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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의 고독, 그러나 가장 행복했던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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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의 고독, 그러나 가장 행복했던 남자!

[프레시안 books] 정민의 <삶을 바꾼 만남>

정민의 <삶을 바꾼 만남>(문학동네 펴냄)을 읽었다. 찾아서 꼼꼼히 읽어야지 생각은 늘 가지고 있으면서도 게을러서 하지 못하고 말았던 <여유당전서> 이외의 다산 정약용의 글들을 읽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무척 크다. 쪽지 편지로부터 긴 편지나 수많은 시를 접하면서 '또 이런 측면이 다산에게도 있었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다산의 친필이 있는 곳이면 멀고 가까운 곳을 가리지 않고 발품을 아끼지 않았던 저자의 노고에 감탄의 뜻을 전하고 싶다. 애써 찾아낸 유주에서 병고에 시달리던 다산의 아픔과 황상이라는 신분이 낮은 제자를 그처럼 끔찍하게 아끼고 사랑했던 점을 발견하면서 가슴이 저려옴을 느껴야 했다.

18년의 귀양살이로 거의 세상에서 잊혔던 다산을, 당대의 석학들이 정확하게 평가했던 대목을 읽으면서는 진리나 진실은 묻힐 수 없다는 천리를 되짚어 생각하게 해주었다. 홍길주(洪吉周, 1786~1841년)의 다산 평이 그랬다.


▲ <삶을 바꾼 만남>(정민 지음,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다산의 박식은 우주를 꿰뚫고, 두루 깨달음은 미세한 부분까지 미치고, 축적된 지식이 드넓고 깊어서 환하게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누군가는 그의 운명이 궁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나는 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시대의 잘못을 한탄함이야 가능한 일이나 다산의 운명은 애초부터 궁하지는 않았다.

하늘이 어떻게 한 사람에게 온갖 복을 다 내려야 주겠는가. 그의 복을 열거하겠다. 첫째 자신의 나이가 75세인데 아직도 건강하고, 부인은 한 살 위인 76세인데 아주 건강하다. 세상에 이런 복이 있으랴. 비록 유배지에서 궁하게 살았지만 늙도록 저술 작업을 멈추지 않아 위로는 하도낙서(河圖洛書)와 상수(象數)의 오묘함에서부터, 구경(九經)·백가(百家), 문자와 명물(名物)의 풀이 및 병농(兵農)·정치 제도·옥사의 처리 제도까지 미쳤다.

이런 저술의 내용대로 정치를 편다면 모두 시국에 보탬이 되고 인민에게 혜택을 줄 수가 있으니 세상에 이런 복이 있으랴. 마지막으로 다산은 아들 둘과 손자 넷을 두었는데 모두 글과 예법에 힘쓰고 문장으로 우뚝 서니, 뒤를 이어 나올 후손들이 더욱 우수하고 장래가 끝이 없을 것이니 어떤 부귀영화가 이런 복을 당할 것인가."


항해 홍길주가 누구인가. 영의정 홍낙성의 손자이자 승지 홍인모의 둘째 아들이다. 형은 여한10대가의 한 사람이자 정승을 지낸 연천 홍석주이고 아우는 정조의 외동 사위던 영명위 홍현주였다. 이들 3형제는 다산의 노년기에 다산의 학문과 문장에 매료되어 자주 찾아가 만나서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했던 당대의 명사들이었다.

홍길주가 평가한 다산의 3대 복은 옳은 판단이다. 75세인 바로 그때 세상을 떠나지만 그 시절로 보면 장수를 누렸음이 분명하다. 그런 긴 삶에서 한시도 게으른 적이 없이 500권이 넘는 저술을 완성하여 세상을 밝힐 길을 열었으니 또 얼마나 큰 영광인가. 더구나 두 아들이 뛰어난 문장에 학문이 깊었고, 손자들도 모두 뛰어나 복경(福慶)이 계속될 수 있었으니 그만한 복이 어디에 또 있겠는가.

이 책은 바로 이런 다산에 대한 평가를 통해 그의 뛰어난 학문 업적을 찬양하고 있다. 홍길주의 예언대로 다산의 손자 정대림(丁大林)은 진사과에 급제하였고 증손자 정문섭(丁文燮)은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에 이르기도 했다. 아들 정학연(丁學淵)도 만년에 벼슬길이 열려 감역(監役)·주부(主簿)에 제수되었다.

다산은 애초에 자신의 둘째형 손암 정약전과 세상에 없는 지기 사이였다. 동급의 개혁 의지, 동급의 학문 수준으로 그렇게 우애가 깊고 다정했던 형제도 없었다. 이 책은 또 다산의 두 아들 정학연과 정학유 역시 돈독한 우애로써 서로의 지기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먼저 떠난 아우 학유의 부음을 들은 황상이 정학연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내오자, 학연이 황상에게 답한 편지가 나왔는데 눈물 없이는 읽을 수가 없는 슬픈 내용이자 명문장임을 보여준다.

손암·다산의 높은 명성에 가려서 세상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들 형제는 동급의 학문과 문장, 우수한 시문으로 당대의 명사들인 추사 김정희, 이재 권돈인, 항해 홍길주·해거재 홍현주 등과 교류하면서 조선 후기 학문과 문학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기에 이르렀다. 세상에 별로 전해지지 않는 정학연의 많은 시와 편지가 공개된 것만으로도 이 책은 좋은 자료를 제공해주고 있다.

끝으로 이 책의 주제는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의 멋진 사제 간의 일화다. 한 번의 만남으로 삶이 바뀌었던 황상의 일생, 일생 동안 스승을 향한 그의 뜨거운 존경심이 사제 간의 정이 피폐해진 오늘, 무서운 경고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또 이 책은 <여유당전서>의 보유(補遺) 편으로 문집에 빠진 새로운 자료를 드러냄으로 다산학 연구의 심화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이라고 평할 수 있다.

다시 한 번 발품을 아끼지 않은 저자의 노고에 큰 찬사를 바치고 싶다. 다만 다산 자신이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나 세상에 알려지기를 꺼려했던 것을 세상에 알려주고 있음과 잊고 싶은 기억까지 다시 생각나게 하는 대목들에 대하여는 검토의 여지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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