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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그래, 우린 루저야!" 인정하면 끝?

[프레시안 books] 전석순의 <철수 사용 설명서>

최근 우리 소설의 배경에 주목하면 그 다양함의 진폭이 거의 최대치에 이른 것처럼 보인다. 박민규 식의 소위 '우주적 상상력'이 펼쳐지는 공간에서부터 김애란이나 김미월 등의 '경험적 사실성'이 돋보이는 공간인 (반지하, 옥탑, 잠만 자는) 방이나, 편혜영·김숨·황정은 등의 가공력을 거쳐서 철저하게 살 발라진 현실 공간에 이르기까지 그 배경들의 종횡무진은 심리적·논리적 제한을 개의치 않는다.

재미있는 것은, 다양한 배경에도 불구하고 이런 공간들이 수렴되는 소설 속의 인물이 다소 천편일률적으로 보일만큼 동질선상에 있다는 점이다. 이는 종횡무진의 배경이 사실은 자본주의적 현실의 만화경이라는 것, 따라서 그 인물들이 징그러울 정도로(uncanny) 지금의 나와 닮아 있을 수밖에 없다는 데에서 기인한다.

전석순의 <철수 사용 설명서>(민음사 펴냄)는 정확하게 이 지점에서 출발하고 있다. 제목 그대로 이 소설의 주인공은 '철수'다. 고유 명사로서 자신 이름의 가치를 잃는 대신 한국 사회의 보이지 않는 곳곳에 이르기까지 '홍길동'과 1, 2위를 다투며 고군분투 삶을 살아나가고 있는 바로 그 철수 말이다.

이 소설을 통해 우리는 그간 소문으로만 떠돌던 철수에 대해 키, 학력, 몸무게, 발 사이즈 등등 유례없을 정도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작품을 읽어 나가면서 철수의 유년 시절에 벌어졌던 여러 일들이나 또는 번번이 실패하고 마는 연애사 등 철수만의 내밀한 일들을 알아 나갈수록 철수가 당면한 문제, 그리고 내가 하루하루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의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은 점점 종잡을 수 없게 된다. '상대방과 나를 잘 안다면 위태롭지 않다'는 말은 현실에서 더 이상 충고의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 <철수 사용 설명서>(전석순 지음, 민음사 펴냄). ⓒ민음사
자본주의식 사고와 삶의 태도가 유일한 가치로 받아들여진 현실에서 사실상 '나'와 '너'의 관계는 화폐로 매개되는 상업적인 관계 속에서 재편된 지 이미 오래다. 단순하게 예를 든다면, 여성인 '너'의 마음을 잘 아는 '나'가 '너'를 위해 '여성 전용 대출 상품'을 만드는 식으로 말이다. 따라서 어느 대기업의 광고대로 우리는 심지어 '또 하나의 가족'을 받아들일 수도 있게 되었지만, 그것은 금액을 지불할 수 있는 가능성이 유효한 내에서만 작동하는 위태로운 관계일 뿐이다.

이제 자본주의적 현실에서 '위태로움'은 극복해야 하는 가치가 아니라 상업적 관계의 나와 너, 최근 각광받고 있는(?) 단어로 다시 말하자면 '갑'과 '을'의 관계 속에 영구적으로 위치한다. 때문에 우리는 새로운 관계를 맺을 때마다 과거에는 없었던 또 하나의 위태로움을 추가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이것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란 사실상 쉽지 않다. 나의 지불 능력을 어떻게든 지속시켜 '갑'과의 관계를 최대한 이어나감으로써 위태로움이 현실의 삶을 뒤덮어 버리는 시기를 유예하는 것 이외에는 말이다.

게다가 이러한 삶의 방식은 평균적 인간이라면 당연히 누려야 할 혜택으로 여겨지고 심지어 추천된다. 위에서 언급한 대기업이 최근 또 한편의 광고를 통해서 '갑'과의 유효 관계가 지난 뒤에도 또는 '갑'의 소속이 아니어도, 모든 사람들을 '을'의 관계로 지속시키고 싶어 하는 욕망을 굳이 감추려 들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이 관계에서 어긋난 자들은 폐기 처분 대상인 '불량품'의 멍에를 쓸 수밖에 없게 된다.

<철수 사용 설명서>는 이와 같은 현실 속의 '갑-을 관계'에서 벗어나 철수 고유의 기능을 살린 정당한 사용 기회를 얻기 위해 스스로 적어가는 내용으로 빼곡하다. 이 작품의 목차 그대로 "취업 모드, 학습 모드, 연애 모드, 가족 모드" 등의 각종 사용 환경에서 일종의 테스트를 거치고, "설치 방법, 청소 방법"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인 용례들을 통해 얻어 낸 뒤 "제품 보증서"까지 갖춘 이 '설명서'를 통해 '철수'는 남이 자신에게 멋대로 붙인 '불량품'의 이름을 벗어나고자 하는 목표에 도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현실에서는 물론, 소설 속에서도 달성이 불가능해 보이는 이 목표는 그럴수록 철수'들'에게 "앞으로도 끊임없이 완성해 나가야 할 사용 설명서"(220쪽)를 작성해나가는 원동력인 동시에, 작가의 가능성을 점칠 수 있게 해주는 통로이다.

하지만, 이 매력적인 이야기 방식과 성실한 시선에도 불구하고 <철수 사용 설명서>의 이야기 그 자체는 '설명서'가 출발한 지점에 여전히 머물고 있다. 따라서 자칫 이 작품은 철수들, 내지는 철수 세대의 이야기로 적극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철수'라는 특수 상황에 대한 설명서로만 읽힐 우려를 가지고 있다.

너무나 잘 알려져서 최근에는 바람 빠진 공처럼 탄력을 잃고 사용되기도 하지만 최근 젊은 세대를 부르는 명칭으로 여전히 유효한 '88만 원 세대'라는 말을 비롯하여, 어떤 한 세대를 부르는 명칭들에는 궁극적인 목적이 오히려 숨겨져 있다고 생각한다. 그 궁극의 목적이란 어떤 명칭이 그 세대를 부르던 효용 가치를 잃게 하고, 또 다른 어떤 수식도 필요 없도록 만드는 운동성을 그 세대에 직접 부여하는 것이다. 결국 '88만 원 세대'라는 명칭 역시 "88만 원"이 어떤 한 "세대"를 규정하는 가치관이 되지 않도록 끊임없는 자극이 되고자 한 고민이 담겨 있는 셈이다. 따라서 '88만 원 세대'라는 명찰은 단순한 일탈이나, 무기력함의 제스처 등에 붙여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철수 사용 설명서>를 비롯하여 최근 쏟아져 나오는 우리의 젊은 소설들이 세대적 공감과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뛰어난 현장감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개인적인 일상의 영역 안에 가두고 그 운동성에 대한 고민을 보여주지 못한 채 오히려 자신이 지적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현실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이는 양상은 우려스럽다. 예를 들어 이 소설에서 다분히 상징적으로 시종일관 등장하는 철수의 '오류 현상'인 "발열 반응"(44쪽)은 그것을 대하는 철수의 희극적이고 무의미한 태도들(소주를 몸에 바르거나 해열제를 미리 먹는)로 인해 상징적인 맥락을 잃고, 결국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과 비슷한 "그녀의 오류"(214쪽)를 만났을 때도 단순한 육체적 의미만 남는 또 다른 "오류의 밤"(215쪽)에 그치고 마는 것과 같이 말이다.

사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같은 지면에서 언급하기에는 다소 부적절하지만, 새롭고 신선한 것을 찾아내서 문학상을 수여함으로써 스스로 기존의 가치관을 깨뜨린다고 생각하는 문학상 그 자체이다. 때문에 대다수의 문학상들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수면 위로 반짝이는 것들에 쉽게 매혹되는 양상을 보일 수밖에 없다. 보다 솔직히 말하자면, 문학상들이 진짜 깨고 싶은 유일한 것은 이전 수상작의 판매 부수일 테니까 말이다.

따라서 실존적 고뇌가 만든 비실용적 산물의 일종인 문학에 보다 쉽게 생존적 고민이 받아들여지고, 또 문학상은 그것을 추인함으로써 우리 문학의 작가 예비군들에게 일정한 양식화로 제공하는 우려스러운 경향이 감지된다. 소위 '88만 원 세대'를 다루었으며 문학상을 받은 장편 소설들에 국한시켜 봤을 때, 얼른 떠오르는 작품들(문진영의 <담배 한 개비의 시간>(창비 펴냄), 한재호의 <부코스키가 간다>(창비 펴냄), 김혜나의 <제리>(민음사 펴냄))을 비교해 보더라도 그 성과와 한계가 아주 유사한 것을 보면 이런 사실을 쉽게 확인 할 수 있다.

문학이라는 것이 어떤 기계라고 한다면 "루저"를 보여준다고 해서 그 루저를 생산하는 사회에 대한 비판을, 또는 "취업 준비생"을 보여주면 그대로 취업 준비생 기간을 겪을 수밖에 없는 세대들의 희망 찾기를 보여주는 자동 기계는 아니다. 전석순이 이 소설을 통해서 말하고 싶은 것과 똑같이 문학 역시 각종 모드들로 분화된 테스트를 견디고, 수많은 주의사항을 거쳐야 하는 제련(製鍊)의 과정 그 자체이다.

<철수 사용 설명서>를 읽으면서 든 생각은, 기우이겠지만, 그 과정을 쉽게 건너 뛸 '설명서'가 문학에서도 요구되고 있는 것일까 하는 걱정이었다. 작가의 가능성에 대한 기대감과 함께 책장을 덮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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