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난 토익 950점! 590점과 다를 게 뭐지?"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난 토익 950점! 590점과 다를 게 뭐지?"

[프레시안 books] 심재천의 <나의 토익 만점 수기>

'나는 어학 연수에 실패했다.'

1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사실을 인정할 때면 마음 한구석이 조금 따끔거리는 것을 어쩔 수 없다. 고 1 여름, 10개월간 교환 학생으로 떠난 미국 어느 소도시의 공립학교에서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조용한 시간을 보냈다. 목가적인 전원생활을 향유했다는 게 아니라 그냥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고 10개월을 지냈다는 말이다.

어눌한 영어와 다른 피부색 때문에 뭘 해도 바보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그 때의 나는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것은 침묵이었다. 어학연수를 마치고 내가 얻은 것은, 일취월장한 리스닝 실력과 다소 향상한 독해와 작문 실력 그리고 엄청난 영어 회화 콤플렉스였다.

내 콤플렉스가 차츰 씻겨 내려간 것은, 우습지만 한국에서 필요로 하는 영어 점수에서 내가 썩 괜찮은 성적을 낸다는 것을 알고 난 후였다. 대학수학능력시험, 토익, 토플 같은 것 말이다. 대학 동기보다 훨씬 일찍 '성취'한 토익 950점대 돌파는 재학 기간 내내 나를 도서관에서, 각종 토익 강좌에서 '토익 800점 이상'이라는 졸업 요건에서 자유롭게 했고 선후배와 동기들이 나를 평가하는 데 일종의 가산점 역할도 했다.

그러니까 나는 심재천의 <나의 토익 만점 수기>(웅진지식하우스 펴냄) 주인공처럼 590점이라는 토익 점수 때문에, 채용 공고 지원 자격의 '토익 800점 이상'을 보는 순간 "넌 꺼져"라는 소리를 듣는 것 같은 경험은 없었던 셈이다. 다만 영어 앞에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에서 주인공과 나는 닮아 있다. 아니, 영어 단어를 모르는 TV 프로그램 속 연예인을 보며 무식하다고 비웃는 대한민국의 모두가 그럴 것이다.

▲ <나의 토익 만점 수기>(심재천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웅진지식하우스
<나의 토익 만점 수기>는 주인공이 토익 만점을 꿈꾸며 오스트레일리아로 떠나는 것에서 시작한다. 기묘한 것은 "현지인과 친해져서 영어 실력을 높이고 토익 만점을 달성한다"는 주인공의 집념이 결국 그를 스티브라는 마약 밀매상과 동거하는 상황으로 몰고 갔다는 사실이다. 상식적인 삶을 판단하는 잣대 중 하나인 토익 점수 때문에 바나나 농장에서 마리화나를 재배하고, 매일 아침마다 케첩 통에 빨대를 꽂아 마리화나를 피우며 명상에 빠져드는 호주 남자와의 동거라는 '비상식'을 초래한 것이다.

토익 만점을 향한 결기(정말 결기에 가깝다) 하나로 마약 밀매상의 동양인 인질이자 파트너가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주인공의 행동이 이해가 가고 안쓰럽기까지 한 것은, 우리가 영어 발음을 좋게 하기 위해 혀 절단 수술을 하고 기러기 아빠를 만들어내는 그런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겠지만, <나의 토익 만점 수기>가 궁극적으로 묻고 있는 것은 결국 사회가 믿는 상식과 개인의 믿음에 관한 문제다. 이 사실은 자신이 아폴로 13호의 딸이며 언젠가 우주로 나아갈 것이라고 믿는 스티브의 아내 요코, 그리고 이주일을 닮은 남자를 재림주로 모시는 주인공 아버지의 이야기가 맞물리며 표면으로 드러난다. 기이하고 그래서 때로 소외받을지언정 자신의 믿음을 위해 살 수 있는 사람들, 토익 점수와 명함처럼 '남에게 나를 증명하기 위한 믿음'말고 다른 것을 믿을 수 있는 사람들 말이다.

<나의 토익 만점 수기>로 제3회 중앙장편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심재천은 이 모든 내용을 '토익'이라는 명징한 소재를 주 무기로 삼아 경쾌하고 또렷하게 전달한다. "나는 철저한 서비스 정신으로 <나의 토익 만점 수기>를 써나갔다"는 그의 자신만만함이 얄밉다기보다는 다음 작품에 대한 기대감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 때문이다.

토익 자체가 상징하는 바 만큼이나 토익 안의 세계 역시, 결국은 명확하다. A-B-C로 끝나는 남자와 여자의 대화의 끝에는 정확하게 떨어지는 답이 있기 마련이다. 성우들은 아나운서 같이 명료한 언어를 구사하고, 아무리 지문이 복잡하고 길다한들 패턴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답은 존재한다.

하지만 이 세상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걸, 우리 모두 안다. 작품 초반부 "요즘 토익 만점은 뭐, '나 눈 두 개 달렸소' 하는 것과 같지"라고 말하는 친구의 말은 주인공으로 하여금 오스트레일리아 행을 결심케 하지만 정작 토익 만점의 꿈을 이뤘을 때 주인공은 이미 총기 사고로 한쪽 눈을 잃은 상태다. 세상에는 그 어떤 당연한 일도 존재하지 않고 장담할 수 있는 것은 극히 드물다.

개인을 평가하는 잣대가 갈수록 미시적으로 변하고 있는 지금의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우리 모두는 자신감이 좀 더 필요하다. 그러나 그 자신감의 근원 전부가 토익 점수나 내가 다니는 회사의 사원증 그 자체이긴 아니길 바란다. 그건, 정말, 좀, 너무 슬프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