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마르크스와 '우파 그녀'가 만화에서 대격돌?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마르크스와 '우파 그녀'가 만화에서 대격돌?

[프레시안 books] <만화로 보는 지상 최대의 철학 쑈>

"학교 교육이 계급을 정해. 운동을 잘 못하면 농부가 되어 생필품을 만들어야 하지. 운동을 잘해도 수학을 못하면 군대에 가야해. 하지만 운동도 수학도 잘하면 지배계급의 일원이 되어서 국가를 이끌어 가야 돼."

<만화로 보는 지상 최대의 철학 쑈>(프레드 반렌트 지음, 라이언 던레비 그림, 최영석 옮김, 다른 펴냄)에서 플라톤을 설명하는 대목이다. 플라톤이 생각한 이상적인 국가에서는 교육 정도에 따라 신분의 차별이 생긴다. 얼추 보면, 학벌이 사회적 지위를 가르는 우리 현실과 닮아 보인다. 하지만 '지배계급의 일원이 된 그들'이 배우는 것은 우리와 다르다.

플라톤 나라의 지배계급은 '철학'을 배운다. 무엇이 진정 올곧고 바람직한 것인지 알기 위해서다. 나아가 이들은 그 어떤 사유재산도 가질 수 없으며 공동생활을 해야 한다. '자칫 생길지도 모르는 타락을 막기 위해서'이다.

반면, 자본주의 사회의 엘리트들은 어떤가? 지배층들에게 도덕과 가치를 다루는 학문은 인기가 없다. 돈 놓고 돈 먹는 기술을 익히는 금융 공학과 사회의 룰(rule)을 짜며 권력을 휘두르는 법학은 우리 시대 최고 인기 학문이다. 이들이 이끌어가는 세상은 플라톤의 나라와 얼마나 다를까?

▲ <만화로 보는 지상 최대의 철학 쑈>(프레드 반렌트 지음, 라이언 던레비 그림, 최영석 옮김, 다른 펴냄). ⓒ다른
물론, 만화책인 <만화로 보는 지상 최대의 철학 쑈>는 이런 물음을 직접 던지지 않는다. 그냥 철학의 역사 전체를 친절하고 재밌게 풀어낼 뿐이다. 그럼에도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앞서와 같은 의문이 절로 떠오른다. 생각이 참 많아지는 만화책이다.

이 책은 무척 재미있다. 내용을 따라가다가 독자 혼자 '뿜게' 되는 경우도 많다. 예컨대, 에피쿠로스를 설명하는 대목을 보자.

"서로 약속을 할 줄 모르는 동물들은 끝까지 자신과 상대방에게 고통을 준다. 그들은 정의도 불의도 모른다."

에피쿠로스의 준칙(準則) 가운데 하나다. 이런 사람들은 누구일까? 만화 컷의 장면은 이렇다. 실험실 유리 상자 안에서 생쥐가 서류를 들이밀고 있다. 이를 보는 연구원은 머리를 감싸 쥐며 외친다. "세상에! 내가 변호사를 길러 냈어!" 촌철살인(寸鐵殺人)의 유머가 아닐 수 없다.

나아가, 이 책은 유명한 사상들의 추한 뒷모습도 은근히 일러준다. 토마스 제퍼슨은 미국 독립선언서에 기초를 놓은 사람이다. 그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고 외쳤다. 하지만 그가 자유롭게 사상을 궁리하며 사회 활동을 펼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역사상 가장 극악무도한 인공적인 제도'가 있었다. 노예제도 말이다. 그는 200여명의 흑인 노예들을 거느린 농장주였다.

모든 이들의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는 사람이 노예제도의 혜택 속에서 살아가다니, 모순 아닌가? 제퍼슨은 지식인답게(?) 자신의 사상을 변명하는 논리를 펼친다. 그에 따르면, "깜둥이는 사람이 아니다." 나아가, 그는 모든 갈등을 흑백 갈등으로 몰고 갔다. 오클라호마시티 연방청사 폭파범인 티머시 맥베이는 토마스 제퍼슨의 말이 적힌 티셔츠를 갖고 있었단다.

"자유라는 나무는 독재자와 애국자의 피를 마시며 자란다."

세상을 선과 악, 우월한 자와 열등한 자들의 다툼으로 설명하는 논리는 단순할뿐더러 호소력도 크다. 이 점에서 책의 지은이들은 토머스 제퍼슨을 '각종 예비 혁명가들이 쉬운 그의 철학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평가한다. 제퍼슨은 테러리즘과도 맥이 닿아 있는 셈이다.

그 뿐 아니다. 책에는 여느 철학사 서적에는 등장하지 않는 인물들이 꽤 있다. 이슬람 시인 루미, 유대교 랍비인 이사크 루리아, 여성 해방론자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철학을 펼친 에인 랜드 등등. 어떤 기준으로 이런 인물들을 넣었는지 고개가 갸웃할지도 모르겠다.

▲ 에인 랜드(Ayn Rand). ⓒnydailynews.com
하지만 만화를 따라가다 보면, 작가들이 의도했던 바가 느껴지기도 한다. 에인 랜드를 예로 들어보자. 에인 랜드는 '객관주의'를 주장했다. 그녀에 따르면, 인간은 자기 이성을 통해 세상을 객관적으로 알아내며 나름의 성취를 이룬다. 성공적인 삶이란 독창적인 생각과 창조로 성과를 일구는 것이다.

반면, '중고품 같은 영혼들의 적대감'은 창조적인 이들을 억누르고 옭아맨다. '사회의 이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라고 몰아세우는 식'이다. 예컨대, 노동자 계층은 국가를 위해 모든 이익을 헌납하라고 자본가들을 닦달한다. 부모는 예술가가 되고 싶은 아이에게 가족을 위해 의사가 되라고 야단친다. 나치는 백인종의 생존을 위해 유대인들을 가스실에 처넣으라고 외쳤으며, 어떤 종교에서는 신을 위해서 남편의 폭력을 침묵하며 견디라고 가르친다.

그렇다면 바람직한 사회란 무엇일까? 에인 랜드는 문명은 '인간이 인간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문명화된 정부의 유일한 목적은, 약탈자들이 각 개인들의 이성에서 나온 열매를 강탈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어야 한다."

에인 랜드의 주장을 들으며 무엇이 떠오르는가? 이념의 스펙트럼에서 가장 오른쪽에 서 있을 사람들도 이렇듯 강하게 가진 자들의 이익을 감싸지는 못할 듯싶다. 철학은 상식을 흔들며 당연한 믿음을 다시 따져보게 만든다. 자유와 평등, 성장과 분배 사이의 갈등은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뜨거운 감자다.

싸움이 오래되다보면, 무엇 때문에 서로 부딪혔고 왜 다투고 있는지가 잊혀버리기 십상이다. 감정에 북받쳐 상대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이 목적처럼 되어버린다. 하지만 냉정하게 한 발 물러서 생각해보자. 보수주의는 무엇을 주장하려고 하는가? 그들이 만들려고 하는 사회는 어떤 것인가? 진보 진영에서 이루려고 하는 세상은 어떤 모습인가? 무엇을 이루기 위해 그들은 기득권층을 끊임없이 흔드는가?

이 책에서는 여느 철학사에서는 결코 다루지 않을 에인 랜드 같은 인물과 카를 마르크스를 동등한 분량으로 다룬다. 훌륭한 철학 교사는 자신이 내린 결론을 학생들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좋은 생각거리를 던져 학생들 스스로 치열하게 고민하게 이끈다.

이 점에서 <만화로 보는 지상 최대의 철학 쑈>는 좋은 철학책이다. 이 책은 쉽고 재밌으리라는 만화가 주는 선입견을 깰 정도로 내용이 결코 만만치 않다. 함축성 높은 그림과 묵직한 설명글 탓에 페이지도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 하지만 이 점은 단점보다는 장점에 가깝다. 그만큼 깊고 넓게 생각하게 되는 까닭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살찐 말이 졸지 않도록 깨무는 등에(gadfly)"라고 불렀다. <만화로 보는 지상 최대의 철학 쑈>는 소크라테스 같은 책이다. 읽으면 읽을수록, 우리 현실에 대해 끊임없이 되물으며 생각을 다잡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