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책을 왜 샀나요? 사놓고 내버려 둔 이유는요? '프레시안 books'는 '사놓고 읽지 않은(못한) 책'이란 주제로 열두 명의 필자에게 글을 청했습니다. 책등만 닳도록 봐 온 책에 대한 필자들의 추억과 항변은 각각의 '자서전'이나 '독서론'이 되었습니다. 읽은 책에 대한 서평보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하여 말하는 법'이 더 흥미로운 까닭입니다. |
서재에 있는데도 거들떠보지 않는 책은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이미 읽었거나 '언젠가' 시간이 되면 읽으려는 책. 그러니까 과거의 책이거나 미래의 책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미래의 책은 이미 읽은 것이나 진배없는 책, 즉 과거의 책과 같은 아우라를 갖고 있는 책일 경우가 많다. 우리는 책을 살 때 책의 실제적인 내용만 필요로 하거나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 그 책을 사고 싶어 하는 욕망을 소비하거나, 그 찰나의 어떤 생각을 구매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책은 전적으로 그것이 저자가 의도한 실제적인 내용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독자의 편에서 필요로 하는 어떤 물질적·비물질적인 것을 의미하기도 하다는 것이다.
책은 서재의 장식으로(참고로 나는 책을 내용이 아니라 키 높이에 의해 정렬해놓은 사람과 책들을 가구의 기둥으로 받쳐놓은 사람들을 알고 있다) 혹은 패션의 아이템으로 쓰일 때도 있지만, 책이 물질임을 가장 명백하게 증명하는 때는 이사할 때이다. 먼지가 쌓인 책들, 그저 처치 곤란한 종이뭉치에 불과한 물질덩어리인 책들을 운반하면서 이삿짐센터 아저씨들은 묻곤 한다. "이 책들, 다 읽으셨어요?" 물론, 답은 '아니요'다. 그 뒤에 이어지는 '그런데 왜 이렇게 책을 싸 짊어지고 다니나요?'라는 질문은 이삿짐 아저씨의 질문이 아니라, 그의 침묵에서 읽은 나의 가슴 아픈 독백이다. 읽지도 않을 책을 왜 나는 사재기하듯 사대고 또 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과거 서툴렀고 어리석었던 시절, 대부분의 서적 구매는 교양에 대한 강박에서였던 것 같다. 가령, 대학 입학 후 정문에서 팔던 영자 주간지나 <창작과비평> 영인본 같은 것 말이다. 그런 것들을 구비해놓아야만 지성인의 세계에 끼어들 수 있을 것만 같은 지적 허영이 가난한 대학생의 호주머니를 털게 했을 것이다. 또 사놓고 읽지 않은 책들 중 일부를 차지하는 것 중에 가장 골치 아픈 것은 원서들이다. 이 책들은 주로 나의 전공과 관련된 서적들인데, 학자라면 번역서가 아니라 원서로 읽어야 한다는 강박이 제본의 대열에 부하뇌동하여 나를 줄 서게 만들었다.
그 책들 중에서 전공서적은 아니지만 지금도 서재에서 끼어 짯짯이 나를 째려보고 있는 책 중에 하나가 칼 마르크스의 <자본> 독일어 원서
이러한 충동에 의해 구매한 것 중 가장 나를 가슴 아프게 했던 것은 아놀드 토인비의 <도전과 응전>원서
사놓고 읽지 않은 책들의 대부분은 이런 식으로 구성된 것, 즉 누군가의 언급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거나 혹은 어떤 책의 저자에 의해 추천받은 것들이다. 예를 들면, 최근 몇 년 전 밀란 쿤데라의 문학 비평서 <커튼>(박성창 옮김, 민음사 펴냄)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내가 익히 알고 있는 서구 고전이 아니라 '다른 고전'의 가능성에 충격을 받은 나는 거기서 언급되는 중부 유럽의 고전들-헤르만 블로흐의 <몽유병자들>, 미하일 불가코프의 <거장과 마르가리타> 등등-십여 권을 한꺼번에 구입한 적이 있다. 그러나 역시 그 다른 가능성을 시사하는 중부 유럽 고전 중에 완독한 책은 단 한권도 없다.
그렇다면, 책꽂이에 꽂아놓고 안 읽은 책은 여전히 '언젠가' 읽어야만 알 수 있는 미래의 책이기만 할 것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느 순간 나는 '많은 책을 읽어야 한다', 혹은 '일일부독서면 구중생형극(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이라는 식의 강박에서 비교적 자유로워졌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혹은 합리화에 의해서이다.
첫째 사놓고 읽지 않은 책, 언젠가 읽어야 할 미래의 책도 어떤 식으로든 내가 읽어버린 '과거의 책'의 일종이라고 생각한다. 그 책을 구매할 때 내가 얻었던 아주 작은 영감이나 지식, 그 자체만으로도 그 책은 이미 나에게 어떤 식으로든 '의미 매김'이 되었기 때문이다. 때로 타인에게서 강렬한 인상을 받아서 산 책 중 어떤 것은 실제로 읽었을 때 나에게 어떠한 감흥을 주지 못할 때도 많다. 즉 세상의 모든 책은 전적으로 그것을 그 사람 방식으로 '읽은 자의 몫'이지 그 자체적으로 무엇을 온전히 가지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나는 책은 물론 어떤 사태, 상황 등에 대해 유달리 예민한 감각과 지성으로 다른 사람들이 포착하지 못하는 많은 이야기들을 끄집어내는 몇 사람을 알고 있다. 그 중에 책의 경우는 아니지만 사소한 예를 들면, '과꽃'이라는 노래를 나는 그런 식으로 비로소 '알게' 되었다. "올해도 과꽃이 피었습니다. 꽃밭 가득 예쁘게 피었습니다. 누나는 과꽃을 좋아했지요. 꽃이 피면 꽃밭에서 아주 살았죠"라는 짧은 가사를 늘 흥얼거리면서도 나는 그 노래가 현재 누나가 없는 상태이고 어린 화자가 시집간 혹은 지금은 없는 누나를 그리워하는 노래라는 것을 그 어떤 분의 언급에서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 의미는 내가 수십 번 부르는 동안에도 의식하지 못했던 어떤 시적 풍경이고, 그것은 나의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의 것이다. 그런 식으로 내가 사놓고 읽지 않은 책의 의미는 타인들의 서평이나 언급에서 이미 완료된 경우가 많고 나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는 이미 읽었던 책들 중에서도 그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 과거의 책과 미래의 책과의 구분은 별 의미가 없다. 그것은 물론 전적으로 나 자신의 허술한 기억력의 문제이나 꼭 나만이 그렇지는 않다는 사실은 큰 위안이 되기도 한다. 어떤 유명한 작가의 글에서 읽은 것인데(그 저자의 이름도 잊어버렸다), 그 저자가 하루는 어떤 책을 읽는데 이미 밑줄 쳐져 있는 부분과 짧은 논평이 자신과 꼭 같더란다. 그래서 '참 이 사람은 나와 비슷한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을 했는데 맨 뒷장에 자신의 사인이 있어서 경악을 했다는 이야기이다. 나의 경우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논문 때문에 읽는 경우 제외하고는 읽으면서 잊어버리는 '해체적 독서'가 대부분이다.
한때는 이 허술한 기억력과 망각으로 인해 괴로워하거나 자괴감을 느끼곤 했다. 또는 남의 생각과 나의 생각을 각주로 구분해야 논문에서 과연 어디까지가 나의 생각인지에 대해 강박을 가지고 스트레스를 받았던 적도 있다. 구체적인 텍스트는 없지만, 이 생각도 어디선가 내가 어떤 책에서 읽을 것일 터인데 이걸 어떻게 논문에 표기해야하나 말아야 하나 등의 강박증 말이다. 그리고 기억력이 허술하면, 학문적 작업을 할 때 매번 다시 읽어야하는 번거로움도 곤란함 중에 하나였다. 한때 학문의 길을 포기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고심하기도 했지만 결국 이 망각적 경향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은 합리화로 극복 아닌 극복(?) 혹은 포장해버리고 말았다. 망각하는 힘이야말로 생을 매일 새롭게 살 수 있는 힘이라고 했던 니체의 말에 기대자면, 나는 망각으로 인해 괴로운 과거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물과 책에 대해서 새로운 감각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책을 안 읽기로 유명한 발레리의 말, "지나친 독서는 독창성을 죽이는 것이다"라는 데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정보화 시대 우리는 너무 많은 기록들의 더미, 즉 아카이브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그러한 것들이 일상생활에 일차적으로는 많은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인류의 '새로운' 지평을 방해하기도 한다고 생각한다. 가령, 위에서 언급했듯 내가 논문을 쓸 때 느꼈던 강박, '이것은 절대 나의 독창적인 생각이 아니다'라는 두려움은 우리 현대 창작자들이 갖는 보편적 강박이기 쉽다.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나니'라는 말이 있듯 따지고 들면, 세상에는 전적으로 새롭고 독창적인 것은 없다. 기록을 뒤지고 기원을 찾다보면 반드시 그 비슷한 것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그 모든 것이 완벽하게 '기록'되지 않았던 과거에는, 인류는 망각의 힘에 의해 '독창적인' 문화를 창조할 수 있었다. 더러 학생들의 창작물이나 출판물에서 상상력의 고갈을 느끼는 것은 우리가 너무 많은 기록들을 가지고 있고, 그것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어디선가 본 듯한, 읽은 듯한 이야기라는 이 진부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한때 나는, 진시황처럼 인류의 기록들 전부를 분서갱유라도 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나는 내가 평문을 써야 하는 책은 절대 읽지 않는다. 너무 많은 영향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라는 오스카 와일드의 말은 패러독스이지만, 너무 많은 자료와 참고서적들로 둘러싸인 우리 현대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피에르 바야르는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김병욱 옮김, 여름언덕 펴냄)에서 몽테뉴의 다음과 같은 글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나는 책들을 뒤적거릴 뿐, 그것들을 탐구하지 않는다. 거기에서 뭔가 남는 것이 있다면, 나는 그것을 더 이상 다른 사람의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나의 판단에 도움이 된 것은 단지 바로 그것, 즉 판단에 영향을 준 그 담론들과 상상력들이다. 그밖에 저자며 장소, 말들과 다른 여러 정황들, 나는 그것들을 마구 잊어버린다."
▲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피에르 바야르 지음, 김병욱 옮김, 여름언덕 펴냄). ⓒ여름언덕 |
마지막으로 익숙한 이야기이지만 어떤 사람도 세상의 모든 책을 읽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더러 다음과 두 가지 질문을 던진다. 첫째 반드시 소장하고 있어야 할 '단 한권의 책'을 제시해보고 토론해볼 것. 물론 어떤 경우도 '단 한권의 책'에 대해 합의를 이룬 적은 없다. 모든 사람이 소장하고 있는 단 한권의 책이 없다는 사실은 어떤 책도 꼭 읽고 죽어야할 만큼 필요한 책이 아니라는 말이다. 또 다른 질문은 "집에 냉장고가 없는 사람?"이다. 물론 냉장고는 거의 99퍼센트가 구비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책도 냉장고만큼 우리 삶에서 실제적으로 중요한 것이 될 수 없다는 말인가?
책이 냉장고보다 중요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 어떤 책이 '나'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냉장고가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획일적인 기능이 아니라, 그 책에서 내가 발견한 어떤 개별적이고 특별한 의미가 나의 무언가를 바꾸어놓았기 때문이다. 즉, 책의 본질적인 의미는 보편적이지 않을뿐더러 독서와 비독서에 의해 결정되는 것도 아니며, 독자의 편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고전이나 각자의 서재는 그렇게 구성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인류를 알기 위해서는 단 사람만을 깊이 있게 경험해도 된다는 말이 있다. 연애가 대체로 누구에게나 걷잡을 수 없는 기쁨이자 고통인 이유는 우리가 타인을 가장 깊게 경험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본다면 책은 궁극적으로 독서의 대상이 아니라 연애의 대상이어야 하지 않을까.
묵혀 놓은 책들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언젠가라는 읽어야 한다는 강박 때문도, 그 책의 의미가 와인처럼 숙성하리라는 기대 때문도 아니다. '언젠가의 나의 성숙'이 그 책에서 판도라의 상자처럼 전혀 새로운 에로스를 발견하고 그것과 몸 섞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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