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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 탄생 300년, 이런 최악의 선물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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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 탄생 300년, 이런 최악의 선물이라니!

[프레시안 books] 아즈마 히로키의 <일반 의지 2.0>

이 책의 제목이 일단 <일반 의지 2.0>(아즈마 히로키 지음, 안천 옮김, 현실문화 펴냄)이고,그 '일반 의지'는 루소의 일반 의지를 말한다고 하니, 우선 루소의 일반 의지가 무엇인지부터 말해 보자.

루소의 일반 의지는 서양 사상사에서 가장 독해하기 힘든 관념이라고 해도 과장된 표현은 아니다. 그 자체가 하나의 텍스트이고 그 텍스트 바깥은 없다. 즉, 그것을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있는 외부의 객관적 관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든지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을 뿐이고 그러한 말들이 쌓여 그 텍스트는 두꺼워질 뿐이다. 이 책의 저자 아즈마 히로키는 이 점을 분명히하고 출발한다.

그리스 철학자 파르메니데스는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 말은 다음과 같은 뜻을 내포하고 있다. 없다가도 있고 있다가도 없는 특수한 사물들은 원래 없는 것이다. 있는 것은 그러한 특수한 사물들을 영원히 지배하는 원리일 뿐이다. 그런데 그 특수한 사물들은 늘 그것을 지배하는 원리에 충실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를 들어 특정 인간에게 "인간이라면 인간답게 살라"고 말한다. 루소 생각에 일반 의지는 있는 것이고 전체 의지는 없는 것이다. 전체 의지는 특수한 공동체 구성원들인 개별적이고 특수한 인간들이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런데 그 인간들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이기에 없는 것이다. 없는 것들이 만들어 낸 전체 의지는 따라서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이면 인간답게 살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하자고 임의로 정해 놓은 것일 뿐이다.

일반 의지는 그러한 없는 것들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우리가 임의로 정해 놓은 것 그래서 언제라도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바깥에 그 자체로 있는 실체이다. 루소는 이렇듯 있는 것의 정치를 추구했다. 그러나 정치는 늘 역사의 현장이라는 특수성의 장 즉 없는 것들의 장에서 이루어진다. 아테네 민주정이 있었고 로마 공화정이 있었고 미국 혁명이 있었고 프랑스 혁명이 있었지 민주정 그 자체 공화정 그 자체 혁명 그 자체는 없었다. 그런데 있는 것의 정치라니! 그러니 루소는 악명이 높을 수밖에 없다. 특히 영미 세계와 그곳을 고향이라고 생각하는 이 세계의 교양 있는 자유주의 지식인들은 그를 비난한다. 그들은 존 로크를 신봉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루소가 보기에 로크의 정치는 없는 것들의 머리수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되는 없는 것의 정치이다. 인간이면 인간답게 살라고 말할 수 없는 정치이다.

로크는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이성적인 인간들의 다수가 결정하는 것은 옳은 것으로 보았다. 정치도 인간사가 그렇듯이 하나의 절차이다. 그리고 그 절차를 가장 효율적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토론을 통해 다수결로 결정하는 것이다. 특히 근대 국가와 같은 큰 공동체에서는 그 구성원들이 절차에 따라 대표를 뽑고 그들이 절차에 따라 토론을 거쳐 다수결로 결정하면 된다. 얼마나 상식적인가! 그러나 루소는 다수결이 전체 의지를 수합할 수는 있어도 반드시 일반 의지를 반영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리고 그것은 대표들이 결정하고 실행에 옮기는 것이 아니다. 일반 의지는 이미 모든 것을 결정해 놓았고 전체가 그것을 실행에 옮기면 된다. 절차가 필요 없는 정치가 있는 것의 정치 곧 일반 의지의 정치이다.

루소가 가장 이상적인 국가로 본 스파르타를 보자. 스파르타 시민들의 총회는 토론의 장이 아니었다. 반면에 아테네 민주주의의 상징인 시민 총회와 대법정은 토론의 장이었고 모든 것이 절차에 따라 다수결로 결정되었다. 소크라테스도 그러한 절차에 따라 다수결에 의해 사형을 언도받았다. 스파르타의 시민 총회는 그렇지 않았다. 감히 없는 것들이 어찌 있는 것에 대해 토론하고 머리수로 결정한다는 말인가? 일반 의지는 돈오돈수 하는 것이다. 단번에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이럴 능력을 갖춘 사람을 루소는 입법자라고 불렀다. 스파르타는 전설적인 입법자 리쿠르고스가 만든 하나의 통일된 네트였다. 리쿠르고스의 후예 입법자들이 말하면 시민들은 단번에 알아서 전체가 하나의 네트가 되어 주권을 직접 행사했다. 개인의 의견 표출과 토론, 충돌하는 이해관계의 조정 같은 것은 없었다. 일반 의지는 말씀이시기 때문이다. 말씀은 진리이고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스파르타인들은 이 말씀을 알아듣고 인간답게 산 것이다. 프랑스 혁명 당시 자코뱅들은 이러한 말씀에 따라 신속하고도 준열한 정의를 실천했다.

나도 이 '말씀'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다. 작년(2011년) 희망 버스를 타고 갔던 부산 영도의 한진중공업 농성장에서였다. 까마득한 크레인 위에서 말씀이 김진숙의 입을 빌려 쏟아져 내려오고 있었다. 그곳에 갔던 우리는 잘 들리지 않는 말씀을 단번에 알아들었다. 로크를 신봉하는 절차주의 자유주의자들은 우리가 절차를 어긴 범죄자라고 낙인찍었다. 없는 것의 정치가 있는 것의 정치를 이기려고 하다니 얼마나 억울한가!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과감하게 이제 루소의 있는 것의 정치가 가능해졌다고 선포한다. 그것은 일본 만화 <공각 기동대>의 주인공 구사나기 모토코 소좌가 일찍이 설파했듯이 네트는 방대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네트에 일반 의지가 사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 <일반의지 2.0>(아즈마 히로키 지음, 안천 옮김, 현실문화 펴냄). ⓒ현실문화
아즈마 히로키는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를 '총 기록 사회'라고 규정한다. 그것은 모든 것이 데이터베이스화되는 사회이다. 그리하여 인터넷 정보 환경 안에 우리의 행위와 욕망이 집적되고 그렇게 집적된 수 억 단위의 데이터의 분량은 개개인의 의도를 뛰어넘는 무의식적 욕망 패턴의 추출을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데이터베이스화된 집합적 무의식을 '일반 의지 2.0'이라고 부른다.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공각 기동대의 세계처럼 인간들이 자신을 전뇌화해 네트에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을 연결이라도 해 놓았다는 것인가? 그리하여 그것은 데이터화될 수 있고, 복제될 수 있으며, 저장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인가? 그렇다고 해도 일반 의지라는 사물이 모니터에 자기 모습을 드러낼까? 누누이 말하지만 일반 의지는 우리의 의사와 관계없이 거기에 실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즈마 히로키는 무의식이 그것을 포착할 수 있고 그것을 담고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 무의식은 욕망의 데이터베이스화를 통해 사물로 드러나고 있다고 보는 것 같다.

아즈마 히로키가 왜 이렇듯 일반 의지를 무의식과 연관시키려고 하는 것일까? 그는 루소의 일반 의지가 합리적 의사소통 구조 안에서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 점에 주목한다. 즉, 그것은 로크처럼 이성적 존재들이 토론을 통해 다수결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루소는 그것을 이성과 합리성의 차원이 아니라 감정 혹은 욕망의 차원에서 접근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프로이트가 말하는 무의식과 같은 것이 아닐까? 그리하여 루소의 입법자는 마치 정신 분석의와도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정신 분석의가 우리가 의식할 수 없는 저 무의식의 심해에 숨어 있던 우리의 의도들을 끄집어내듯, 입법자들도 시민들이 의식하지 못 하는 저 깊은 곳에서 일반 의지를 끄집어낸다는 것이다.

그런데 얼마나 다행인가! 오늘날의 정보 매체들은 이미 그것을 데이터베이스화해 놓았으니, 루소의 말처럼 사물로서 거기에 존재하기 되었으니, (여기서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사물로 보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드디어 입법자 없이도 일반 의지를 수시로 확인할 수 있는 정치가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루소의 일반 의지를 전체주의의 핵심 개념이라고 보는 자유주의의 비판에서 구해내 나름대로 전유하려는 전략에서 나온 것이다.

문제는 아즈마 히로키가 루소와는 달리 더 이상 이상적인 공동체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이제 그러한 공적 영역의 시대는 끝났다고 단언한다. 이제는 '나'의 시대이지 우리의 시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모두들 공적 영역을 피해 각자 자신의 방 모니터 앞에 앉아 있는 시대, 그러나 정보 매체들에 입력시킨 우리의 의사와 무의식적 욕망이 집적되어 일반 의지라는 사물이 생성되어 우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나에게 직접 나타나는 시대, 그리하여 리처드 로티가 말하는 것처럼 공적인 것이 사적으로 변해 이념도 이데올로기도 존재하지 않는 '리버럴 유토피아' 시대, 로버트 노직이 말하는 내 일만 있지 우리의 일은 없는 최소 국가의 유토피아 시대. 이러한 시대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이고 그렇게 되어야 할 시대라는 것이다.

실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아니 어떻게 루소의 일반 의지가 로티와 노직과 만날 수 있다는 말인가? 루소는 좋은 국가일수록 시민들은 민회로 달려가고 나쁜 국가일수록 집에 틀어박힌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만일 아즈마 히로키가 단순 순박하게 오늘날 인터넷과 같은 사이버 공간이 새로운 공적 영역으로 등장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라면, 즉 네티즌이 곧 시티즌이라고 말하는 것이라면, 그는 로티나 노직과 같이 일반 의지 자체를 부인하는 철학자들을 원용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다. 네티즌은 시티즌이 아니고 시티즌의 시대는 끝났다는 것이다. 공동선을 위해 연대하고 참여하고 행동하자는 구호는 헛되고 또 헛된 시대가 되었고 이제는 모든 것이 사적인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네트 상에서 사적인 행위들이 모이면 개인들도 모르게 그것이 일반 의지가 되어 작동되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아즈마 히로키의 이러한 주장은 그의 포스트 모던적 시대 인식에 근거하고 있다. 이제 이성과 합리성이 공동체의 구성과 작동의 원리라고 생각하던 시대는 끝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나 아렌트나 위르겐 하버마스가 추구하는 공적 행동과 합리적 의사소통으로 구성되는 공동체는 열린 공동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어떤 원리에 의해 실현된 공동체는 그 원리에 의해 닫힐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오늘날의 신자유주의의 이념적 기초를 마련한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나 이사야 벌린의 그것과 일맥상통한다. 그들은 이성과 합리성을 인간 행위의 유일한 원리로 삼고 그에 기초해 사회를 기획하는 것이 곧 전체주의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인간 사회는 단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자동적으로 작동되고 있기 때문에 그 어떤 목적론적 의도적 기획도 사회를 왜곡시킬 뿐이라는 것이다.

아즈마 히로키도 이러한 관점에서 모든 이념과 이데올로기의 공적 성격을 부정하고 모든 가치의 상대성을 주장하는 로티와 공적 기구로서 국가를 결단코 부정하는 노직을 그의 스승으로 삼고 있다. 그러면서 교묘하게도 그들과는 전혀 통하는 것이 없는 루소의 일반 의지를 끌어들이고 있다. 그는 일찍이 루소가 그 원리가 이성적 사고가 아니라 타 인간들에 대한 측은지심이라는 감정 혹은 욕망에서부터 출발했다고 설파한 점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것이 공적인 이념이나 이데올로기가 존재할 수 없는 시대에 타인과의 연대는 단지 상대방에 대한 연민에서 가능하다는 로티의 주장에 연결시킨다.

그는 이러한 인간들을 동물이라고 부른다. 즉, 이성과 합리성이 인간의 수월성이라는 주장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성적 인간들의 숙의와 행동을 통해 즉 서로를 마주보며 수립된 공동체를 닫힌 공동체라고 단정한다. 대신 인터넷 저 쪽에서 넘어오는 생판 모르는 타인들이 우리를 드넓은 외부로 이끌어내고 거기서 측은지심을 가진 동물들이 서로 재잘거리면서('트윗'하면서) 진정한 연대가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여기서 전혀 새로운 민주주의 2.0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측은지심을 가진 동물들이 노직이 말하는 자유지상주의를 실천하는 것이다. 즉, 국가는 단지 그러한 동물들의 안전만을 보장하고 시장이 인간의 자유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의를 제기하기 위해 다시 내가 경험한 김진숙 사건에 대해 다시 말해 보자. 나는 거기서 일반 의지=말씀을 들었다고 했다. 입법자인 김진숙이, 아니 라캉 식으로 말하면 김진숙의 입을 빌려 그것이 들려준 말씀을 단번에 알아들었다는 것은 실제로는 그것이 일반 의지여야 한다고 내가 절실히 요청한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러한 요청은 공공성을 통해 나타난다는 것이다. 우리를 지배해야 하는 어떤 일반적인 것이 존재한다고 요청하기 위해서는 공공의 장에서 연대해 하버마스 식으로 숙의하고 아렌트 식으로 행동하는 우리가 존재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 아닐까? 내가 그들과 함께 우리가 되고 우리가 내가 될 때 무엇인가 우리를 지배해야 하는 일반적인 것이 존재한다고 요청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사적인 이익이 아니라 공동선을 추구한다고 확신할 때 우리의 그러한 확신을 담보해 주는 도덕적 요청인 것이다. 그러니 나는 그것을 단번에 들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렇듯 공공성을 통하지 않고서는 일반 의지는 우리에게 다가올 수도 없으며 실현될 수도 없다. 루소의 일반 의지는 그것이 시장의 신자유주의적 지배에 저항할 수 있는 도덕적 기반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 의미가 있다. 사회의 일부 세력이 헤게모니를 장악해 자신들의 부분적인 이익을 일반적 공익으로 둔갑시키는 없는 것의 정치를 종식시키고 있는 것의 정치를 회복하기 위해 일반 의지를 도덕적으로 요청하는 일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아즈마 히로키는 이러한 전제에서 논의를 전개하지 않는다. 그는 시장이 지배하는 사회에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찬양한다. 따라서 사이버 정보 사회의 도래로 시장을 통제할 수 있는 새로운 공적 영역이 등장했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물론 사이버 정보 기기들을 생산 공급하고 그 시스템을 운영 통제하는 주체가 이미 시장에 편승한 세력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보지도 않는다. 시장에 대한 우상 숭배에 루소의 일반의지를 교묘히 착취하고 있을 뿐이다. 올해는 루소가 태어난 지 300년이 되는 해이다. 이 책은 가장 최악의 생일 선물일 뿐이다.

읽을거리

일본 신세대 지식인의 상징 아즈마 히로키가 누군지 궁금하다면 '프레시안 books' 92호(2012년 5월 25일자)에 실린 문학평론가 조영일의 글을 읽어 보세요. (☞관련 기사 :
미소녀 게임, 문학의 심장을 찌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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