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날 발행되는 '프레시안 books' 89호는 어린이 책 특집으로 꾸렸습니다. 열두 명의 필자가 어린이 책에 대한 특별한 생각을 마음껏 펼쳤습니다. 여러분 마음속의 어린이 책은 무엇입니까? <편집자> |
<하느님의 눈물>(산하 펴냄)이란 책이 있습니다.
권정생 선생님의 유년 동화집이지요. 어린 친구들이 읽을 수 있도록 짤막하게 쓴 글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글모음집입니다. 열일곱 편의 짧은 동화가 '하느님의 눈물'이란 글을 시작으로 깊은 산속 옹달샘에서 맑은 물이 조금씩 흘러내려 시냇물을 이루듯 흘러나옵니다.
주인공은 토끼, 다람쥐, 까마귀, 굴뚝새, 부엉이, 잠자리, 두꺼비, 가재형제, 아기 병아리, 아기 소나무, 소낙비, 아기늑대, 느티나무입니다. 이름만으로도 정겨운 이들은 선생님의 생각과 마음을 따뜻하게 담아 아이들에게 조곤조곤 말을 건네듯 다가옵니다. 그 목소리에 가만 귀를 기울이면 가슴에 작은 물결이 일어납니다.
선생님 책은 늘 그랬듯이 이야기마다 요즘 아이들에겐 낯선 풀이름과 꽃이름들이 줄줄이 나오고 듣기 힘든 옛말도 가끔 나옵니다. 담고 있는 생각도 '아이들이 과연 이해하며 읽을 수 있을까?' 싶을 만큼 무거운 것들입니다. 아이들에게 조금은 버거울지도 모른다는 것을 선생님도 알고 계셨던 듯 어떤 자리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아무리 아이들한테 읽히는 동화지만 철학은 들어 있어야 하거든요. 그래서 제 동화는 아이들한테 벅찹니다. 주제도 그렇고. 그러나 나중에 자라면서 이해할 거예요."
아이들과 함께 20여 년을 지낸 본 저는, 이제는 선생님 말씀이 옳다는 생각을 합니다. 책을 읽고 난 뒤 무엇을 얼마나 배웠나 그 자리에서 얼른 보고 싶어 하는 어른들이 보기에는 참 답답한 노릇이지만요. 학교에서 교사로 지낼 때 학급 문고를 한 1000권 정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30년 전부터 한 권 한 권 사서 모았는데 그 중에는 한 번 사고 다시는 사지 못한 책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여러 번 산 책도 제법 있었는데 이 <하느님의 눈물>은 열 번 이상 샀던 책입니다. 아이들이 좋아해서 자주 꺼내보고 빌려가는 통에 비닐 표지까지 금방 너덜너덜해졌으니까요. 물론 이보다 더 많이, 수백 권 산 책은 선생님의 <사과나무밭 달님>(권정생 지음, 정승희 그림, 창비 펴냄)이었지요. 주로 고학년 아이들과 지낸 시간이 길어서 그랬겠지요.
책의 제목이 된 '하느님의 눈물'이란 작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눈이 노랗고 털빛도 노란, 돌이 토끼는 산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돌이 토끼는 산토끼인 셈이죠. 어느 날 돌이 토끼는, 문득 생각했습니다. 칡넝쿨이랑 과남풀이랑 뜯어 먹으면 맛있지만 참말 마음이 아프구나. 뜯어 먹히는 건 모두 없어지고 마니까.
그래도 배가 고픈 돌이토끼는 조심조심 풀무꽃풀에게 다가가 널 먹어도 되느냐고 묻습니다. 그 말을 들은 풀무꽃풀은 바들바들 떨면서 먹으려면 차라리 묻지 말고 그냥 먹으라고 하지요. 먹힌다는 것, 죽는다는 것은 모두 운명이고 마땅한 일이지만 돌이토끼는 차마 먹지 못하고 돌아서고 맙니다. 그렇게 댕댕이 덩굴, 갈매덩굴도 못 먹고 바디취, 고수대 나물, 수리취 나물도 먹지 못하고 그만 저녁때가 되었습니다.
해님이 서산 너머로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너무 배가 고픈 돌이토끼는 해님에게 하루 동안 겪은 이야기를 들려주며 누군가를 먹고살아야 하는 것이 이렇게 괴로우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말하며 울어버리고 덩달아 울고 싶어진 해님은 얼굴이 새빨개진 채 아무 말도 못하고 서산 너머로 넘어갔습니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홀로 밤을 맞은 돌이토끼는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하느님께 묻습니다.
"하느님, 하느님은 무얼 먹고 사셔요?"
어두운 하늘에서 부드러운 음성이 들렸습니다.
"보리수나무 이슬하고 바람 한 줌, 그리고 아침 햇빛 조금 마시고 살지."
"어머나! 그럼 하느님, 저도 하느님처럼 보리수나무 이슬이랑, 바람 한 줌, 그리고 아침 햇빛을 먹고 살아가게 해 주셔요."
"그래, 그렇게 해주지. 하지만, 아직은 안 된단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너처럼 남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세상이 오면, 금방 그렇게 될 수 있단다."
"이 세상 사람들 모두 가요?"
"그래, 이 세상 사람 모두가."
하느님이 힘주어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다시 말했습니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애타게 기다리는데도 사람들은 기를 써 가면서 남을 해치고 있구나."
돌이 토끼 얼굴에 물 한 방울이 떨어져 내렸습니다. 하느님이 흘린 눈물이었습니다.
▲ <하느님의 눈물>(권정생 지음, 산하 펴냄). ⓒ산하 |
책 속에서 선생님은 가까이 있는 사람들부터 서로 돕고 사랑하며 살고, 제일 착하게 말고 보통으로 착하게 살라고 하십니다. 진짜 훌륭하고 아름다운 모습은 자기 모습 그대로 사는 것이라 하시고, 또 살아있는 생명은 무엇이라도 소중히 여기라 하시지요, 우리는 통일이 되어야 온전한 생각을 가질 수 있다는 거, 온전히 살 수 있다는 말씀도 하십니다. 아이들에게 읽어주며 사실은 제 마음에 꼭꼭 새긴 말씀들이었습니다. 이번에 이 글을 쓰며 다시 읽어도 산버들나무 밑 가재형제는 또 절 울리고 마네요. 읽어주며 아이들과 함께 울었던 기억이 어제 일 같습니다. 선생님 책을 읽으며 저는 슬픈 이야기가 정말은 아름다운 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권정생 선생님 돌아가신 지가 벌써 5년이 되었다고 합니다. 선생님 책이라면 다 읽고 아주 좋아했지만 저는 선생님 살아계실 때 한 번도 직접 뵙지를 못했습니다. '오물덩이처럼 뒹굴면서'를 읽고는 차마 찾아갈 마음을 낼 수가 없었어요. 그저 한 하늘 아래 같이 살고 있는 것만도 고맙다고 생각했습니다.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도 거창 샛별학교 주중식 선생님이 전화로 알려주셔서 알았습니다. 그 때서야 먼발치에서라도 한 번 뵐 것을, 하며 얼마나 후회를 했는지 모릅니다. 주 선생님은 동화책을 통해 막연히 알고 있던 권정생 선생님을 마치 잘 아는 이웃처럼 가깝게 느끼도록 해주신 분입니다. 주 선생님은 부인과 함께 선생님을 뵈러 갈 때 언제나 미리 말씀드리지 않고 간다 하셨습니다. 몹시 편찮으시면 살짝 되돌아 나올 생각으로 가지만 갈 때마다 반갑게 맞아주시고 좋은 이야기를 재미나게 해주셔서 내내 웃다가 온다고 하셨어요.
평생 아프고, 외롭고, 춥고, 배고프게 사시면서도 늘 웃음을 잃지 않으셨다는 말씀 전해 들으며 '그래도 다행이다' 했는데 정말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제게는 사진 속의 모습으로만 떠오르는 선생님이 조금은 아쉽습니다. 그래도 말씀은 날이 갈수록 제 마음속에서 더 또렷해져 옵니다.
"교육은 가르치는 것보다 보여주는 것"이라던 선생님 말씀이 오늘처럼 절실할 때가 있었을까요. "평화보다 더 소중한 건 이웃사랑"이란 말씀도 새록새록 새로워지는 요즘입니다. 인간을 사랑함이 곧 하느님을 사랑함이며 인간을 사랑하는 길은 이웃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살도록 하는 길이라고도 했습니다. 상이란 받는 사람도 주는 사람도 이롭지 못한 것이니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성취한 노력의 대가로 만족해야지 다른 누구한테 평가받는 것은 부당하다 하셨는데 "경쟁력이 최고의 가치"인 오늘 우리에게 그건 너무 이상적인 생각일까요?
오늘 문득, 우리 모두의 가슴 가슴에 하느님의 눈물 한 방울 떨어지는 상상을 해봅니다.
'프레시안 books'의 책 소개 제안으로 이번에 다시 선생님의 책들을 모두 읽었습니다. 마음이 참 좋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인간성에 대한 반성문 (1)
주중식한테서 소포 하나가 왔다.
끌러보니 조그만 종이상자에 과자가 들었다.
가게에서 파는 과자가 아니고 집에서 만든 것 같다.
소포에다 폭탄도 넣어 보냈다는데……
잠깐 동안 주중식과 나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생각했다.
10년이 넘도록 알고 지냈지만 원한 살 일은 없는 것 같다.
과자 부스러기를 하나 혀끝에 대어보니 아무렇지 않다.
좀 더 큰 것을 집어 먹어봐도 괜찮다.
한 개를 다 먹고 다섯 시간 지나도 안 죽는다.
겨우 마음이 놓인다.
주중식과 나 사이는 아무런 문제없이 돈독함이 확인되었다.
인간성에 대한 반성문 (2)
도모꼬는 아홉 살
나는 여덟 살
2학년인 도모꼬가
1학년인 나한테
숙제를 해달라고 자주 찾아왔다.
어느 날, 윗집 할머니가 웃으시면서
도모꼬는 나중에 정생이한테
시집가면 되겠네
했다.
앞집 옆집 이웃 아주머니들이 모두 쳐다보는 데서
도모꼬가 말했다.
정생이는 얼굴이 못생겨 싫어요!
50년이 지난 지금도
도모꼬 생각만 나면
이가 갈린다.
정축년 어느 날 일기
그 집엔
10년이 넘은 늙은 개 한 마리와
늙은 인간 하나가 살고 있었다.
늙은 개는 늙은 인간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는
감시자가 되어 있었다.
늙은 인간은 오래 전부터
어디가 탈이 나서 그런지
자주 몸에 열이 나서 눕는 날이 많다.
늙은 개가 쯧쯧 혀를 차면서
―이 인간아
전생에 무슨 못할 짓을 했기에
날이면 날마다 아파쌓는거야?
자존심 상한 늙은 인간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어디 아파서 열이 나는 줄 아냐?
이 똥개야!
이래 봬도
평생 정의에 불타는 가슴으로 살다보니 그런 거다!
늙은 개가 또 혀를 차면서
―저 인간이 이젠 머리까지 돌았군
한다.
(<사람의 문학>, 1997년 가을호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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