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은 인과율을 따르지 않고 원인도 없이 불쑥불쑥 나타나는 것이기에 법칙을 쫓는 이들에겐 마뜩치 않은 것이었다. 그래서 이성의 시대였던 18세기 계몽 사상가들은 우연은 단지 미신일 뿐이며 지식의 진보와 함께 곧 사라질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20세기를 사는 우리는 이제 세계 자체가 우연적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자연현상과 인간의 행동이 필연적인 인과관계의 연쇄로 결정되어 있다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우연을 인정했다고 해서 세상이 예측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불확실성 속에 있다고 여기지는 않는데, 그건 책의 제목처럼 우리는 이미 '우연을 길들였기' 때문이다.
세상이 우연에 종속되어 있더라도 우리가 제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짐작할 수 있듯이 확률과 통계 덕분이다. 그동안 확률과 통계는 일견 무질서해 보이는 우연도 나름의 규칙성과 법칙이 있다는 점을 거듭 보여 왔기 때문이다. 저자는 18세기 확률이론을 다룬 이전 저작(<확률의 출현(1977)>)에 이어, 1990년에 나온 이 책 <우연을 길들이다>(이언 해킹 지음, 정혜경 옮김, 바다출판사 펴냄)에서 통계(학)가 19세기 내내 어떻게 이 우연을 길들이려고 노력했는지 보여주려 했다. 통계와 통계적 추론이 어떻게 정당한 지식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는지, 이 과정에서 어떻게 결정론적 사고가 쇠퇴하고 통계적 사고가 받아들여졌는지, 어떻게 우연이 통제 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는지 밝히려 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저자의 관심은 다분히 철학적인 것이다. 실제로도 이 책은 우연을 길들이는데 공헌한 인물과 일화들을 연대기적 순서로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역사서라기보다는 개성 짙은 철학책이다.
하지만 저자가 잘 보여주고 있듯이 이런 통계의 등장과 확립 과정은 일상적인 과학철학이나 수학사의 관심 영역을 훌쩍 뛰어 넘는다. 우선 통계의 출현과 통계적 사고의 확립은 통치의 문제와 분리해 생각하기 어렵다.
이탈리아 도시국가 시절부터 징병과 징세를 위해 기초적인 인구조사는 해왔지만, 1820년대 이후 유럽에서는 저자가 "활자화된 숫자들의 쇄도(avalanche of printed numbers)"라고 부르는 일이 일어났다. 관청 서기, 통계가, 계산가, 출판인 등 수많은 사람들이 출생, 사망, 혼인, 질병, 직업, 토지 등과 관련된 사실들을 조사해 그 수치를 집계 및 분류한 후 계속해서 출간했다. 통계국과 같은 별도의 관청들이 세워지고 담당 관료들이 인구조사, 연금과 보험 운영 등을 위해 통계조사를 실시했다.
▲ <우연을 길들이다>(이언 해킹 지음, 정혜경 옮김, 바다출판사 펴냄). ⓒ바다출판사 |
하지만 <우연을 길들이다>는 좀 더 인식론적 문제에도 관심이 많다. 저자는 어떻게 통계가 자율적인 법칙이 되었는지 다양한 경로를 쫓아 면밀히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의 개념을 사용한다면 이 책은 1장에서도 소개하고 있는 '통계적 추론 스타일'의 성장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저자가 주장하는 '추론 스타일'은 어떤 명제가 참인지 혹은 거짓인지 판정하는 일종의 준거로서, '통계적 추론 스타일' 외에도 '실험실적 추론 스타일' 등 여러 개가 있다. 저자가 강조하는 점은 이런 스타일은 어떤 스타일이 더 옳은지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각 스타일은 저마다의 역사가 있고 자신만의 연구대상과 판정 규칙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어떤 스타일로 다른 스타일을 평가할 수 없다.
이 책에서 보여주듯이, 통계적 사유가 정당한 추론 스타일로 받아들여지는 역사적 과정에서는 '대수의 법칙,' '정규 분포,' '법칙의 자율성' 등의 요소들을 확립해나간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과정이 매우 우연적이었다는 것이다. 푸아송(Siméon Denis Poisson)의 '대수의 법칙'은 이것이 받아들여질 때 수학적으로 논증된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맹신, 태만, 모호함, 숫자에 대한 혼미, 사회적 통제에 대한 환상, 공리주의자들의 선전 등의 요인에 힘입어 선험적 진실로 가공"되었다.
또한 벨기에 왕실 천문학자 케틀러가 주장한 보편적 정규 분포는 수사를 통해 획득된 것이었다. 당시에는 검정법도 없었기에 '모든' 인간의 특성이 '정확히' 정규 분포를 따른다고 주장할 논거가 부족했지만 이런 케틀러의 주장은 큰 반향을 일으켰고 수많은 연구들이 뒤를 이었다.
이렇게 '통계적 추론 스타일'이 점차 확립되어가면서 사회에서는 새로운 실재와 범주들이 나타났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롭게 보여주는 것은 이른바 '평균인'과 '정상(the normal)'의 개념이다. 케틀러는 수학적 정리와 천문학적 관찰에 불과했던 '정규 분포'를 사회적 법칙으로 만들었다. 1844년 그는 인간의 모든 특성들도 이 정규 분포를 따른다고 "성급히" 선언했고 이는 이 분포의 평균값을 실재하는 양으로 만들었다.
어떤 민족이나 인종, 국가의 특질을 이해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그 특질의 평균값을 구해보면 된다. 신장, 눈동자 색, 예술적 재능, 질병 등 모든 것은 측정해서 평균을 구해보면 된다. 이 값은 단지 개별적인 값들을 대표하는 추상적이고 인위적인 개념이 아닐까? 케틀러는 '평균인' 한 사람을 반복적으로 측정하면 같은 분포를 보일 것이라는 교묘한 비유를 통해 '평균인'을 집단의 상태에 대한 실재적인 지표로 삼았다. 이제 한 집단의 특질을 측정해 구한 평균값은 그 집단을 객관적으로 대리하는 '표준적인 인간'이 되었다. 이렇게 되자 결국 해당 집단의 '평균인'을 개선하기 위한 국가의 개입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발생할 수 있었고 이후에 악명 놓은 우생학적 개입도 허용할 수 있었다.
'정상'의 개념도 통계적 추론 스타일의 확립과정에서 나왔다. 저자의 말을 따르면 계몽주의 시대에는 '인간 본성'을 궁구했다면 19세기는 '정상인'에 관심이 많았다. 사실 지금도 우리는 "저 친구 정상적이야?"라는 물음을 자주 던진다. 이런 물음은 두 가지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한편으로 저 사람은 평범한 보통의 인간에게서 기대되는 행동을 하고 있는가라는 사실적 물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저 사람은 옳은 행동을 하고 있는가라는 규범적 평가의 의미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정상적(normal)'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사실과 당위가 뒤섞인 채 사용되었던 것은 이 때부터였고 '정상'은 인간을 평가하는 하나의 준거가 되었다.
인간에게 정상과 이로부터 일탈한 병리가 있다면, 사회도 정상적인 상태가 있을 수 있다. 이 '사회의 정상상태'는 당시에 사회가 무엇인지를 놓고 고민하던 사회학자들에게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개인의 행동 너머에 있는 사회의 법칙을 찾고 있던 프랑스의 사회학자 뒤르켐에게는 특히 그러했다. 그는 이 정상상태의 개념으로부터 "우주의 힘만큼이나 확실히 실재하는 힘"이라고 말한 사회의 법칙을 도출했다. 그래서 자살률의 평균을 안정적으로 유지시켜 주는 힘으로서 독자적인 사회의 법칙이 실재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통치와 통계, 통계적 추론 스타일, 새로운 범주의 구성은 이 책의 의미에 접근하는 하나의 시각일 뿐이다. 사실 이 책은 이렇게만 이해하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풍부하고 다채로운 내용들을 많이 담고 있다. 저자는 계몽주의 시기의 '도덕과학', 법원의 배심원 구성, 통계치를 수집하는 보험회사와 국가 행정, 통계학의 결정론 논쟁, 사회학, 생리학과 병리학, 천문학, 생물측정학 등의 영역을 종횡무진 넘나들고 수많은 학자, 관료, 개혁가의 활동을 박식하게 언급하고 이들의 주장을 능숙하게 평가해나간다. 장이 바뀔 때마나 이렇게 무대와 주인공들이 순식간에 바뀌는 탓에 사실 읽어나가기 쉽지는 않다. 다행히 흥미로운 일화를 많이 소개하고 내러티브를 잘 구사한 덕분에 롤러코스터처럼 좀 어지럽기는 해도 지루하지는 않다.
마지막으로 19세기 서구의 '우연 길들이기'의 복잡하고 지난한 과정을 보여준 저자가 던지는 중요한 질문 중 하나는 아마도 이런 것이 아닐까 한다. 결정론이 물러나고 비결정론적인 우연을 받아들였다면 우리는 더 자유로워졌을까? 결정론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대립시키는 오랜 상식으로 본다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는 것 같다. 자연의 법칙이 물러간 자리에 자율적인 통계의 법칙이 들어섰고 이를 통해 새로운 인간형과 범주들이 만들어졌고 통치의 다양한 테크닉들이 더불어 발달했다. "존재의 구석구석이 측정되고" 분류되며 우리는 이런 분류와 범주에 따라 행동하고 사고하게 되었다. 저자가 예로 들었듯 우리는 질병분류학이 정한 원인으로밖에 죽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결정론을 버리고 우연을 받아들인 결과 우리는 더 자유로워진 것이 아니라 더 확장되고 더 다양해진 통제 속에 있게 된 것이다. 우연이 우리 사회에 도입되고 법칙이 되고 난 뒤 "세상은 이전보다 불확실하게 된 것이 아니라 훨씬 덜 불확실하게 되었다(38)"는 저자의 말은 결국 이 뜻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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