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books' 138호는 '아까운 책' 특집호로 꾸몄습니다. 지난해 가치에 비해 주목받지 못하고 우리 곁을 스쳐가 버린 숨은 명저를 발굴해 소개합니다. 다양한 분야 열두 명의 필자가 심사숙고 끝에 고른 책은 무엇일까요? 여러분도 함께 '나만의 아까운 책'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이 작업은 출판사 부키와 공동으로 진행했습니다. 여기 공개되는 원고를 포함해 총 47편의 서평이 실리는 단행본 <아까운 책 2013>이 오는 5월 초 부키에서 발간됩니다. <편집자> |
몇 해 전, 한 국제 문학제의 행사를 준비하면서 몽골 시인을 만난 적이 있었다. 몽골에서 아주 유명한 시인이라고 듣기는 했지만, 통역을 맡은 몽골인 유학생이 실제 그 시인을 만나더니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광경이라 그 학생에게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몽골에서는 시 낭송 대회(설명을 들어보니 단순히 낭송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랩 배틀'처럼 여러 명이 등장해서 우열을 다투는 형식인 것 같았다)도 곳곳에서 열리며, 유명한 시 낭송들은 음악 파일처럼 휴대 기기에 넣어서 듣고 다닐 정도로 시문학이 일상생활 속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 문학의 위상과는 사뭇 다른 설명에 놀라기는 했지만 실감이 나지 않은 것도 물론이었다.
행사 당일, 여러 나라의 작가들이 미리 작성해온 원고들을 발표하고 또 미리 준비해둔 질문에 답을 하면서 여느 문학 행사와 다름없는 시간들이 지나고 있었다. 그런데 유독 몽골 시인만이 뭔가 답답해하는 듯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순서의 마지막 즈음 시인이 갑자기 예정에도 없던 시 낭송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통역을 맡은 학생이 시는 자신이 제대로 의미를 전달할 수 없다며 난색을 표명했음에도, 시인은 문제가 없다면서 그냥 통역 없이 들어달라고 말하더니 이내 낭송을 시작했다.
시인의 낭송을 듣고 난 느낌을 글로 전달하기는 힘들 것 같다. 다만 거기 있던 사람들 모두 그 순간만큼은 분명히 한 마음이었다는 것, 그리고 낭송이 끝난 후 그날의 행사를 통틀어 가장 큰 소리로 진심이 담긴 박수가 터져 나왔다는 것만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작품의 내용이나 자세한 의미는 물론 알 수 없었지만, 진심을 담아 진지하고 생명력 넘치게 시를 낭송하던 시인의 목소리나 몸동작 하나하나는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것은 분명히 글에 적혀진 의미 전달을 넘어 살아 숨 쉬는 문학을 공유하던 찰나의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 <조드>(전 2권, 김형수 지음, 자음과모음 펴냄). ⓒ자음과모음 |
칭기스칸이라는 인물이야 모르는 사람이 없겠지만 이 소설은 오히려 우리가 알고 있는 대제국을 건설한 정복자가 되기 이전의 이야기, 말하자면 칭기스칸의 성장기가 중심이다. 그래서인지 머릿속에 선입관처럼 가지고 있던 칭기스칸과 몽골 제국에 대한 미약한 정보는 오히려 읽는 내내 걸림돌이 될 뿐이었다. 이 소설에서 칭기스칸은 비범하긴 하나 아직 어리고 세력도 보잘 것 없으며, 몽골은 여전히 부족 단위로 흩어져 사소한 원한관계로 다투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받아들이기 힘든 이 이야기가 어째서 우리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일이 가능한 걸까?
인간 사고의 특징을 방향성으로 구분할 수 있다면 크게 외부지향적인 측면과 내부지향적인 측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나'가 아닌 것에 관심을 기울이는 외부지향적 사고가 마침내 인간의 발자국을 달 표면에 남기는 데에까지 이르렀다면, '나'의 근원에 대한 내부지향적 탐구는 우주의 끝을 향하는 보이저1호에 실릴 메시지에 음악을 포함시키는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이때 기술과 예술의 우위를 논할 수는 없겠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상상력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어떤 현상의 근원에 대한 기술적 탐구가 결국 인간 내면에 대한 근본적 성찰로 이어지는 일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인간의 사고능력은 한쪽 방향으로만 작동된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인간이 이루어 낸 결과물들이 오히려 상상력을 가두거나 축소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결코 예술이라고 부르지는 못할 것이다. 또한 우리가 예술적 상상력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대단한 기술적 진보도 지금의 우리가 처한 상황처럼 결국에는 인류 스스로를 위협하는 재앙으로 전락해버리고 말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러한 상상력의 부족으로 인한 재앙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리 낯선 일이 아니기에 <조드>를 읽는 시간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가령 나는 우리 사회에서 어떤 정책이 생겨날 때 그 혜택을 누리고 살아가야 할 시민들의 상상력이 고려된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것의 실질적인 성과를 평가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또 나는 그럴 능력도 없다. 다만 어떤 정책이 생겨날 때 그것이 지향하는 목표와 정확히 같은 크기의 상상력을 시민들에게서 빼앗아 오는 식으로 효과를 거두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최근 언론에 많이 등장하는 '국민행복기금'이라는 말이 결국 '행복'이라는 단어가 상상하는 범위를 최대한 차압하면서 '국민'에게 '빚만 없으면 행복'이라는 것을 강제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아직까지도 자식의 성공을 위한 방편으로 '위장전입'에 매달리는 정책 입안자들이 있는 사회에서 상상력을 발휘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조드>는 최근 우리 문학에서 보기 드물게 바로 이러한 현실을 뛰어넘는 예술적 상상력이 거침없이 발현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소설 전편을 통해 최대한의 상상력을 동원함으로써 독자의 상상력과 만나는 접면을 무한정으로 확장하고 있다. 그렇게 본다면 한반도-그나마도 반으로 잘려나간-를 벗어나 중앙아시아의 광활한 초원을 소설의 배경으로 삼은 것도, 그리고 주인공을 칭기스칸으로 내세운 것도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동시에 역사에 기록된 칭기스칸의 이야기보다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주인공의 신화적 면모를 적극적으로 그려낸 것 역시 독자들을 영토의 크기에 국한된 편협한 역사의식에서 벗어나 '인간의 역사' 그 자체에 대해 각성할 수 있게 해준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몽골 시인이 자신의 진심을 통해, 기표에 얽매여 있던 우리들을 천편일률적인 감동에서 벗어나 '문학적인 것' 자체에 공감을 할 수 있게 해준 것처럼 자주 접하기 힘든 신비한 경험이다.
물론 '있을 법한 이야기를 꾸며낸 이야기'라는 익히 알려진 정의에 드러나 있듯이, 소설은 태생적으로 상상력을 기반으로 한다. 이와 동시에 역사에 대한 강한 매혹을 숨기지 않는다. 어찌 보면 역사를 충실히 옮겨놓는 것만으로도 일단 소설의 기본 이상을 오롯이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설이 역사를 전부 꾸며낼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역사를 접하면서도 그 속에 감추어진 무수한 이야기들을 꿈꾸지만, 또 한편으로 소설을 뛰어넘는 역사적 진실을 추구한다. 따라서 다시 한 번 말하자면, 중요한 것은 상상력이다. 우리가 사실 그대로 역사의 맨 얼굴을 만날 때보다 소설을 통해서 만날 때 종종 더 큰 감동을 경험하게 되는 이유 역시 상상력과 관련이 있다. 역사를 관통한 문학적 상상력이 결국 그 시간들에 담겨 있는 모든 이야기들을 그 순간들과 똑같은 크기와 정도를 가진 하나의 이야기로 우리 앞에 펼쳐놓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김형수의 <조드>에 매혹당하는 이 순간은 문학이 가지고 있는 절대적인 쾌감도 아니고, 역사적 진실을 발견하는 데서 오는 전율도 아니다. 그것은 사실적 정보들을 예술적 상상력으로 처리하는 방식에서 오는 쾌감이며, 미처 언어를 갖기 이전부터 동굴에 그림을 그려 넣던 인류의 본성에 내재해 있는 전율과 맞닿아 있다.
<조드>가 이처럼 몽골의 과거모습을 통해 인간의 근원적인 상상력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다면, 전성태의 <늑대>(창비 펴냄)는 그 반대의 입장에서 현재의 몽골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들을 보여주고 있다. 한때는 '늑대를 섬기는 부족'이었으나 이제는 늑대 사냥 가이드로 살아가고 있는 칭기스칸 후예들의 모습은 결국 살기 위해 스스로 상상력을 내주었으나 결국 현실에도 뿌리내리지 못한 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과 징그럽게도 닮아 있다. 이상과 현실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는 체 게바라의 말은 그 자체가 너무나 이상적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조드>와 <늑대> 두 권을 같이 읽고 나면 그의 가슴에 담겨 있던 인간에 대한 사랑과 희망이 어떤 것인지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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