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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 체 게바라는 원래 '의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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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 체 게바라는 원래 '의사'였다!

[프레시안 books] 스티브 브루워의 <세상을 뒤집는 의사들>

1992년 <사회과학과 의학(Social Science and Medicine)>이라는 전문 학술지에 노르웨이 학자들이 쓴 '흥미로운' 논문 한 편이 실렸다(☞원문 바로 가기). 의사들이 전문의가 된 후 일할 지역을 어떻게 결정하는가를 분석한 것이었다.

노르웨이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데다 북쪽은 북극과 가까워 의사들이 남쪽 수도권 부근으로 몰린다. 이 나라의 공무원이나 연구자는 의사들의 지역 선택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논문의 저자들은 의사들이 비수도권에서 자리 잡고 일할 확률이 세 가지 요인에 좌우된다고 주장했다. 의사의 나이, 전공의(레지던트) 수련을 받은 지역, 배우자의 출신 지역이 그것이다. 젊고, 수련을 비수도권에서 받았으며, 배우자의 출신 지역이 비수도권일수록 지방에서 일할 확률이 높았다.(의사 자신이 아니라 배우자의 출신 지역이라니, '흥미롭지' 않은가.)

결과를 그대로 믿는다면, 비수도권에 의사를 늘리는 현실적 방법은 한 가지 밖에 없다. 나이와 배우자의 출신지는 어떻게 할 수 없으니, 더 많은 의사들이 비수도권에서 수련을 받도록 유도하는 방법만 남는다. 글쎄, 이게 가능할까 하는 질문이 생기지만, 이 정도로 하자.

의사들이 도시로 몰리는 고질적 문제를 제대로 해결한 나라는 거의 없다. 비시장적 의료체계를 가졌던 나라도 마찬가지였다. 사회주의 국가인 과거 소련이나 중국, 베트남이 그런 나라들이다. 공영 의료체계를 가졌다는 영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

시야를 넓히면 국가 사이에도 비슷한 문제가 있다. 많은 고소득 국가가 의사 과잉에 시달리는 중에도 개발도상국은 의사가 모자라 쩔쩔 맨다. 의사를 키우기 어려울 뿐 아니라 의사가 된 사람들도 더 많은 수입과 좋은 생활환경을 찾아 내 나라를 등지기 때문이다.

▲ <세상을 뒤집는 의사들>(스티브 브루워 지음, 추선영 옮김, 검둥소 펴냄). ⓒ검둥소
국내든 국제든 의사들의 '두뇌 유출'은 지금도 계속되는 보편적 현상이자 오래 된 고질병이다. 스티브 브루워가 쓴 <세상을 뒤집는 의사들>(추선영 옮김, 검둥소 펴냄)은 상식을 거스르는 사례를 촘촘하게 분석한다. 어떤 나라는 의사가 더 많이 필요한 지역에서 오히려 의사가 더 부족한 역설(영국 의사 투더 하트는 '의료의 반비례 법칙(inverse care law)'이라 불렀다) -그러나 엄연한 현실- 을 급진적으로 해결했다. 바로 쿠바와 베네수엘라 이야기다.

"2000년 쿠바에서 활동하는 의사는 6만 6000명에 달했다. 1976년 쿠바 국민 1000명당 1명꼴이던 의사가 불과 24년 만에 167명당 1명꼴로 바뀌는 극적인 변화를 이룩한 것이다. (…) 기초 보건 의료 전담반은 1990년대에 쿠바 전역의 모든 소규모 마을에 배치되었고 지역 주민으로 구성된 보건의료 도우미가 의사와 간호사의 업무를 보조했다." (87~88쪽)

"2003년 이전에는 일차 보건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암불라토리오 4400곳에 배치되어 진료한 의사가 1500명에 불과했다. 진료소는 많았지만 근무할 의사가 적었기 때문에 비어 있는 진료소가 허다했고 의사가 진료를 한다고 해도 일주일에 한두 번 방문해 진료하는 형편이었다. (…) 콘솔토리오에서 일하는 의료 인력은 쿠바의 통합 일반의 6323명과 바리오 아덴트로 1기 사업에 참여해 2년 동안 근무 지역에 살면서 가족 주치의 과정을 마친 베네수엘라 의사 1641명이었다." (124~125쪽)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국가도 마찬가지지만, 의사 개인 탓이 아니라 구조와 체계가 더 중요한 조건이 된다. 쿠바와 베네수엘라였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다는 뜻이다. 체 게바라의 말대로 "혁명을 일으키는 의사, 나아가 혁명가가 있으려면 우선 혁명이 이뤄져야" 한다.

두 나라는 혁명 이후 많은 의사를 새로 양성하거나 수입했다. 이 책은 그 가운데서도 베네수엘라에 초점을 맞추었다. 베네수엘라는 차베스 대통령이 집권하고 나서 '바리오 아덴트로'를 통해 시골의 모든 마을에서 무상으로 보건의료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정부는 먼저 국내 의사들에게 호소했지만 실제 참여한 의사는 단지(!) 29명에 지나지 않았다. 바로 이웃 나라인 쿠바가 나섰고, 엄청난 수의 의사를 파견했다. "2004년 가을 무렵에는 의사 1만 3000명이 베네수엘라 24개 주 전역"에서 활동했다.(123쪽)

이런 만큼 베네수엘라의 의료 '혁명'은 쿠바를 빼고 설명할 수 없다. 쿠바가 베네수엘라를 지원할 수 있었던 것은 충분한 수의 의사가 있었을 뿐 아니라 다른 개발도상국을 도운 경험이 풍부했기 때문이다. 쿠바에서 먼저 이루어진 혁명의 결과였다.

2008년 말 전 세계에서 활동하는 쿠바 의사는 2300명이 넘는다.(35쪽) 뿐만 아니라, 라틴아메리카 의과대학을 세워 매년 외국인 학생 약 1500명을 무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쿠바의 혁명 정신과 국제주의 정신이 "혁명의 순환"을 통해" 실천되고 있는 셈이다.(189쪽)

새로운 의사 인력 양성은 수를 늘리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의과대학에 입학하는 학생의 구성과 선발 방법을 바꾸고 또한 교육과정을 개혁했다. 쿠바 정부는 시험 성적 위주로 학생을 선발하던 과거의 제도를 폐지하고, 동료나 지역사회와 협력할 수 있는 잠재력, 모든 환자를 포용하고 그들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중요하게 고려했다.(169쪽)

베네수엘라의 새로운 의사 양성 방식은 말 그대로 혁명이라고 불러야 한다. '담장 없는 대학교'의 하나로 '지역 통합 의학교(Medicina Integral Communitaria, MIC)'를 세우고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학생을 교육한다. 2009년 차베스 대통령이 발표한 숫자로는 지역 통합 의학교에 등록한 학생이 2만 4000명이 넘는다.(182쪽)

교과과정 역시 그 어떤 나라와 비교해도 혁신적이다. 이론과 실습을 통합하고 교과목도 현실에 맞게 통합하여 가르친다. 1학년을 예로 들면, 오전에는 환자들이 있는 곳에서 현장 실습을 하고 오후에는 이에 연관된 이론 교육을 받는다. 이론 교육도 인체의 구조와 생리를 '형태생리학'이란 과목으로 통합했다. 사회의학과 관련된 내용이 강화된 것도 물론이다.

새로운 철학과 방법으로 양성된 쿠바와 베네수엘라 의사들은 이제 현장에서 일한다. 쿠바의 의사들도 그렇지만, 베네수엘라의 바리오 아덴트로에서 이들 의사들이 어떻게 활약하는지는 낯설지 않다.

"모둘로의 내부 구조는 아주 단순해서 1층에는 대기실 1곳과 진료실 2곳, 2층에는 가족 주치의 두 사람이 묵는 작은 침실 2개가 있었다. 가족 주치의는 빈민촌 주민들을 진료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 주민들과 함께 생활했다." (139쪽)

의사들의 활동은 또한 지역의 변화와 맞물려 있다. 의사 배치와 활동에 발맞추어 마을 건강 위원회가 성공적으로 정착되고 지역사회의 참여가 활성화되었다. 마을 주민들이 스스로 나서 공중보건과 위생을 개선하고 생활의 질을 향상시키는 여러 사업을 스스로 조직하기 시작했다.(143쪽)

혁명 이후 쿠바와 베네수엘라의 보건과 의료는 단편적으로나마 몇 번 소개되었다. 다른 책들에 비해 <세상을 뒤집는 의사들>은 의사에 초점을 맞춘다. 두 나라의 혁명은 새로운 의사를 기르고 보낼 수 있는 출발이 되었고, 의과대학생의 선발과 교육은 혁신되었다. 이렇게 양성된 의사들이 가장 궁벽한 농촌을 포함하여 전국 모든 곳에서 역사상 처음인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다.

쿠바와 베네수엘라의 새로운 의료는 국가가 주도하는, 말하자면 하향식 혁명의 결과다. 혁명의 자식들인 의사들이 어떻게 변화하고 발전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좌절하는지 그 내면이 궁금한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냥 궁금함을 넘어 체제의 지속 가능성 또는 새로운 의료 '혁명'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으니, 이 책의 관심과 설명이 여기에 충분치 않은 것은 못내 아쉽다.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른 사회나 국가에서 답을 찾는 것은 대체로 실패한다. 맥락과 조건이 다르다는 것이 그냥 핑계일 수만은 없다. 더구나 쿠바와 베네수엘라는 당장 교훈으로 삼기에는 예외적이다. 이들 나라의 의료를 많이 이야기하지만 늘 여행기 비슷한 느낌을 주는 이유다.

그러나 꼭 실용적이지 않아도 괜찮다. 한국 보건의료가 안고 있는 문제는 현실 그 자체보다는 막상 빈곤한 상상력에 있는지도 모른다. "소유가 아니라 존재에 초점을 맞춘 삶이라는 개념"(292쪽)이 실현되려면 어떤 건강 레짐을 만들어가야 할 것인가, 그리고 어떤 의사가 필요한가. <세상을 뒤집는 의사들>이 불러일으키는 상상을 경계 너머까지 밀고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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