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교롭게도 지금 이 서평을 쓰기 시작하는 7월 1일은, '아나키즘의 아버지'라 불리는 러시아 출신의 혁명가 미하일 바쿠닌이 1876년 스위스 베른에서 사망한 날이다. '20세기의 위대한 역사가'이자 전기 작가인 에드워드 카는 평전<미하일 바쿠닌>(이태규 옮김, 이매진 펴냄)의 마지막 대목, 즉 바쿠닌이 "세상과 자신을 이어주던 끈을 놓"기 직전의 장면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바쿠닌은) 회고록을 읽으려는 사람들을 위해 회고록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모든 민족은 혁명의 본능을 잃어버렸다. 순종적이고 무기력해지다 보니 자신들이 가진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바쿠닌은 병마를 털고 일어설 수만 있다면 집단의 원리를 토대로 한 윤리학에 관한 논문을 쓸 생각이었다."(674쪽)
그러나 바쿠닌은 윤리학 논문 집필에 손도 대지 못했다. 평생 수많은 집필 계획을 세워놓고도 번번이 '혁명의 불꽃'을 좇아 전 유럽을 누비느라, 자신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여력이 없었던 것처럼. 아니 '망명'이 그의 유일한 직업이었던 혁명가 바쿠닌은 어쩌면 '사상의 체계화'라는 것 자체를 그렇게 완벽히 거부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평생 "이론이 아니라 생명의 자발성"을, 그리고 "우발적인 외부 세계에 반응하는 인간의 능동성"을 믿으며 살고 투쟁했다.
아나키즘에 대해, 아니 19세기 이후 유럽과 러시아의 역사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바쿠닌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지 않았을 리가 없다. 카의 말대로 "미하일 바쿠닌과 칼 마르크스는 자신만의 명성과 교의를 지니고 19세기 후반의 혁명 운동을 주도한 주역"이었으며, "바쿠닌만큼 한 개인의 인생과 사상이 세계에 강력한 영향을 끼친 사람도 드물"다.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 등과 함께 아나키즘의 창시자 중 한 사람으로서 수많은 문헌에 등장하는 바쿠닌의 이름을 한 번이라도 들어 보았던 사람들에게, 특히 제1차 인터내셔널에서 마르크스와 쌍벽을 이루는 지도자로 활동하다 결국 주도권 다툼에서 패하고 1872년 '제명'되기까지 했다는 드라마틱한 역사를 잠깐이라도 들어 본 사람들에게, 그의 생애를 다룬 평전은 더할 나위 없이 호기심을 자극하는 책이다.
카와는 숙적 관계이던 이사야 벌린이 "전기의 모범이자 최고의 기본 사료를 바탕으로 훌륭하게 쓰인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평전"이라고 찬사를 보낼 만큼 "전기 문학의 백미로 손꼽힌다"는 출판사 서평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과연 에드워드 카"라고 감탄할 만큼, 한 인간의 생애를 치밀하게 복원해 놓았을 뿐만 아니라 19세기 유럽의 역사, 특히 사상사로서 이 책이 지니는 가치는 높다.
패배한 혁명가
▲ <미하일 바쿠닌>(에드워드 카 지음, 이태규 옮김, 이매진 펴냄). ⓒ이매진 |
물론 카가 바쿠닌을 악의적으로만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웃사이더의 정서를 공유하는 공감의 변호론이 짙게 깔려" 있다고 출판사 서평도 적고 있지만, 국내외의 많은 아나키즘 연구자들이 바쿠닌의 생애와 사상에 대해 논할 때마다 이 작품을 수시로 인용한다. 이 책 전체에는 학술적으로 중요한 자료들(바쿠닌의 글과 발언들)이 방대하게 포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바쿠닌의 생애와 사상에 카 자신이 '공감'하고 '변호'하는 평가들도 수시로 등장한다.
그럼에도 카가 바쿠닌에 대해 전반적으로 취하고 있는 관점이 비판적이며, 그 태도는 냉소적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러한 관점과 태도는 독자를 상당히 불편하게 만든다. 바쿠닌이나 아나키즘에 우호적인 입장을 가진 사람들만 느끼는 지점은 아닐 것이다. 문제는 오히려 "왜 카는 이토록 방대한 자료들을 수집하고 추적해가며, 굳이 이렇게 비판적이고 냉소적인 평전을 집필하려고 했을까?"하는 '동기'에 대한 의문이 책을 읽는 내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단지 바쿠닌이나 아나키즘을 깎아내리기 위해서?
더구나 이 책은 1937년 영국에서 출판되었다. 1937년이라면 스페인 내전이 한창이던 시기이다. 바로 이듬해에 출판된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정영목 옮김, 민음사 펴냄) 같은 작품들 덕분에 일반 독자들도 어느 정도 알고 있겠지만, 이 무렵 스페인의 노동자와 농민 운동에서 아나키즘의 영향력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특히 '스페인 내전의 신화적인 인물'인 아나키스트 혁명가 두루티의 생애를 다룬 엔첸스베르거의 독특하면서도 탁월한 작품 <어느 무정부주의자의 죽음>(변상출 옮김, 실천문학사 펴냄)의 다음 대목은 기억할 만하다.
"스페인 노동자 운동은 1870년에 열린 제1차 회의에서 이미 바쿠닌을 지지하고 마르크스를 반대했다. 2년 뒤, 코르도바의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석한 무정부주의자연합 회원의 수는 4만 5000명에 달했다. 안달루시아 전 지역으로 확산된 1873년의 농민봉기는 이미 무정부주의의 지도를 확실하게 받고 있었다. 스페인은 세계에서 바쿠닌의 혁명이론이 현실적 세력을 획득한 유일한 나라였다. 무정부주의자들은 1936년까지 스페인 노동자 운동 내에서 지도적 역할을 확보하였다. 그들은 숫자 면에서만 다수를 확보한 것이 아니라 전투력도 가장 막강했다."(57쪽)
스페인의 노동자·농민 운동의 힘을 바탕으로 수립된 '공화국'과 프랑코의 '반란군' 사이에 벌어진 내전이 전 유럽을 흔들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와 독일의 전체주의가 위협적인 존재로 떠오르고 있던 20세기의 격동기에, 왜 영국의 외교관이자 역사가였던 카는 19세기의 '패배한 혁명가' 바쿠닌을 엄청난 자료더미 속에서 다시 불러내었던 것일까?
바쿠닌에게 찬물 뿌리기?
<역사란 무엇인가>(김택현 옮김, 까치글방 펴냄)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카의 생애와 사상, 학문적·정치적 입장 등은 그의 제자 조너선 해슬럼이 쓴
1911년 케임브리지 대학 트리니티 칼리지에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하여 역사학을 공부한 카는 20세기 초반, 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을 겪은 격변기에 영국 외무부의 외교관으로 사회 생활을 시작하였다. 1918년 4월 이후, 러시아어에 능통하지 못했음에도 "확실히 러시아 전문가로 평가받"을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그리고 소비에트 혁명은 "도전을 이겨내고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1920년대 중반에 경제는 전쟁 이전의 생산수준을 회복하였고 모스크바는 간섭 전쟁 이후 놓여 있던 외교적 고립 상태에서 벗어났다."
1925년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에 외교관으로 부임한 카는 본격적으로 러시아어를 배우고 톨스토이, 투르게네프, 푸시킨 등 러시아 작가들의 작품에 빠져들었다. 영국과 소련의 관계는 위기를 향해 치닫고 있었지만, 카는 러시아가 주는 매력에 젖어들었다.
물론 이 무렵 카는 볼셰비키에 대해 전적으로 동조하지 않았고 '지지'와 '반대'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려고 애썼지만, 그들에 대해 "지나치게 두려움을 갖는 것은 다소 어리석은 태도라고 생각"했다. 그가 모스크바를 직접 방문하고 한 달 뒤, 영국은 모스크바와 외교관계를 단절하게 된다. 이 무렵 카는 이렇게 말했다.
"러시아가 전혀 달랐다는 점이 러시아가 나에게 준 매력이었다. 그들은 내가 성장해 온 전통적인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사고했다. 그들의 세계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와 정말 달랐다."
이러한 러시아에 대한 관심 때문에 카는 <도스또예프스끼 평전>(권영빈·김병익 옮김, 열린책들 펴냄)을 쓰게 된다. "카의 표현에 따르면, 도스토예프스끼가 준 가장 큰 충격은 그가 17세기와 18세기로부터 물려받은 '합리주의의 예견된 해악'을 근본적이고도 강력하게 거부한 점에 있다." 이 책의 집필은 "카를 성장 환경이 가져다 준 한계로부터 해방"시켰고, 결과적으로 카는 자신에게 숨겨져 있던 "저항의 정신"을 발견하는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이어서 카는 러시아의 혁명적 지식인 알렉산드르 게르첸의 전기 <낭만의 망명객들(The Romantic Exiles)>과 <미하일 바쿠닌>을 잇달아 집필한다. 그는 이 전기들을 통해 "등장인물과 그들의 결점, 동기, 정열에 대해 주체할 수 없는 애정을 드러냈다." 이러한 작품을 쓸 때 카는 자신의 내부에 숨겨져 있던 낭만주의가 해방되는 것을 느꼈다.
<낭만의 망명객들> 서문에서 카는 바쿠닌을 "혁명적 아나키즘에 사로잡힌 놀랄 만한 광신자, 인간 이하이기도 하면서 초인이기도 한 인물"이라고 언급한다. 칼 마르크스의 전기까지 모두 네 권의 전기를 집필했지만, 그 가운데 세 권이 러시아인이라는 사실은 카가 얼마나 러시아적 '낭만'과 '열정'에 심취했는지를 잘 말해 준다. "모든 전기 작가들은 아무리 주도면밀하게 자신을 지우려고 해도, 자신이 집필하는 전기의 주인공한테 스스로를 투영하게 마련"이라고 카 자신이 쓰고 있듯이, 이들 전기의 주인공들에게 카는 자기 내부의 '낭만'과 '저항'을 투사함으로써, '모범생'으로 살아온 자신의 학창시절과 외교관의 무미건조한 삶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바쿠닌을 비롯한 전기의 주인공들을 다루면서 그들의 '정치'나 '철학'보다는 '사람 그 자체', 또는 그들의 '개성'과 '기질'에 주로 사로잡혔다. 또 러시아라는 이국(異國)의 망명객들에게서 느껴지는 '낭만적 요소'에 심취하였다. 이 때문에 특히 <미하일 바쿠닌>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엇갈렸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사야 벌린은 찬사를 표하면서도 이 책이 "(바쿠닌의) 이념적인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했다. "바쿠닌의 영향은 비록 그 개성이 강렬하긴 했지만 개성이라는 차원으로 축소될 수 없다"는 게 벌린의 생각이었다. "결국 이러한 접근은 바쿠닌한테서 역사적 인물로서의 위대함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미국의 역사학자 에드먼드 윌슨은 <미하일 바쿠닌>에 대한 서평의 제목을 '바쿠닌한테 찬물 뿌리기'라고 붙일 만큼 적대적이었다. 그는 "카가 바쿠닌에게 관심을 가질 만한 분명한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도 결함 가운데 하나"라고 지적했다. 이처럼 <미하일 바쿠닌>은 이미 출간 당시부터 "책을 쓴 동기"가 의아스러운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카의 역사관
그런데 이것은 카가 전기에서 다룬 러시아인들과는 화해하기 어려운 믿음이었다. 카는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로 불린 적이 없"지만, "이제 우리는 모두 마르크스주의자라는 점이 어느 정도 현실화됐다. 누구를 막론하고 경제적 현실이라는 토대에 바탕을 두고 정치사를 설명하려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고 주장한 바 있다.
특히 카는 1차 세계대전 이후(특히 1930년대) 영국을 비롯한 서유럽이 빠져있던 무기력증과 허무주의적 분위기를 '질병'으로 비판하면서, "진보의 정신이 충만한 스탈린의 러시아와 대비시키며 안타까워했다." 이러한 태도는 독일을 평가하면서 "히틀러가 독일을 다시 궤도 위에 올려놓았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이 무렵 그에게 "그 궤도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는 어쨌든 비판적 검토 대상이 아니었다." 카가 보기에 스탈린이나 히틀러는 모두 국민들의 열의와 자발성을 최대한 끌어내어 진흙탕에 빠져 있던 국가의 경제를 발전시킴으로써 역사를 진보시키는 데 기여한 "위대한 업적"을 이룬 것이다.
이러한 카의 생각은 평생 동안 이어진다. 1967년 발표한 논문 '역사의 전환점 : 마르크스, 레닌, 스탈린'에서 카는 "러시아 혁명의 업적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점은 소비에트의 공업화 전략이 성공했다는 점이다. 이런 성공을 통해 소비에트 러시아는 미개한 농촌 사회에서 세계에서 둘째가는 공업국가의 위치뿐 아니라, 일부 선진적인 기술 부문을 이끌어 가는 지위로까지 성장하였다"고 평가하였다. (혹시 핵무기도 '선진적인 기술 부문'에 포함되는 것일까?)
물론 카는 이 과정에서 스탈린의 독재정치에 의해 "러시아인들이 겪은 공포와 고통을 최소화하거나 용인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면서도, "역사 과정에 대한 대차대조표를 적용하는 방식을 지지"했다. 한마디로 실(失)보다는 득(得)이 더 크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는 '역사적 실용주의'이다.
카가 1982년에 세상을 떠나지 않고 이후의 역사, 즉 소련의 해체와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까지 지켜보았다면(그의 사후 불과 4년 뒤에 일어난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도 포함해야겠다), 그것을 어떻게 평가했을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는 말년에 이르기까지 "(소비에트 체제의) 어두운 면에 대해서는 사고할 필요가 없"으며, 인민들의 고통은 "자연적 질서의 필연적 일부이고 진보의 비용"이라고 보는 입장에는 변함이 없었다.
"히틀러가 대공황으로부터 독일을 벗어나게 하고 독일의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시킴으로써 무언가를 이루었다는 생각" 역시 카에게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조너선 해슬럼은 날카롭게도 "카는 역사에 대한 다윈주의 견해를 받아들였"으며, 그의 '진보' 개념은 "마르크스에 가까운 개념"으로서 "카가 역사 과정에서 개념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농민은 무식하고 미개한 집단?
다시 <미하일 바쿠닌>으로 돌아가 보자. "1848년 혁명의 충격과 실망에 젖어 있던" 바쿠닌이 <슬라브 민족에게 보내는 호소>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밝히던 무렵이다.
"첫째, 바쿠닌은 부르주아지가 명확하게 반혁명적 세력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과 미래의 혁명을 향한 희망은 노동계급에 달려 있다는 점을 믿었다. 둘째, 혁명의 전제조건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해체와 중부 유럽과 동유럽에서 자유 슬라브 공화국 연방을 건설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셋째, 최후에는 농민, 특히 러시아 농민이 혁명을 성공시키는 데 결정적인 세력이라는 사실이 입증될 것이라고 믿었다. 이 세 가지 개념은 이 무렵 바쿠닌이 하고 있는 모든 행동의 기초였다."(246쪽)
그러나 카가 보기에 농민에 대한 바쿠닌의 생각은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진보에 대한 믿음'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었다. 1966년에 동료 데이비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카는 데이비스가 "네프(소비에트의 신경제정책)의 방탕아이자 경제개발 계획의 문제아로서 농민"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마르크스가 농민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혁명 후 소련과 마르크스를 혐오하는: 인용자) 서유럽에서 농민은 신성시되었고 언제나 옳았을 것"이라고 비꼬기도 한다.
또 리투아니아 출신으로서 소련의 박해를 피해 파리에 망명해 있던 학자 레윈이 러시아 혁명 후 농민의 문제를 다룬 논문 '농민과 소비에트 권력'에서 농민을 너무 관대하게 다루었다고 가혹하게 비판하면서, "농민은 원시적이고 사악하며, 무식하고 미개한 집단입니다. (역사상 그들을 다른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농민을 교육하고 농업을 기계화하고 근대화하고 조직한다는 사회주의 체제의 최초 계획은 완전히 합리적이었고 계몽적이었습니다"라고 편지에 쓰기도 했다. 이것은 마르크스주의의 농민관과 근본적으로 일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길게 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진보주의'는 아나키즘과는 결코 양립하기 어려운 것이다. 엔첸스베르거의 <어느 무정부주의자의 죽음>에 인용된 아나키스트들의 입장은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스페인 무정부주의는 자본주의의 발전에 대한 깊은 저항의 표현이다. 이 저항은 주로 유럽의 산업국가에서 이해했던 물질적 진보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또한 역사 발전의 마르크스주의적 도식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다. 이 도식에 의하면 부르주아지가 일시적 혁명세력으로, 생산력의 자본주의적 발전은 산업화의 불가피한 현상인 규격화와 축적의 필연적 단계로 나타난다. 따라서 스페인의 무정부주의적 노동자들과 농민들은 이러한 '진보'를 폭력의 요소를 지닌 진보로 이해하고 거부한다. 그들은 영국과 독일, 프랑스 프롤레타리아트의 업적과 성과에 대해 감탄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들의 노선을 따르는 것을 거절한다. 그들은 이들의 상품물신주의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발전의 합목적성도 내면화시키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비인간적으로 보이는 하나의 체제에 대하여, 그리고 이 체제가 낳는 소외에 대하여 필사적으로 저항한다. 그들은 동시대 서유럽 동지들이 가질 수 없었던 그런 증오심을 갖고 자본주의를 증오한다."(68쪽)
혁명의 임신 기간은?
역사란 무엇인가. 카에게 역사의 발전은 단선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바쿠닌은 늘 성급하게 일했다. 언제나 혁명이 임박했다고 생각했으며, '임신 3개월을 9개월로 착각했다.' 인내심을 가지라고 조언하던 오가료프는 또 다른 직유형 표현을 사용해서 바쿠닌을 묘사했다. 혁명과 사랑에 빠진 바쿠닌은 마치 아직 미숙한 어린 소녀가 사랑에 빠진 것 같다고 했다."(380쪽)
인간의 임신 기간은 10개월이다. 그렇다면 '혁명의 임신 기간'은 몇 개월인가. 그것은 도대체 누가 정해 놓은 것인가. 그리고 과학은 '혁명의 정상적인 분만 시기'를 확정할 만큼 '진보'했는가. "모든 민족은 혁명의 본능을 잃어버렸다. 순종적이고 무기력해지다 보니 자신들이 가진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겁을 집어먹고 있"다는 바쿠닌의 말은 그가 생애를 마감한 19세기 후반 유럽의 상황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21세기, 전 지구적인 야만의 전체주의와 물신주의 앞에서 "순종적이고 무기력해"진 우리 모두에게 부족한 것은 20세기의 '과학' 또는 '역사 발전의 도식'이 아니라, 바쿠닌이 빠져들었던 '사랑'과 '혁명의 본능'이 아닐까. 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합리적인 '표 계산'이 아니라, 바쿠닌이 말한 '파괴를 향한 열정'(곧 '창조적인 열정')이 아닐까. 그리고 바쿠닌의 다음과 같은 호소는 과연 '과거의 유물'에 불과한 것일까.
"우리와 함께 자유, 정의, 평화를 수립하기를 바라는 사람, 인간성의 승리와 인민의 완전한 해방을 바라는 사람은 우리와 함께 모든 국가를 파괴하고, 모든 나라의 자유로운 생산자 연합이라는 세계 연방을 국가의 폐허 위에서 수립하기를 소망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미하일 바쿠닌>, 4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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