 문맥들 사이사이에서 우리 정치 경제의 현안과 공동체의 미래에 대한 어떤 통찰을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진리란 '은폐된 것의 드러냄'이라고 하였던가? 그 동안 강요된 무지로부터 해방되는 기쁨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를 위해 나는 책의 구성을 축자적으로 좇아가지 않고, 한국 사회에 서글프게도 희소한 자유주의에 대한 진리를 공유하고자 몇 가지 논점을 중심으로 서술해 보겠다.
자유민주주의
한국 사회에서 자유주의란 소유권 절대의 자유방임주의를 뜻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다. 인간의 가치가 실종되고 재산과 위세, 그에 근거한 경쟁의 자유만이 휑뎅그렁하게 남은 몰골이다. 그에 대하여 드워킨은 진정한 자유란 곧 존엄(dignity), 자존(self-respect), 진정성(authenticity)임을 말한다(93, 202쪽 등).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실존주의 철학이 말해주듯이(206쪽), 자유란 곧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며, 인간의 가치란 곧 삶의 결단과 성실성 이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드워킨은 실존주의에 그치지 않고, 객관적, 상호적 가치로 나아간다(73쪽). 인간적 평등, 즉 동등한 배려와 존중의 원칙이 없다면 그러한 자유도 없다는 것이다. 타인의 삶에 대해 존중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존중의 원리를 따르지 않는 것이다(205쪽). 그렇다면, 자기 사랑 이전에 자기모멸부터 배우는 우리 아이들, 충만한 자아 대신 허영과 허세에 매달리는 우리 자신들, 우애와 관용 대신 질시와 비하가 만연한 한국 사회의 자유주의는 얼마나 빈곤한가?
마찬가지로 드워킨은 다수의 지배, 전체의 이익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와 거리가 멈을 얘기한다. 그가 말하는 민주주의는 '다수결 민주주의'가 아니라 '파트너십 민주주의'이다(33, 103, 349쪽 등). 다수결은 의사 결정의 현실적 절차일 뿐이며, 민주주의에서 진정 중요한 것은 모든 이들에 대한 동등한 배려와 존중, 발언권 보장 그리고 이점이 드워킨에 있어서 특별한 것인데, "개인의 고유한 자존감에 관한 것은 그 자신 이외에 누구에도 결정권을 위임할 수 없다"는 원칙이다(33쪽). 그렇다면, 각 개인의 진실이 우습게 취급되고, 정부의 권위에 의한 국익 우선주의가 국민들의 존재 근거인양 얘기되는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는 과연 안녕한가? 드워킨은 심지어 다수의 힘을 약화시켜 민주주의를 개선시킬 수 있으며, 그것이 사법부 독립의 의미라고까지 얘기한다(101쪽).
정의와 공정
드워킨의 민주주의론은 정치적 평등론으로 발전한다(354쪽). 동등한 배려와 존중의 자유민주주의에서 평등의 정의론이 나오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한국 사회의 이명박 정부도 '공정 사회'를 내세웠다. 드워킨의 정의론은 공정 사회에 대한 자유주의적 대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가 말하는 공정 사회란 무엇인가? 혹시 경쟁의 원리, 성과주의가 아닐까? 그러나 드워킨의 정의론은 그와는 정반대이다.
드워킨은 공적주의(principle of merit/desert)를 거부한다(129쪽). 이는 드워킨만이 아니라 롤스에서 시작한 현대 자유주의의 기조이다. 롤스는 각 개인의 가치를 구별하는 일은 무망하다는 근거에서, 드워킨은 그에 대한 판단을 정부에 맡길 수 없다는 이유에서 공적주의에 반대한다.
대신 현대 자유주의자들은 차이 대신 동등성을, 변별보다는 평등성을 정의의 기본 원칙으로 삼는다. 모든 이들이 자신의 삶을 소중하게 살아가는 이상 최소한의 삶의 자원을 공유할 수 있는 체제를 공정하다고 보는 것이다(130쪽). 이를 위해 롤스는 재산 분유적(property-owning democracy) 혹은 최소 수혜자들의 처지를 향상시키는 사회 경제 체제를 요구하였고, 드워킨은 자원의 평등론(equality of resources) 혹은 최악의 삶에 하한선을 두는 사회 보험적 해결책을 제시한다(121, 123, 293, 301, 382쪽 등).
드워킨은 공동체 구성원들이 평등한 자원으로 출발하여 자신의 삶을 자율적으로 영위해 나가되, 각자 상상할 수 있는 위험을 위하여 일정한 몫을 떼어내어, 사회적 보험, 즉 공통의 사회 안전망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각 개인의 선호와 선택을 존중하되, 행운과 불운에 의하여 인간의 존엄이 훼손당할 위험을 최소화하자는 것이다. 드워킨의 정의론은 각자의 선택에 민감하고(sensitive), 주어진 여건 즉 경제적 배경, 성, 인종, 특별한 기술, 장애 등에 둔감한(insensitive) 분배 체계를 지향한다(120, 289쪽 등). 이렇게 하여 드워킨의 공정 사회에서는 주거, 의료, 실업 등에 대한 사회적 권리가 보편적 권리, 즉 인권으로 인정된다(28, 126쪽).
드워킨은 자신의 재분배 체계는 새로운 것이 아니며 영국의 페이비언 사회주의, 미국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 현대 유럽 사회민주당의 사회 보장 체계에 이미 반영되어 있음을 지적한다(296쪽). 불법, 특혜, 요행에 의해 점철된 우리 부의 역사, 불로소득을 훈장으로 여기고, 깨끗한 노동을 조롱하는 한국 사회, 그리하여 '부유세'라는 단어조차 꺼내기 어려운 우리 현실에서 드워킨의 자유주의적 평등론만 하여도 얼마나 희귀한 것인지! 이러고도 우리는 과연 '자유의 사회'임을 내세울 수 있을까?
법치주의와 헌법 재판
한국 사회에서 법치주의는 규칙의 획일적 적용으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다. 법치는 정치와 달리 순수하고 중립적이라는 것이다. 다른 한편 국익과 주류 여론은 최상의 법이 되기도 하다. 사법부조차 그에 따라 정렬할 것을 요구받는다. 그리하여 경제 발전을 위한 질서 유지의 수단으로 법치주의가 활용되기도 한다. 이것이 진정 자유주의 법의 모습인가?
드워킨의 법철학은 그와 정반대이다. 드워킨에서 법이란 규칙(rule) 이전에 원리(principle)이다(64, 152쪽 등). 사법 판단은 규칙의 단순 적용이 아니라 원리에 대한 숙고이며, 형식적 개념 논리가 아니라 정치 도덕의 구현이다. 그 정치 도덕은 정파적 판단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의 근본 원리인 '동등한 배려와 존중'에 대한 헌신을 뜻한다. 판사는 정치적 원리에 관하여 중립적일 수 없는 것이다(40쪽). 드워킨의 사법부는 국가 목적, 다수의 요구에 합세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로부터 모든 개인, 특히 사회적 약자의 존엄을 지키는 소임을 갖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사법 심사(judicial review), 즉 헌법 재판의 의의도 도출된다. 한국 사회에서도 헌법재판소의 역할이 점점 커지면서 헌법 재판과 민주주의의 관계, 혹은 사법 국가(juristocracy)의 위험성에 대한 많은 논란이 있다. 법 및 정치철학계에서도 소위 '입헌주의와 민주주의의 대립'이 다루어진다.
이에 대해 드워킨의 '통합성(integrity)'의 철학(170, 327쪽 등)은 헌법 재판과 민주주의는 상치되는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이미 보았듯이 드워킨의 민주주의는 단지 대표성과 다수결만으로 충분치 않은 것이다. 개인의 고유한 인간적 진실은 다수에 의하여 처분될 수 없는 것이며, 바로 그 지점에서 드워킨의 사법부의 결정적 역할이 있다(344, 347쪽 등).
이러한 사법부의 역할은 한편으로는 사법 소극주의로 나타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법 적극주의로 나타난다. 권리, 인권에 관계되지 않은 정책, 정치적 문제에 대하여 사법부는 자제하여야만 한다. 드워킨은 행정 수도 이전에 관한 법률의 위헌 결정에 대한 우리 학자의 질문에 대하여 미국이었다면 재판관 탄핵 얘기도 나왔을 것이라고 농반진반(弄半眞半)의 촌평을 하였다(37쪽). 반면에 드워킨은 개인의 인권, 공동체의 근본적인 정치 도덕에 관한 문제에 대하여는 설사 헌법이 모호한 측면이 있다고 하여도 법관이 그 올바른 해법을 위하여 적극적인 헌법 실천을 해야 한다(333, 348쪽 등).
자유주의 사법은 사법 적극주의나 사법 소극주의 어느 한 편이 아니라 모든 이들에 대한 국가의 의무, 동등한 배려와 존중이라는 자유주의 정치 도덕에의 충실성을 의미할 뿐이다. 이러한 드워킨의 사법론은 '민주주의 보강'으로서의 헌법 재판이라는 일리(Ely)의 명제, 즉 소수자의 대표성이 침해되는 경우에 그 회복을 위한 것이라는 절차적 명제를, 실체적인 차원에까지 확장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340쪽). 이와 같은 드워킨의 헌법 재판론은 '인권의 최후의 보루로서의 사법부', 특히 미국 얼 워렌 대법원장 시절의 소수자 인권과 자유의 보호를 위한 사법에 대한 유력한 법철학적 해석이라고 할 것이다.
드워킨은 영미 아니 서구 법철학계에서는 20세기 후반 가장 명민한 법철학자라고 할 수 있으며, 염수균의 표현을 빌면 정치철학계에서 현존하는 최고의 학자로 평가된다. 물론 명석함과 위대함은 같은 말은 아닐 것이다. 나의 입장에서는 드워킨 앞에 롤스를 놓고 싶다. 염수균은 드워킨의 정의론이 롤스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으로 평가하지만, 나에게 드워킨은 롤스의 정의론이 개척한 길을 보다 넓혀 준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드워킨과 롤스 모두 자유주의의 이상을 위한 인류의 역사적 순례, 각인의 진실이 살아 숨쉬며,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되는 공동체에 대한 인류의 소망을 전하는 전령들일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전하는 자유주의의 가치는 우리 사회에서는 오히려 낯설다. 그렇다면, 그동안 우리들이 그렇게 많이 들어왔던 '자유민주주의'란 무엇이었나?
이 책, 드워킨의 자유주의론이 한국 사회에 편협한 인식으로부터 진정한 자유주의를 복원하는 데에 기여를 할 수 있기를 바라고, 한국 사회에서도 그와 같은 자유주의 전령들의 기쁜 소식이 이어지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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