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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 된다고 '유리천장' 깨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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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 된다고 '유리천장' 깨질까?

[프레시안 books] 해나 로진의 <남자의 종말>

'나는 나쁜 여자입니다' vs. '남자의 종말'

2009년 가을, 나는 자비를 들여 서너 군데의 신문에 익명으로 전면 광고를 냈다. '아침마다 이별하는 엄마'와 '나는 나쁜 여자입니다'라는 헤드카피로 시작하는 편지 형태의 광고로, 직장을 다니면서 육아와 살림을 동시에 해내야 하는 여성의 고충을 토로했다. 나만의 작은 외침이자 외로운 캠페인이었지만 일과 육아를 병행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모든 '일하는 엄마들'에게 희망과 격려의 메시지를 전해 주고 싶은 일종의 자매애에서 시작한 일이었다.

신문의 전면을 가득 채울 분량의 두 편의 광고에 나는 워킹맘들의 남편과 가족, 워킹맘이 근무하는 기업, 나아가 사회 전반에 '그녀들을 위한 커다란 변화가 필요하다'는 용감한 반항의 메시지를 담고 싶었다. 시간이 꽤 지나 지금은 기억하는 사람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이 광고는 당시 작은 파란을 몰고 왔다. 혼자 내린 결단으로 시작한 일이 예상 밖의 큰 주목을 받은 것이다. 광고가 나간 후 2년이 훌쩍 넘은 올해 2월, 미국의 저널리스트인 해나 로진이 찾아왔다. 지난해 미국의 <워싱턴포스트>에 실렸던 인터뷰 기사를 보고 무척 인상 깊었다고 했다.

그로부터 반년이 지난 후, 책 한 권이 도착했다. 제목은 <남자의 종말>(배현·김수안 옮김, 민음인 펴냄). 해나 로진의 책이었다. '여성의 지배가 시작된다'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책의 표지에는 쓰레기통에 처박힌 남자 구두가 여자의 빨간 하이힐에 짓밟히는 모습의 이미지가 실려 있었다. 이 강렬한 표지는 에너지 넘치고 역동적인 해나 로진의 이미지와 닮아 있었다

그녀는 내게 캠페인을 펼쳤던 개인적인 의도와 한국 사회의 현실에 대해서 많은 것들을 질문하는 한편, 미국과 유럽 그리고 아시아의 일하는 여성들에 대한 사례를 적지 않게 들려주었다. 이미 '일하는 엄마들'에 대한 모범적인 시스템을 갖추고, 여성 본인은 물론 남편과 가족까지도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진 선진국들의 사례들을 들으면서 한국은 아직 너무나 갈 길이 먼 듯해 절망적인 심정을 느꼈던 기억이 떠올랐다.

세상의 남자들은 이미 진화하고 있다

▲ <남자의 종말>(해나 로진 지음, 배현·김수안 옮김, 민음인 펴냄). ⓒ민음인
책은 생각보다 훨씬 객관적이며 혁신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해나 로진은 자신이 여성이라는 입장을 떠나 철저하게 팩트 위주의 정보를 제공했다. 여성의 지배는 더 이상 추측이나 기대가 아니라 현실 그 자체였다. 그녀는 책 속에서 가정과 사회 전반에서 초인적인 재능을 발휘하며 사회적으로 두각을 나타내는 여성들을 '유연한 여자'로, 그런 여성들의 경제적, 사회적 역할 변화에 대해 보수적으로 반응하며, 시대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진화하지 않는 융통성 없는 남자들을 '뻣뻣한 남자'로 지칭했다.

이와 관련해 가장 인상적인 내용은 해나 로진이 부양자 아내에 관한 <슬레이트> 설문을 위해 포클랜드에서 만난 로버트의 인터뷰였다. 로버트는 아내의 역할을 존중할 줄 알며, 성별을 떠나 부부가 온전하게 하나임이 어떤 의미인지 충분히 인식하고 있으며, 아내를 대견하고도 자랑스럽게 여기는 '유연한 남자'로 소개된다.

"아내가 나보다 돈을 더 많이 번다는 사실은 우리 집에서 결코 화젯거리가 아니고, 부부관계에서 절대 이슈가 아닙니다. 그녀가 이룬 것이 나는 자랑스럽고, 우리가 벌고 쓰는 모든 것은 '우리 것'이며, 내가 내 몫을 다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결코 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 세상엔 이미 진화하고 있는 남자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나는 한 기업의 대표로서 꽤 오래전부터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나 직원들에게 '유연함' 혹은 '융통성'을 가진 사람의 필요성을 조언하고 강조해 왔다. 어쩌면 함께 일하던 대다수의 '뻣뻣한 남자'들은 나의 이야기에 콧방귀를 뀌었을지도 모르겠다. 해나 로진의 글처럼 세상은 아직 벰의 성 역할 척도에서 규정한 '여성적 가치들'이 '부드럽다'거나, '배려한다'거나, '동정한다'거나', '적응력이 강하다'는 것인데 이는 모두 '유연함'으로 이해되는 성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해나 로진은 한 발 더 나아간다. 그녀가 머리말의 마지막에 쓴 다음과 같은 내용은 저자의 시각이 얼마나 진보적인지 짐작하게 한다.

이 책을 시작하면서 나는 우리가 여성의 세상으로 진입하고 있으며 이 세상은 벰의 성 역할 척도에서 규정한 일단의 '여성적 가치들', 즉 '부드러움', '배려심', '동정심' 등을 반영하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사를 끝낼 무렵 나는 남녀에게 벌어진 사태는 고정된 역할이나 자질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고 그 역도 성립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여자에 의해 굴러가는 세상이 더 '부드러울' 거라고 생각하는 것 또한, 지금 젠더 역할에서 일어나는 대격변이 쉽게 다스려지고 예측 가능한 것이라고 스스로를 안심시키는 이야기에 불과한 것 같다. 그렇지만 이 변화는 혁명적이고 짜릿하며, 때로는 무섭지만 어쨌든 불가피하다. 적어도 우리는 그 변화를 똑바로 보는 일은 할 수 있다.

저자가 예로 든 미국의 시트콤 <워크 잇(Work It)>에 등장하는 배우의 신세 한탄은 싱거운 웃음을 유발한다. "여자들이 일자리를 다 차지해 버렸어. 얼마 안 가 돈과 권력을 움켜쥐고는 남자들을 제거하기 시작할 거야. 여자들은 우리 중에서 몇 명을 골라 섹스 노예로 만들어 버릴지도 몰라." 마치 침팬지들이 인간을 지배하는 세상을 담아 인류의 오만함에 경고의 메시지를 던졌던 영화 <혹성 탈출>의 대사 같기만 하다. 웃자고 만든 코미디 시트콤의 설정이지만, 상상만 해도 너무 극단적이다. '구제불능 철부지'라고 해서, '매력 없는 염세주의자'라고 해서, '소파에 뒹구는 행복한 카우치포테이토'라고 해서, '사나이'들을 제거할 만큼 여자들은 '유연'하지 않은 존재가 아니다.

한국에서 '워킹맘'으로 살아간다는 것

그러나 여성으로, 특히 한국 여성으로 살아가는 일에 답답함을 토로한 적이 있는 나로서는 환경적으로 한국 여성이 '유연한 여자'로 옷을 갈아입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생각한다. 해나 로진이 한 챕터를 모두 한국의 상황을 소개할 만큼 우리나라의 경직된 남녀 문제는 여타의 국가들과 다르다. 그녀는 워킹맘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나의 사례를 포함해 다양한 한국 여성들을 만나 인터뷰하면서 꽤 정확히 우리나라의 현재와 미래를 진단한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워킹맘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한계를 감수해야 하는 걸까?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내가 속한 조직에서 만족할 만한 역량을 발휘하고, 그 능력을 적극적으로 내보이고, 회사와 동료들이 나를 그만큼 인정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러나 충분한 결과를 내고 있는데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라면, 적극적으로 문제 제기를 해 보기도 하고 최악의 경우 이직을 결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당연한 권리가 '가정'이 있는 여성의 경우는 난감할 만큼 다르다. 일하는 아내로써 응당 배려 받고, 인정받아야 할 것에 대해 자기주장을 하기 힘들뿐 아니라, 남편과 가족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기도 하고 또 결과적으로 자신에게 더 많은 원망과 죄책감을 안겨주곤 하기 때문이다.

가족들을 위해 자기 자신을 존중하지 않고, 어느 것도 아끼지 않아 온 우리 어머니들의 모습처럼 뿌리 깊은 희생의 습관들이 오늘을 살아가는 한국의 워킹맘들에게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나 자신쯤은 '아무래도 좋다'는 미련하고 고단한 생각, 자신을 둘러싼 불편한 상황들을 온전하게 스스로의 힘으로는 변화시킬 수 없다는 생각, 여자이기에 혹은 엄마이기에 감당해야 한다는 가혹한 생각들이 급변하는 한국의 모든 것들과는 달리 속도를 내지 못하고 우리 모두의 발목을 잡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한국은 아직 남자와 여자 모두 역할 변화에 합리적으로 적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생각은 나만의 우려일까?

최근 언론에서는 대선을 앞두고 여성 대통령을 다루면서 '유리천장'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거론한다. '유리천장'은 이미 미국에서는 1970년에 등장한 신조어였고, 국내외 여류 작가들의 책에서는 쉽게 볼 수 있는 말이다. 우리는 정작 아침에 눈 뜨고 늦은 밤 잠을 청할 때 짓눌러 오는 안방 침대 위의 유리천장조차도 깨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한다.

이 책이 독자에게 주는 메시지는 '남자의 종말이 가까이 왔다'는 요한계시록 같은 무시무시한 예언이 아니다. 격변의 시대에 '유연한 여자'와 '뻣뻣한 남자'로 너무나 멀리 떨어져 걸어가는 우리에게 조화로운 성 역할을 어떻게 마련해 갈 것인가에 대한 공통의 과제를 공유하고자 하는 것이다. 더불어 희망적인 사실은 이 책의 출간이나 내가 낸 광고를 주목할 필요성에 대해 이제 모두가 동의한다는 점이다. 이전의 보수적인 사회에서는 이런 목소리를 내는 일 자체에 엄청난 용기와 희생이 뒤따랐고 또한 용기를 낸다고 하더라도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현재는 변화 자체를 주목해야 한다는 그 변화에서 나는 희망을 본다.

희망의 미래를 예견하는 변화

광고가 나간 후에 수많은 기획 기사들과 인터뷰 기사, 방송 특집 등이 이어지면서 혼자서 펼쳤던 야심 찬 '워킹맘 캠페인'은 한국의 '일하는 엄마'들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이끌어 냈고, 이듬해 다수의 대기업들과 관련 정부에서는 육아휴직, 보육시설 확대, 근로시간 단축 등 실질적인 제도 개선 방안들을 발표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사회적으로 작은 변화를 가져 오게끔 만들었다는 데 큰 보람을 느꼈다. 개인적으로도 보람 있는 일이었다. 집안일을 씩씩하게 척척 해내는 '전형적인 아내와 며느리의 모습', 부족함 없이 최고의 교육을 책임지는 '아이 엄마로서의 모습' 만으로 나를 기대했던 남편이 이제는 자신이 회사에서 함께 배려하며 일하고 있는 동료들과 같은 생각으로 대화하고, 부부로써 팀워크를 이루고자 노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캠페인을 펼치는 동안 알게 된 것이지만, 우리나라도 이미 생계형 워킹맘들을 위한 좋은 행정적인 시스템을 가동하고는 있었다. 그러나 그녀들을 고용하고 있는 기업들과 가장 가까운 가족들이 함께 변화해 시너지를 이루어 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워킹맘들의 무거운 어깨의 짐을 조금도 줄지 않는 듯하다. 우리 주변의 많은 워킹맘들은 누구나 다 어느 정도의 어려움과 내적인 장애물을 갖고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그녀들이 어려운 사회 구조와 가치관 속에서 '변화'를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지 조금쯤의 관심은 필요하지 않은가.

한국의 여성은 <남자의 종말>에서 보여주는 것보다 조금 더 느린 변화의 파도 속에 산다. 우리는 여전히 급변하는 경쟁적인 세상에서 유연하게 머뭇거리지 않고 걸어가야 할 강한 어머니를 권유받고 있다. 남자들은 자신들이 오랫동안 지녀온 권력을 쉽게 내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수록 벼랑 끝에 몰리는 사람은 다름 아닌 남자가 될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여성이자 어쩔 수 없는 엄마로서 일관되게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떠올리고, 염려할 수밖에 없었다. 내 아이 역시 가까운 미래에 해나 로진이 이야기하는 '역전의 시대'에 온전히 놓이게 될 것이다. 나는 나의 아들이 '유연한 여자'들로부터 제거될 수도 있는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의 '뻣뻣한 남자'로 성장하지 않길 바란다. 따라서 아들이 두 손에 공감(Empathy)을 기반으로 한 '사회 지능'과 '유연함'이라는 건강한 도구를 지니고 세상을 향한 크고 작은 도전들을 할 수 있으며 성별을 떠나 모두와 조화롭게 살 수 있도록 현명한 조력자로 늘 곁에 있어 주고 싶다. 이것은 부모라면 누구나 바라는 소망일 것이다. 아직까지 이 사회에서 '어머니'로 사는 일은 그리 녹록치 않은 일이지만 원한다면 영원히 은퇴하지 않아도 되는 행복하고 가치 있는 일이라는 점을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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