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대 총선(2004년)에서 여성 국회의원 비율이 13퍼센트에 달했을 때 신문에 '우리는 아직도 목마르다'라는 시론을 쓰면서 "여성의 정치 참여는 아직 갈 길이 멀다"고 썼지만, 다른 곳에서는 17대 총선 결과를 놓고 "여성이라고 같은 여성인가" 하는 토론을 하기도 했다. 여성으로서 여성을 대변해야 하고 여성이기 때문에 연대해야 하지만 과연 여성들의 차이는 어떻게 할지에 대한 해답이 정리되지 않았다.
남아있던 이러한 의문이 조앤 스콧의
▲ |
두 번째, 왜 2000년 도입되었을까? 위에서 보듯이 동수법은 1980년대에 나온 개념이고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었던 것은 1995년 베이징 여성 대회에서 채택된 결의안이 받아들여지면서부터다. 그런데 왜 이 동수법이 2000년 프랑스에서 법제화되었을까?
첫 번째 질문은 프랑스와 미국 민주주의의 접근의 차이를 염두에 두면 답할 수 있다. 미국은 민주주의 대표를 다양한 경쟁 집단의 권력 투쟁을 대변하는 이들로 인식한다. 반면에 프랑스는 인종, 민족, 종교, 직업, 사회적 지위 등 집단의 이해관계로는 분리될 수 없는 국민 전체를 대변하는 하나의 전체로서 위임 받은 대표를 상정한다.
그런데 현실의 프랑스에서 국민의 구성원인 개인은 남성을 의미했다. 여성은 그런 국민의 범주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류적 존재로 간주되어 왔다. 그래서 프랑스의 페미니스트들은 이런 개인을 재해석하지 않고는 여성의 지위 향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그 개인을 남성과 여성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재해석했다.
한국에서 여성이 13퍼센트에 이른 17대 총선 이후 많은 언론에서 "여성이 이제 많아졌으니 한국 정치가 바뀌겠죠?" 하는 질문을 받았다. 한 페미니스트는 여성이 많아졌으니 한국 정치는 바뀐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이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많은 이들이 마음속으로 의문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남성 중심 사회에서 국회의원까지 오른 여성들은 분명히 특별한 여성들일 것이다. 그들이 있는 국회는 분명히 달라질 것이다" 하고 생각하면서 애써 불안을 감추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반문했다.
"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당연한 권리에 따라서 참여한 것일 뿐인데 우리에게 사회 변혁이라는 어려운 과제를 지우는가? 왜 남성이 94퍼센트일 때 사회는 부패하고 나빴는가? 거기에 대해서 먼저 답하라."
스콧은 이에 대해서 명쾌하게 대답한다.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보편적 인간은 남성과 여성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그래서 남성과 여성이 같이 하는 것이 정치의 원래 뜻이어서 여성이 정치에 참여해야하는 것이지 여성이 도덕적이어서, 혹은 평화적이어서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아니라고.
그렇다면, 왜 2000년인가? 1990년대 프랑스 사회를 관통하는 중요한 이슈 중 하나는 프랑스에 거주하고 있는 이슬람 인구의 히잡 착용 문제였다. 히잡을 착용했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추방당한 여학생의 문제에서 비롯된 이 문제를 놓고서, 프랑스 사회는 다른 종교에 관용을 해야 한다는 주장과 엄격한 정교 분리의 바탕위에 세워진 프랑스 공립학교에서 종교적 상징을 착용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섰다.
이 와중에서 반이민자 정서를 이용한 극우파는 그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이에 프랑스 사회는 '그럼 누가 국민인가? 프랑스의 전통적인 문화, 프랑스 전통적인 정서에 동화된 사람만 국민인가 아니면 프랑스에서 살고 있는 사람은 국민인가?' 하는 질문을 던졌다. "이질성이 규범이"지만 "갈등은 질서를 유지하는 힘"은 아니었다.
프랑스 사회는 갈등으로 나뉘었고 마침내 2005년 엄청난 시위가 전국적으로 퍼지는 사태를 맞이하게 되었다. 다름을 보편성 안에 받아들여야 하는가? 융합과 동질화만이 최선인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된 것이다. 이에 동수주의자들은 융합과 동질화가 아닌 이질적인 것을 그대로 인식하는 것 그것이 보편이라는 설명으로 동수법을 발전시켰다.
프랑스는 분명히 그곳에 이질적인 이슬람계 프랑스 국적자들이 있지만 그들은 통계적으로 없다. 즉, 통계에서 프랑스 국적자이면 그들이 원래 어디로부터 온 사람들인지 묻지 않는다. 그것이 프랑스식 공화주의다. 다른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같아지지는 않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프랑스 이민자 문제에서 인식하게 되면서 동수주의자들은 동수법 안에 차이의 인정이라는 가치가 녹아 있음을 역설한 것이다.
어지럽고 화가 났던 19대 총선 공천 과정의 한국으로 돌아와 보자. 우리의 할당제는 분명히 프랑스식의 보편주의에 기반하고 있지 않다. 차라리 미국식의 다원주의, 즉 정치가 다양한 집단 간의 권력 투쟁적인 힘의 장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래서 노골적으로 지역적 안배가 거론되었고 암묵적으로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공천 즉 당내 세력 관계의 표상으로 공천이 나타났다.
정당 민주주의를 위한 상향식 공천이라고 하는 경선은 더할 수 없는 권력 투쟁의 적나라한 장이다. 여성이라고 하는 변수는 그 가운데 미미한 아주 희미한 하나의 변수였다. 그것은 차이를 아우르는 보편의 이름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미국식의 권력 투쟁의 장 속에서의 하나의 세력도 되지 못했다.
차라리 냉정한 권력 투쟁 속에 여성이 하나의 힘으로 부딪쳤다 좌절했다면 힘의 미약을 탓할 수 있었겠지만, 순진하게 보편주의를 내세우며 접근하던 여성들은 냉혹한 권력 투쟁 속에서 아무도 우리 편이 아니라는 차가운 현실의 아픔만 체험했다. 이것은 어쩌면 도입 과정 속에서 묻어두었던 근본적인 질문을 방기했던 할당제의 피할 수 없는 결말이다.
며칠 전의 한 토론회에서 '여성이라고 다 여성인가? ○○○과 같은 '반여성적'인 여성과 어떻게 연대하는가?' 하는 논의가 진지하게 개진되었는데, 이 시점에서 우리는 스콧의 논의를 계기로 근본적인 논쟁을 해야 한다. 이제 한국 사회에서도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할당제의 의미, 여성 정치인의 수적 증가의 의미에 대해서 논쟁해야 할 시기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