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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책의 기적을 믿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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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책의 기적을 믿으세요?"

[흘러가는 100] <쥐덫>

2010년 7월 31일 창간호를 낸 '프레시안 books'가 2년 만에 100호를 냅니다.

이번 프레시안 books는 100호 그리고 2주년을 자축하면서 숫자 '100'을 열쇳말로 꾸몄습니다. 또 100호를 내면서 프레시안 books 100년을 상상합니다. 2013년 100주년을 앞둔 일본의 출판사 이와나미쇼텐을 찾아가고, 100년이란 시간을 견딘 서점, 도서관 등을 둘러본 것도 이 때문입니다.

열두 명의 필자는 자신의 추억과 '100'을 엮은 글을 선보입니다. 여러분도 프레시안 books가 펼쳐 나갈 100년을 함께 지켜봐 주세요. <편집자>

책을 모아야겠다고 처음으로 생각한 건 초등학교 2학년 말이나 3학년 때였다. 아마 2학년 때는 생각만 했던 것 같고, 실행에 옮긴 건 3학년 때가 맞다. 한 친구가 학교에 문고판 책을 한 권 가져왔는데, 그게 시작이었다.

녀석이 가져온 책이 너무 신기하고 재미있게 보여서 참을 수가 없었다. 어린이들이 보는 책에서는 절대로 본 적 없는 새빨간 표지에 뭔지 모를 그림이 가운데 들어가 있는 모습이, 그 책을 읽지 않으면 병이라도 걸릴 것 같이 안달 나게 했다.

도대체 그 책이 무엇일까? 이 얄미운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한 번도 얘기를 주고받은 일조차 없는 그 친구에게 갖고 온 책에 대해서 말을 건넨다는 건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 하루 종일 그 책이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도 도무지 그냥 집으로 갈 수 없어서 동네 시장 안에 있는 조금 큰 서점을 찾았다. 그 녀석이 갖고 온 책과 똑같은 책을 거기서도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거의 뛰다시피 서점으로 들어가 주위를 봤는데, 서점은 넓고 너무 책이 많아서 어디서부터 그 책을 찾아야 할지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30여분 가까이 서점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고 있으려니 주인 아저씨가 다가와서 찾는 것이 있냐고 물었다.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아저씨 눈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로 말했다.

"저기요, 요 정도 되는 크기에 빨간색 책인 데요…. 무슨 책인지 잘 모르지만…. 제목도 모르고요…."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몰라서 자칫하면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런데 아저씨는 내가 말을 다 하기도 전에 단박에 끊어버렸다.

"애거서 크리스티를 말하는 거냐?"
"네?"

나는 처음 듣는 그게 뭘 뜻하는지, 사람 이름인지, 책 제목인지, 아니면 잠꼬대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만한 크기에 빨간색 표지라면, 해문출판사에서 나온 애거서 크리스티 추리소설일 거 같은데? 아니냐?"
"아…. 네, 맞을 거 같은데요?"
"맞으면 맞고 틀리면 틀린 거지 맞을 거 같은 건 또 뭐냐?"

그렇게 시큰둥하게 말하면서 아저씨는 한쪽 구석으로 갔다. 나는 아저씨를 뒤따라갔다. 그리고 내 눈을 의심케 하는 장면을 마주했다. 그 녀석이 갖고 있던 빨간색 책이 가득 들어있는 책장이 거기 있었다. 더 놀랐던 건, 그게 전부 똑같은 책인 줄 알았는데 제목이 다 달랐다.

영국인 애거서 크리스티는 추리소설을 쓰는 작가인데 전 세계적으로도 그렇게 책이 많이 팔린 작가가 없단다. 그때까지 내가 알던 추리소설은 고작 셜록 홈스 뿐이었는데 이런 사람도 있다니, 게다가 이 작가는 확실히 홈스보다 책도 많고 책 자체가 멋있어 보이기도 했다.

▲ <쥐덫>(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유명우 옮김, 해문출판사 펴냄). ⓒ해문출판사
그 날 녀석이 학교에 갖고 왔던 책 모양이 어떤 것인지 정확히 기억한다고 믿었는데 막상 서점에서 본 책은 하나같이 똑같은 크기에 빨간색 표지라서 도무지 뭐가 그 책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최대한 비슷하다고 느끼는 책을 한 권 골라서 샀다. 그게 <쥐덫>(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유명우 옮김, 해문출판사 펴냄)이다.

그날 오후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내 모든 신경은 그 책 속에 빠져서, 마치 우주를 유영하는 별 하나가 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날부터 내 머릿속은 온통 빨간색, 그 문고본 책을 사 모으는 것 외에 다른 것은 생각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당시 해문출판사에서는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이라는 이름으로 60권 정도를 펴냈다(그것이 80권으로 늘어난 것은 내가 고등학생 때다). 나는 다짐했다. 무엇이든 열심히 해서 이 책 60권과 동서추리문고 40권 정도를 합쳐 100권짜리 나만의 책장을 만들어보기로!(동서추리문고도 100권이 넘는 대작이지만 나는 그 중에서 홈즈와 엘러리 퀸, 브라운 신부 정도만 좋아했다)

지금부터 시작하면, 어쩌면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즈음 그 계획을 완성할 수도 있지 않을까? 당시 3학년이었던 나에게 대단히 멋진 계획이었다. 초등학생에게 자신만의 100권짜리 책장은 제 아무리 전설 속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라고 해도 비교할 수 없는 규모다. 나는 내가 가진 모든 지식과 추리력, 통찰력을 동원해서 졸업 때까지 100권짜리 책장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궁리했다.

책을 사 모으려면 일단 돈이 필요하다. 당시 해문 문고판 책 한 권 값은 3000원 정도 했다. 내 일주일치 용돈은 2000원이 채 못 됐다. 하지만 그것을 쪼개 모은다면, 어쩌면 한 달에 적어도 한 권은 살 수 있다. 간단한 계산으로도 한 달에 한 권씩 사는 것만으로는 졸업 때까지 100권을 모으기 어렵다. 최소한 내 힘으로 살 수 있는 책이 한 달에 두 권씩은 돼야 한다.

명절 같은 때 어른들에게 용돈을 좀 넉넉하게 받는다고 하더라도, 지금까지 경험상 그 돈은 거의 다 부모님이 안전하게 보호해준다는 목적으로 대부분을 가져가기 때문에 정작 내 손에 들어오는 액수는 많지 않다.

당시 동네에서는 어느 집이 연탄을 많이 샀을 때 창고까지 그걸 나르는 걸 돕거나 건물 보수공사 할 때 벽돌을 대신 날라주고 적은 돈을 받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 일은 워낙 돈을 적게 주기 때문에 어른들보단 어린 애들이 주로 맡아서 했다. 과나자 사먹을 정도의 용돈벌이인데 대개는 성격이 활발한 아이들이 그런 일을 했다. 나 같은 애들은 일에 잘 끼워주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물불을 가릴 때가 아니다. 나는 닥치는 대로 일을 찾아서 했고, 심지어 조금 떨어진 다른 동네에 그런 일이 있다는 얘기가 들리면 학교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그리로 달려갔다. 그렇게 했더니 정말로 한 달에 두 권을 살 수 있었다.

장마가 시작되면 그런 돈벌이가 거의 없기 때문에 대신 집안 청소나 부모님 구두닦이, 설거지 같은 걸 하면서 용돈을 늘려 받았다.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좀 더 좋아진 시험 성적으로 용돈 협상을 하는 건 아슬아슬했지만 매번 성공적이었다.

고학년이 되어서는 용돈도 제법 올라서 한 달에 세 권 살 때도 있었고, 옆집에 사는 대학생 자취생 형들 덕에 헌책방이란 곳을 알게 되어 청계천과 평화시장을 따라다니면서 값싸게 구한 책도 꽤 많았다. 그때 헌책방에서 문고판 추리소설을 한 권에 500원씩 샀으니 이보다 더한 횡재가 어디 있을까. 그렇게 악착같이 노력했더니 졸업을 몇 달 앞둔 즈음에 목표했던 100권을 거의 다 채우게 됐다.

그러나 집엔 내가 쓸 수 있는 책장이 없었다. 모든 게 부모님에게 맞춰져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내 방이 그리 크지도 않았기 때문에 내 공간은 책상에 딸려있는 작은 조립식 책장이 고작이었다. 책꽂이는 교과서와 함께 20권 남짓 들어가면 더 이상 남는 자리가 없다.

하는 수 없이 내가 모은 책을 친구들 집에 나눠서 보관했다. 이건 책을 모으기 시작할 때부터 그렇게 계획한 것이다. 한 친구 집에 2, 30권씩 나눠 보관하다가 나중에 내 책장이 생기면 한꺼번에 모을 작정이었다. 책장을 사달라는 부탁은 집에서 졸업 선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 하려던 참이었다.

이제 이야기를 정리해야겠다. 나는 결국 졸업 때 책장 사달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때까지 고쳐지지 않은 소심한 성격 탓도 있었지만, 내가 느끼기에 그 즈음 아버지가 하는 일이 잘 안됐는지 우리 집 분위기가 썩 좋지 않았던 것 같아서 끝내 말을 꺼내지 못했던 것이다.

내 책장을 갖게 된 것은 고등학생이 되고나서다. 비록 형과 함께 쓰는 것이긴 했지만 좀 더 큰 방이 있는 아파트로 이사를 간 것도 그때다. 이사를 하고 짐이 대충 정리가 되자 나는 흩어져있던 책들을 모았다. 보관을 잘 해 놓은 친구도 있었지만 아무렇게나 쌓아둬서 상태가 온전하지 못한 책들도 더러 있었다. 그래도 100권(모두 합치면 100권이 조금 넘었다)을 다 모으고 보니 내가 참 대견하게 느껴졌다.

마침내 책 100권을 눈앞에 두고, 어떤 생각이 나를 붙들었다. 중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쩌면 그러면서 내 마음이 많이 달라졌던 것 같다. 그 책 100권이 이제는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책을 내 책장에 가둬놓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모르는 곳에 사는, 나보다 어린 누군가가 나처럼 그 책을 좋아해서 용돈을 아껴가며 책을 한 권씩 모으고 있는 지도 모른다. 나는 책 100권보다 이미 그것을 거쳐 온 추억이 소중하다는 걸 안다.

며칠 동안 생각을 다잡은 다음 그 책들을 내가 다녔던 중학교 도서관에 기증했다. 학교 도서관에서 보면 추리소설 100권이 뭐 대단한 기증이겠냐 마는, 거긴 내가 3년 내내 도서부 생활을 했던 장소이기도 해서 바로 그 추억과 늘 함께 있는 기분이 들어 좋다.

어른이 된 지금, 나는 헌책방에서 일한다. 하루에도 몇 권씩, 많을 때는 수십 권씩 책이 팔리고 또 들어오는 곳이다. 헌책방에서 일하며 오히려 나는 책 욕심을 많이 줄일 수 있었다. 팔리고 들어오는 그 책들을 대하고 있으면, 세상에서 책이 가장 자유로운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책은 영원히 누가 갖고 있을 수도 없고, 가진다고 해서 그의 소유물이 되지도 않는다. 결국 그 책은 또 어디론가 강물처럼 흘러가고 모래둔덕에 머무르다가 너른 바다로, 그 다음은 우리가 알 수도 없는 먼 대양으로 여행을 떠난다. 잊고 있던 책은 어느 날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나기도 하고, 인사도 없이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나는 책이 되면 좋겠다. 세상에 한 권 뿐인 책. 그래서 더 자유롭고, 누구에게도 머무르지 않는 훨훨 날아다니는 책이 되면 좋겠다. 지금 100권짜리 책장은 내 마음 속에 있다. 여전히 그 책장은 채우고 비우기를 반복한다. 예전에 나는 거기에 늘 무엇을 채우려고만 했다. 그러나 빈 곳이 있어야 또 채울 수도 있듯 항상 책장을 자유롭게 열어두려고 노력한다. 나는 문이 없는 책장에 걸터앉은 책이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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