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시마로부터 불어오는 이 무색무취의 바람이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것은 인간의 오만(hubris)이다. 판도라의 신화처럼, 산업 혁명 이후 우리 지구인들은 스스로의 생명조차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상품화시키는 자본주의의 주술에 갇혀 있다. 루쉰이 생존했다면 아마도 그는 이 후기 근대의 '쇠로된 방' 앞에서 적막했을 것이다.
<후쿠시마에서 부는 바람>(조정환 엮음, 갈무리 펴냄)을 읽으면서 영국 감독 켄 로치의 영화 <보리밭에 부는 바람>을 떠올렸다. 그것은 끔찍한 악몽인데, 제국주의 영국이 어떻게 아일랜드인을 감정 없이 학살했으며, 왜 역사는 파국과 묵시와 흐느낌의 늪으로 빠져들었는지를 강렬하게 환기시켰던 비극이었다.
▲ <후쿠시마에서 부는 바람>(조정환 엮음, 갈무리 펴냄). ⓒ갈무리 |
어찌 보면, 우리는 인류사의 마지막 카산드라인지 모른다. 스스로의 죽음을 예감했던 카산드라가 결국 그 운명의 배역이 아닌 주연으로 자신의 예언을 완성시켰듯이, 만일 후쿠시마의 절규에 감응하고 우리가 지구적 공동 행동에 나서지 않는다면, 그것의 결과는 절규라기보다는 인류의 절멸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고는 한국인들에게 낯선 소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듯한 불감증이 오히려 팽배하고 있다.
후쿠시마 핵 재난은 도래할 지구적 운명의 전조 또는 강력한 암시다. 이 책에 수록된 공저자들의 음성을 듣다 보면, 이미 우리는 '돌진하는 디스토피아'의 명백한 대단원에 근접한 것처럼 보인다. 후쿠시마 이후 피폭되었거나 내부 피폭된 소녀는 사랑과 결혼과 출산의 그 장구한 생애 주기를 단념하고, 끝없는 공포의 노예가 된다.
인류의 명백한 토대라고 할 수 있는 대지의 방사능 오염은 피폭된 소와 농부들을 도쿄로 인도한다. 중세와 포스트모던의 공존은 10년 전 베이징의 풍경이었지만, 근대와 말기 근대의 이 거대한 단절은 일본인뿐만 아니라 사실상 지구인 모두를 묵시 또는 파국의 예감으로 몰고 간다.
후쿠시마는 이 장기 지속되었던 역사적 자본주의와 국민 국가라는 체계가 이제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스스로의 체제를 파괴하는 괴물적 상황으로 전락했음을 보여준다. 생명계의 리셋(reset)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그 불가능한 현실이 지구인들을 포위하고 있다. 이 '끝'의 감각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시작'을 설계할 것이라고 낙관하기는 힘들다. 재난은 일상화되고, 놀랍게도(!) 이것에 대한 감각은 마비된 것이어서, 우리 인류는 명백한 사물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가이아의 편에서 보자면 이것은 '순간'조차도 아닐 것이다. 47억6000만 년 전에 마술처럼 생성된 지구 편에서 보자면, 그것은 20억 년의 침묵을 거뜬하게 인내했던 것이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는 아우슈비츠의 악마적 상상력을 넘어선다. 오늘도 후쿠시마에서 방류되는 오염된 물은 태평양을 접하고 있는 모든 국가들의 해안선을 향해 빠른 속도로 전진하고 있다. 이 전진은 명백한 문명의 역전 또는 파국이어서, 우리는 도리 없이 이 상황을 묵묵히 수용해야 하는가.
이것은 '재난 문명'인가 아니면 인간의 인지 역량을 마비시키는 죽음과의 성숙한 포옹인가. 이 책의 공저자들의 글을 거듭 읽으며, 그래도 희망을 버릴 수 없는 것은, 다행스럽게도 소수이나마 이 자욱한 '어둠 속의 외침'을 민감하게 감각할 수 있는 달팽이관의 평형 능력이 얼마간은 살아있다는 것이다.
물론 한국에도 그런 인류는 있는 것이고, 그래서 녹색당이 출범했거니와 봉화, 영덕, 영양, 울진이 지역구인 탈핵 후보는 더욱 필사적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 책 속의 또 다른 공저자가 지적했듯 아우슈비츠는 '근대의 광기'였지만, 후쿠시마는 '문명의 포학(暴虐)'이다. 한국인들은 의식하지 못했겠지만, 아니 자본과 국가를 틀어쥐고 있는 간상배들은 감정이 마비되었겠지만, 55년 체제가 성립한 이후 침묵했던 일본인들조차 전공투(전학공투회의)의 감각을 다시금 복기하고 있다.
당연히 이 전 지구적 핵 체제 또는 죽음의 정치는 이제 한계에 도달했다. 그런데 한계를 모르는 신흥국 한국은 지구상 거의 유일하게 후쿠시마 이후 핵발전소 건설을 치고 나가고 있다. 한국의 위정자들이 얼마나 이성을 상실했는가는 신학자 김진호의 다음과 같은 지적에서도 잘 알 수 있다.
1986년 체르노빌 사태가 발생했을 때, 한국의 전두환 정권은 미국과 신규 핵발전소 건설 계약을 맺었다. 김진호의 육성을 빌리자면 "이것은 그 해에 있었던 전 세계의 유일한 핵발전소 수주 계약"이었다. 후쿠시마 핵 재난이 발발했던 당시 한국의 대통령은 아랍에미레이트로 날아가 핵발전소 수출 기공식에 참석한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거기서 더 나아가 한국은 주요 대로를 교통 통제하는 무리수를 범하면서까지 이번 달에 '핵 안보 정상 회의'를 유치한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를 패러디하면 "위기는 기회다"라는 이 행태는 그들이 미쳐서가 아닌 핵 마피아의 본성이 제대로 드러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런 떨칠 수 없는 본성은 최근 새누리당의 비례 대표 1번이 현재 한국원자력 연구원이라는 사실에서도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이 어처구니없는 감각의 마비를 지적하는 사람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후쿠시마의 바람은 전 지구적 내부 피폭의 확산을 의미하는 것과 동시에 이 가망 없는 자본주의를 극복할 '혁명의 폭풍'을 예시하고 있다는 것이 조정환의 희망이다. 후쿠시마 이후 일본 지식인들은 특유의 소수자적 센서를 활성화해 '사상으로서의 후쿠시마'를 써내려가고 있다. 그러나 이런 책의 '띠지'조차도 온갖 유해 물질로 오염되어 있는 것을 그들은 알까?
지금은 사상으로서의 3·11이 아닌 행동으로서의 3·11을 요구한다. 반복하건대 후쿠시마는 후쿠시마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로 연결된 가이아의 상실이다. 인류사의 절멸은 인간 자신이 지금부터라도 필사적으로 봉인해야 한다. <후쿠시마에서 부는 바람>은 그런 양가적인 '희망의 원리'를 담은 육성의 매니페스토라고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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