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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와 행복 대신 패배와 고통을 기억하라!

[프레시안 books] 박구용의 <부정의 역사철학>

1.
박구용 교수(전남대 철학과)의 책 <부정의 역사철학>(길출판사 펴냄)을 대하고 감회가 새로웠다. 왜냐하면 그 동안 시대에 따라 역사에 대한 관심이 부침하여 왔다는 것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1980년대 말까지만 해도 역사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은 지대했다. 일반인들은 은근히 역사가 신을 대신하여 정의를 실현할 것이라고 믿었다. 이 시대에는 역사를 이해하려는 많은 연구들이 출현했으며 역사를 둘러싼 논쟁도 활발하게 일어났다.

그런데 1990년대 이후 구조주의가 등장하고 이어 포스트모더니즘이 만연하면서 일반인들의 역사에 대한 관심도 많이 퇴조했다. 이제 역사는 그저 기이한 골동품들처럼 호기심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일제 강점기에도 '모던 뽀이'들은 커피를 즐겼다더라. 조선 시대에도 남편이 아내에게 애정 어린 편지를 썼다더라 등등. 일반인들의 관심을 받았던 역사 연구로서는 이런 기담(奇談)으로서 역사를 넘어서지 못했다.

역사에 대한 관심이 사라진 가운데 과거의 유령들이 새로운 옷으로 치장하고 등장했다. 일제가 우리의 근대화를 이루어주었다든가, 이승만과 박정희가 민주화의 선구자라든가 하는 정말 어이없는 역사적 주장들이 세간의 관심을 끌면서 사람들의 역사의식을 혼탁하게 만들었다. 이런 주장들이 어떻게 재생산되는지,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지는 조중동 사이비 언론들을 펼쳐본다면 금방이라도 드러나게 된다. 역사의식이 이렇게 혼탁하게 된 단적인 결과가 박정희 정권의 부활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로써 박정희의 등장 이후 30년간에 걸친 고난에 찬 민주화 운동이 수포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2.
▲ <부정의 역사철학>(박구용 지음, 길출판사 펴냄). ⓒ길출판사
역사가 다시 진지한 시대적 관심사로 떠오르고 올바른 역사적 연구가 사이비를 몰아내야 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는데, 마침 박구용 교수의 책 <부정의 역사철학>이 등장하니 필자로서는 여간 반가운 마음이 아니었다. 박구용 교수 역시 필자와 동일한 마음이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그러기에 그는 이 책의 부제를 '역사상실에 맞선 철학적 도전'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한다. 그가 '역사상실'이라고 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이 책에서 직접적인 언급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 책의 마지막 9장 '바깥으로(에서)의 역사'에서 니체의 비역사주의를 비판하는 데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니체야말로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의 조종이기 때문이니 말이다.

박구용 교수의 니체 비판은 니체의 비역사주의 또는 초역사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박구용 교수의 주장을 간단히 전하자면, 니체는 19세기 역사주의자들의 역사의식의 과잉을 비판한다고 한다. 19세기 역사주의자라면 독일에서 등장한 역사주의자를 말할 것이다. 헤르더로부터 시작한 이 흐름은 헤겔과 마르크스의 역사철학으로 이어지고, 딜타이의 역사 철학으로 전개되었다 하겠는데, 구조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이 선전포고했던 대상 역시 이 흐름이었다고 보겠다.

니체에 따르면 역사주의자들은 역사의식의 과잉으로 인해 도덕적 가치나 이상적 목적이 역사를 지배하고 있다고 보면서, 그 결과 자신의 삶에의 의지를 가치와 목적에 종속시키게 된다고 한다. 그 결과 그들은 선악을 넘어선 삶에의 의지를 발휘하지 못하며, 미래의 중압 속에서 현재를 즐기지 못하고, 궁극적 가치와 목적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에 죄의식을 느끼면서 패배주의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니체는 비역사주의 또는 초역사주의를 주장한다. 비역사주의란 역사의식의 탈피를 주장하며, 반면 초역사주의란 역사를 넘어선 메시아적인 해방을 기대하는 입장이다. 니체는 이런 입장들이 "역사적인 것이 너무 무성해져 삶을 뒤덮는 것을, 즉 역사의 병을 막는 자연적인 해독제다"(니체, <반시대적 고찰>, 290쪽, 위의 책, 재인용, 397쪽)라고 말한다.

3.
이렇게 니체적인 역사상실을 비판한다 하더라도 박구용 교수가 전통적인 역사주의로 되돌아가자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에 의한 역사주의 비판의 세례를 받은 이후의 학자로서 이렇게 순진한 역사주의로 다시 되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닐까? 그렇기에 박구용 교수는 역사에 대한 새로운 철학적 관점을 세우려 한다.

역사상실에 대한 그의 철학적 도전은 이 저서에서 핵심적인 개념, 곧 '부정의 역사철학'이라는 개념으로 집약된다고 하겠다. 부정이란 상당히 형이상학적인 개념이므로, 이 개념이 무슨 뜻인가 그렇게 간단하게 이해되지는 않지만 박구용 교수의 말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고개를 끄덕거리게 된다.

박구용 교수는 우선 이 책에서 서양의 역사철학에서 등장한 다양한 역사의 개념을 4가지로 정리한다. 이 4가지는 곧 사실로서의 역사와 이념으로서의 역사, 소통으로서의 역사와 바깥으로의 역사이다. 그는 이런 4가지 개념들 가운데 어떤 것을 역사에 관한 최고, 결정적인 개념으로서 선택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이 4가지 역사의 개념들을 새로운 판짜기 속에 배치해야 한다고 보는데, 이런 새로운 판짜기를 위해 제안하는 이론이 곧 '다층적 역사비판 이론'이다.

그의 입장은 책 마지막 9장에 간단히 요약되어 있다. 이를 소개하자면 이렇다. 즉 사실로서의 역사(실증주의)와 이념으로서의 역사(역사주의)는 서로 경쟁적이지만 공존의 관계에 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역사 개념의 관계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소통하는 주체라는 관점, 즉 '서로주체'의 관점에 서서 역사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박구용 교수의 입장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사실로서의 역사, 이념으로서의 역사, 그리고 소통으로서 역사는 모두 바깥으로의 역사를 전제로 한다. 사실에 있어서는 실재적 사건과 부재하는 사건 사이의 간극이 부정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념이 요청된다. 그리고 관계들의 총체로서 이념은 이미 자기를 넘어선 다른 이념을 수용하여 다수화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소통이 요구된다.

그런데 소통의 역사에서는 바깥이라는 개념이 중요하다. 소통이란 곧 '나' 개인도 아니고 '우리'라는 전체도 아닌 '나'와 '너' 사이의 존재로서 '서로주체'의 관계이다. 이 '서로주체'에서 '나'로 이루어진 '우리'는 이미 타자로서 '너'를 포함하며, '너'로 이루어진 다른 '우리' 역시 타자로서 '나'를 포함한다. 그러므로 '서로주체'에서는 복수의 공동체가 존재하면서 이 공동체가 서로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다. 바로 이런 관계가 '바깥으로(에서)'라는 관계이다. 박구용 교수는 이런 '서로주체'를 '따로 또 함께'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박구용 교수의 새로운 판짜기는 약간 복잡하지만 그 핵심은 곧 '나'와 '너'가 서로 타자로서 만나는 '서로주체'의 관점에서 역사를 본다는 것이라 하겠다. 바깥으로(에서)의 역사라는 개념이 사실로서의 역사, 이념으로서의 역사, 소통으로서의 역사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이렇게 '서로주체'의 관점에서 역사를 볼 때, 역사연구에서 강조되는 것은 무엇인가? 박구용 교수는 이에 대해 이 책의 '서문'에서 간단하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역사가 타자를 배제, 감금, 억압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인 장치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승리보다 패배에, 기쁨보다 슬픔에, 행복보다 고통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위의 책, 28쪽)

물론 패배, 슬픔, 고통은 기록되지 않는다. 그것은 역사 속에 부재하며, 그렇기에 무의식적 기억의 흔적으로만 남아있다. 역사는 이 무의식적 기억을 발굴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 무의식적 기억은 항상 그 앞에서 굴복하거나 도주하는 것과 같은 왜곡된 반응만을 남기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제 기억되어야 하며 이 기억은 단순한 반복적 기억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것은 이제 이야기되어야 한다. 이렇게 이야기되는 가운데 패배와 슬픔, 고통은 새로운 역사의 거름이 된다. 그것은 결코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그 때문에 체념하는 것도, 그리고 복구나 응징하는 것도 아니라 한다. 이런 이야기는 결국 바람직한 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극복의 시도라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을 재구성하면서 그 토대로 이념을 요청하지만, 이 이념화는 역사 속의 일정한 주체만을 위한 정당화나 의미의 왜곡을 야기할 수도 있다. 이 이념은 박구용 교수에 의하면 사실을 조각내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라는 "역사의 씨앗에서 생명의 살과 줄기가 돋아나는"(위의 책, 35쪽) 방식으로 사실과 관계 맺어야 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역사적 이야기화의 전제로서 서로 바깥으로 만나는 소통의 주체가 필요하다. 이런 역사의 소통의 주체는 역사 속의 가해자와 피해자의 사이의 시선이며, 역사 속의 인물의 부름에 응답하는 역사 서술가의 시선이기도 한다.

4.
고통을 기억하며, 이를 이야기하고, 서로 바깥으로 만나는 소통의 관점에서 서려는 박구용 교수의 바깥으로(에서)의 역사 개념은 과연 깊이 있고 체계적이며 참신하다. 그렇기에 필자는 이에 대해 깊은 흥미를 느꼈으며 그런 개념이 과연 역사의 연구에 실제로 어떻게 적용되는가에 대해서는 무척 궁금했다. 박구용 교수는 이 책에서 바깥으로의 역사라는 입각점에서 볼 때 동학농민전쟁, 3.1 운동, 5.18 민중항쟁, 6월 항쟁 등의 역사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지니고 실제 이를 연구한 바 있다고 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책에서 그런 연구에 대한 구체적인 소개를 발견할 수는 없었다. 아마 나중에 따로 출판될 것으로 기대한다.

다만 이 책의 '서문'에 간략하게 이런 역사들에 대한 평가가 소개되어 있는데, 그저 간략한 평가에 그치는 것이어서 이것만 가지고서는 그 전모를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부분에 대해 서평에서 언급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총평에 대해 약간의 의아심이 있어 이 부분을 빼놓는다는 것은 독자에게 미안한 일이라 여겨져서 마지막으로 공개적 질문을 던진 채 서평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박구용 교수의 평가는 이렇다. 즉 앞에서 언급된 우리나라의 역사에 관해서 지배담론이나 저항담론은 모두 자신의 입각점에서 볼 때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전자는 경제발전을 통해 역사를 보며 후자는 민주화를 통해 역사를 본다. 그것은 각각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주체로 삼는다. 그러나 서로 바깥으로 만나는 서로주체의 관점에서 볼 때 경제발전 담론과 민주화 담론은 하나이다. 그것은 모두 "안팎의 지배와 수탈에 맞서 한국 민중이 저항하며 쌓아온 역사"(위의 책, 36쪽)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런 관점에서 세계화 선진화 담론과 지역화를 향한 진보 담론 역시 하나라고 말한다.

앞에서 '서로주체', 또는 '바깥으로의 역사'에서 역사를 보기 위해서 고통과 슬픔, 패배를 먼저 기억해야 한다고 했는데, 이런 역사의 관점이 산업발전과 민주화, 그리고 지역화와 세계화를 모두 아우르는 것으로 충분한 것일까? 박구용 교수에게 묻고 싶다. 그런 아우르는 관점이란 너무 기계적인 종합에 속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과연 박구용 교수가 원하는 바깥으로(에서)의 역사적 관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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