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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그거 조폭과 다를 게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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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그거 조폭과 다를 게 뭐야?!

[프레시안 books] 성석제의 <위풍당당>

9년 만의 장편 소설이다. 오래간만이다. 이렇게 무릎을 대고 바투 앉아 정색하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성석제의 목소리를 들어본 것도.

그런데 실제로 오래간만이라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는다. 그간에도 우리는 다양한 주제의 산문집이나 단편들을 통해서 더할 나위 없이 '인간적'인 그의 시시콜콜한 면모들을 빠짐없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가 낯설지 않은 진정한 이유는, 항상 귓가에 맴도는 엄마의 잔소리가 그렇듯이, 우리의 사소한 일상들과 떼려야 뗄 수 없을 정도로 진득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석제의 소설은 엄마의 잔소리, 그러니까 흔하디 흔한 일상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축적된 생활의 지혜가 세대를 거치며 닳고 닳아가면서 결국 도달하게 된 보편적 가치와 닮아 있다. 그 속에서는 남의 약점이나 실수에 대한 비난조차 자연스럽게 둥글어지는데 성석제의 주요한 소설적 특성인 해학적 면모 역시 이와 관련이 있다.

▲ <위풍당당>(성석제 지음,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실제 <위풍당당>(문학동네 펴냄)에서 이야기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는 '조폭'들의 등장은 소설에 긴장감을 부여하기보다 점차 그들의 대척점에 위치하는 '일반인'들의 수준으로 끌어내려지면서 막을 내린다. 이는 현재 소설을 읽고 있는 독자들을 포함하여 소설 속의 각기 다른 등장인물들을 모두 같은 위치로 만들고 결국 한바탕 웃음의 난장으로 이끄는 해학적 구조를 보여준다.

성석제의 소설을 접해본 독자들이라면 이것은 그리 낯설지 않은, 당연한 소리이다. 일상 속의 달인들을 소개하는 한 TV 프로그램에서 자신의 기술에 대한 비결을 묻는 질문에 그저 오래하니 이렇게 되었다는 답을 듣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결국에는 그 뻔한 대답들 사이로 보이는 '달인'들의 기술을 감탄하며 쳐다보게 만들듯이, <위풍당당>은 다시 한 번 우리를 작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만든다. 그것은 자신의 개성조차 닳아 없어질 정도로 강요받는 지루한 일상의 억압을 뚫고 마침내 발현된 개성을 유지하면서도 그 차이 그대로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움 때문이다.

여기 한 가족이 있다. 기존에 해 오던 일은 사양길에 접어들어 수입은 점차 줄어드는데 그나마 경쟁 업체는 자꾸 늘어나기만 하고, 경기가 나빠지면서 새롭게 벌이는 일들에서도 고정 수입을 기대하기는 힘들어 차라리 모든 것을 그만두고 해외여행이나 가고 싶기도 하지만 "애들 눈 때문에 참고 또 참고 있"(84쪽)는 희생적인 가장도 있다. 이 가장은 가족 간에 대화가 부재하는 현실을 지적하면서 '아빠, 큰아버지, 존경하고 싶은 선생님, 할아버지' 등의 역할을 자처하기도 한다. 가족 관계의 올바른 정립을 위해 가훈도 만든다.

하나, 자식들은 부모가정을 지키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 둘, 첫 번째 원칙을 위배하지 않으면서 부모에게는 무조건 복종한다. 셋, 첫 번째 두 번째 원칙을 지키는 범위 안에서 자신을 보호한다. (113쪽. 밑줄 친 단어는 인용자가 변형)

여기 또 하나의 가족이 있다. 서로를 가족 간의 호칭으로 부르지도, 가족으로서의 의무를 강제하지도 않으면서 그저 같이 살아간다. 사실, 가족이라는 단어조차 맞지 않는다. 이들은 서로 간에도 말하지 않는 저마다의 사연들로 인해서 위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진짜 가족에서 자의로 또는 타의로 내쳐져 우연히 만난 가짜 가족들이기 때문이다. 사극 세트로 지어졌으나 지금은 버려져 그들이 정착해서 살고 있는, 겉으로만 멀쩡한 가짜 마을의 모습과 똑같이 말이다.

그런데, 이 '진짜 가족'과 '가짜 가족'의 만남과 충돌은 일대 혼란을 일으킨다. 이 혼란에 대해 언급하기 이전에 숨겨온 사실을 먼저 말해야겠다.

전자에서 언급한 '가족'은 '정묵'이 이끄는 조직 폭력배이며, 가장의 고민은 조직 폭력배의 우두머리인 '정묵'이 조직을 이끌어가기 위해 하는 고민이다. 아시모프의 로봇 원칙을 연상시키는 위의 '가훈'도 사실은 줄쳐진 단어들을 순서대로 '후배, 선배, 조직, 선배'에서 바꾸어 인용한 조직의 강령이라고 말하면 보다 쉽게 이 '가족'의 실제 정체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의 가족을 사회와 국가가 가지고 있는 온갖 모순의 축소판으로 본 마르크스의 말을 상기해보면 도리라는 명분 아래 규율과 감시 그리고 무조건적인 희생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가족은 우리가 종종 손가락질 하는 조폭들의 위계질서와도 꼭 닮아 있는 사회적 질서와 상동관계이다.

결국 두 가족의 만남에서 오는 혼란은 조폭이 일반인을, 규율이 혼란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는 일반적인 믿음에 대한 혼란이다. 실제로 조직 폭력배들은 난관에 봉착할 때마다 강한 규율과 위계질서를 내세우지만 그것은 그들이 맞닥뜨린 문제들을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라, 규율이 통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하는 새로운 문제들을 끝없이 만나게 한다.

그와 반면에 어떤 규율도, 호칭도 존재하지 않으며 그저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모든 일이 불법"(14쪽)이어도 할 수 있는 자유대로 행동하는 이 가짜 가족은 처음으로 맞닥뜨린 혼란을 자신들 특유의 공간으로 끌어안는 유연성을 보인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춤판의 형세를 바꾸기도 했다. 여산이 추는 춤을 이령이 따라 하고 소희가 춤을 추는 행로를 영필이 따라갔다. 눈 감고 춤추는 새미 앞에서 용석이 가면 쓴 사람 흉내를 내며 춤을 추고 용석을 감시하기 위해 준호가 끼어들었다. 서로가 사슬이 되어 춤판이 돌아갔다. (148쪽)

조폭들과의 일차 충돌 이후 또 다른 공격을 앞둔 상황에서 벌어지는 이 춤판의 장면은 이 소설의 가장 핵심적인 장면이자, 위에서 지적한 가짜 가족의 특질을 잘 보여준다. 이유도 없이, 스스로를 잊을 정도로 미친 듯이 노래하고 춤을 추는 것이 가능한 이 공간은 의미나 맥락을 따라 확산되는 논리적 인식과 상관없이 현현(épiphanie)하는 타자를 만날 수 있는 레비나스적 공간과 닮아 있다. 이질적인 요소들을 받아들여 스스로를 재구성하는 가능성으로 삼는 한편, 안과 밖의 경계를 끊임없이 지워나가면서 타자를 통한 윤리적 호소와 요청이 지속적으로 가능한 공동체로서의 공간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공간이 매력적인 이유는 "할머니, 저 배고파요. 라면 먹고 싶어요"(229쪽)라는 소설의 마지막 대사 그대로, '배가 고플 때라면 먹기를 자유롭게 요청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소설을 앞에 두고 재미없는 말을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것은 배고파도 라면을 먹지 못하는 것만큼 딱한 일이다. 오랜만에 만난 성석제의 장편 <위풍당당>은 재미있다. 읽다가 배가 고파져도 라면 먹는 것을 잠시 미뤄둘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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