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그가 만들어낸 혁명은 너무나도 혁신적인 나머지,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분야에서 일어나는 큰 변화들을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 불린다. 여기저기에서 너무 흔하게 쓰는 나머지 오히려 좀 지겹게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다시 '혁명'이란 단어를 떼어내 보자. 우리는 코페르니쿠스라는 사람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을까? 심지어 천문학을 전공하고 있는 나에게조차 이런 지동설과 천동설을 빼고서 그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그러면서도 <코페르니쿠스의 연구실>(데이바 소벨 지음, 장석봉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펴냄)이라는 이 책의 제목을 처음 봤을 때, 또 흔한 코페르니쿠스 혁명 이야기일거야, 라고 치부했던 건 너무나도 오만한 생각이었다. 나는 코페르니쿠스도, 심지어는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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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페르니쿠스의 연구실>(데이바 소벨 지음, 장석봉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웅진지식하우스 |
"인간의 선천적인 재능을 키워주는 많고도 다양한 문학과 예술적인 학문들 중에서 지식의 가치가 매우 크고 아름다운 것들을 다루는 학문이야말로 우리가 애정 어린 관심으로 받아들이고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성한 천체의 원운동과 별의 경로를 밝혀서 결국에는 우주 전체의 형태를 설명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학문이 될 것이다." (<코페루니쿠스의 연구실> 27쪽)
마지막으로 이탈리아에서 유학 생활을 마치고 고향 폴란드로 들어온 그는 이후 의사이자, 천문학자로 활동하면서 또한 외삼촌을 따라 참사회원의 역할을 수행하게 됐다. 우주의 형태를 밝히고 싶어 하는 천문학자에게 의사 일에 참사회원직까지 수행하는 것은 상당히 고달픈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일들마저도 매우 성실하게 수행했다. 그 업무가 그에게는 생계 수단이었고, 천문학을 계속 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어줬다. 그렇게 그는 계속 밤하늘의 행성들을 관찰하며 새로운 우주의 체계를 구축해나갔다.
"1514년 봄, 참사회의 재산이 재분배된 덕분에 코페르니쿠스는 성당 단지 안에 숙소를 구입했다. 그는 성당 밖에 있는 자신의 땅과 파비멘툼(관측대)을 굳건히 유지하는 한편으로 요새 벽 밖 모퉁이에 널찍한 3층짜리 탑을 175마르크를 주고 구입했다. 그 탑에는 부엌과 하인 방이 있었다. 꼭대기 층에는 아홉 개의 창을 통해 햇빛이 들어왔고 전망도 좋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의 중정 발판대에서 별을 관측하는 일을 더 좋아했다. 그는 잠잘 시간도 아껴가며 그곳에 서서 별을 보았다." (53쪽)
그렇게 열심히 만들고 정성을 들였을 관측소와 처소는 얼마 있지 않아 독일 기사대의 공격으로 폐허로 변하고 만다. 그가 느꼈을 좌절감은 이루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 후 피난길에 올랐다가 평화를 찾은 다음 다시 고향에 돌아왔지만, 이제 그는 새로이 주교가 된 단티스쿠스로부터의 사생활에 대한 정치적 공세를 감당해야만 했다. 하늘만 바라보기에도 시간이 모자랐을 그에게 분명 이러한 시간들은 여러모로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우주에 대한 새로운 체계를 정리한 책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의 집필을 마쳤다. 하지만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사실상 1535년에 이 책이 완성되자 코페르니쿠스는 용기를 잃었다. 그는 공들인 계산과 표들이 목표했던 만큼 행성들의 위치와 완벽하게 들어맞지 않을까 봐 걱정했다. 대중의 반응도 두려웠다. 그는 자신의 기막히게 멋진 생각들을 일가나 친구들에게만, 그것도 글로 전한 것이 아니라 입으로만 전했던 고대의 현자 피타고라스에 공감했다. 수십 년 동안이나 공들여 집필했으면서도 그는 출판을 꺼려했다. 그는 자신의 이론이 인쇄되어 나온다면, 무대에서 웃음거리가 될 거라고까지 말했다." (103쪽)
어쩌면 하늘의 뜻이었을까. 그가 공들여 집필한 책을 포기하려는 찰나 레티쿠스라는 젊은 학자를 만나게 된다. 그는 코페르니쿠스가 새로운 우주관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 체계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어 했다. 그리고 지구가 돈다는 충격적인 이론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 체계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역시 누구나 그 새로운 체계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당시 이름을 떨치던 종교 개혁가 마틴 루터는 레티쿠스로부터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니 말이다.
"현명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자는 다른 이들이 높이 평가하는 것에 동의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스스로 지닌 무엇인가를 해야 합니다. 이것이 천문학 전체를 뒤집으려고 하는 그 친구가 하려는 일입니다. 비록 무질서로 치닫는 이런 일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성서를 믿습니다. 여호수아가 땅이 아닌 태양에게 머물러 있으라고 명령한 그 구절을요." (278~279쪽)
그러나 레티쿠스는 달랐다. 그는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를 믿었고, 그의 책을 인쇄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그리고 그 노력 끝에 결국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는 세상에 선보이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책의 완성과 함께 코페르니쿠스가 노환으로 사망하면서, 그는 그 책의 내용에 대해 세상의 평가를 직접 들을 기회를 얻지는 못했다. 하지만 책은 남았다. 그의 책은 세상으로 널리 퍼져, 행성의 운동 법칙을 발견한 케플러, 그리고 최초로 망원경을 이용해 천체를 보았던 갈릴레이 등에게 전해졌다. 이들은 지동설이라는 새로운 우주론을 받아들인 것뿐만 아니라, 지동설을 자연과학의 일부로 완성해나갔다. 그리고 또 다른 대가들의 손을 거치면서 이제는 그 누구도 지동설을 부인하지 않는다.
이 책 <코페르니쿠스의 연구실>에 나온 이야기들은 나에겐 상당히 낯설었다. 중세의 복잡한 역사를 비롯해 그들이 살아가던 생활상도 익숙하지 않았다. 그 낯선 기록들을 따라가는 과정은 쉽지만은 않아서, 책을 보던 중간마다 책 맨 앞으로 가서 거기에 그려진 중세시대 지도를 참고해야만 했다. 하지만 저자는 친절하면서도 진중하게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긴 여정을 따라간 끝에 마침내 코페르니쿠스의 책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가 출판되는 순간 나는 왠지 모를 희열을 느꼈다. 그렇게나 어렵게 역사가 이루어 졌다니. 내가 이토록 무지했다니.
코페르니쿠스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우주의 중심에서 바깥으로 옮겨놓은 이후, 인류는 그 우주의 중심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20세기 초반 천문학자들은 태양의 위치와 우주의 크기에 대한 다양한 논쟁을 벌였다. 네덜란드 천문학자 캡타인은 태양이 우리 은하의 중심부에 위치한다고 생각했고, 미국의 천문학자 섀플리는 태양이 우리 은하의 변두리에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1920년에는 섀플리와 또 다른 미국 천문학자인 커티스가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의 크기에 대한 논쟁을 벌였다. 섀플리는 우리 은하가 우주의 전부라고 주장했고, 커티스는 우리 은하 바깥에도 은하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현재는 그 누구도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태양이 우리 은하의 중심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우리 은하가 유일한 은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 이제 우리 인류는 과연 세계의 중심에서 충분히 멀어졌을까? 지구와 같은 행성은 하나뿐일까? 지능을 갖고 있는 생명체는 오로지 지구에만 존재할까?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는 정말 하나뿐일까? 분명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통해 다시 한 번 코페르니쿠스를 만나보는 것은 현대인에게 좋은 환기점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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