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왕수쩡 지음, 나진희·황선영 옮김, 글항아리 펴냄)은 무려 997쪽에 달하는 방대한 저작이다. 독서를 전업으로 하다시피하는 필자지만 1000쪽에 가까운 대작을 읽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원작 내용이 워낙 흥미진진하며 생동감이 있고 유려한 문체로 되어있으며, 번역이 잘 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때문에 읽는데 별로 부담이 되지 않았고, 책을 한번 잡으니 술술 읽혔다.
▲ <한국전쟁>(왕수쩡 지음, 나진희·황선영 옮김, 글항아리 펴냄). ⓒ글항아리 |
<한국전쟁>은 서론격인 '시작하는 말 - 오래된 명제'로부터 제1장 '전쟁의 발발과 미국의 개입', 제2장 '운산전투 - 중국군과 미군의 첫 번째 육박전', 제3장 '38군 만세!', 제4장 '메리 크리스마스!', 제5장 '리지웨이, 중국군 총사령관에게 안부를 전하다', 제6장 '피로 물든 한강', 제7장 '누가 승기를 잡을 것인가', 맺는말 '오색나비가 뒤섞여 날아오르는 듯한 환각' 등 총 9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차례만 보아도 이 책의 주된 서술 내용이 중국군의 참전과 미군과의 전쟁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2.
저자 왕수쩡은 중국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모옌이 "중국 역사 논픽션의 새로운 글쓰기 형식을 만들어 냈다"라고 극찬할 만큼 유명하면서도 역량을 갖춘 작가로 알려졌다. 특히 필자가 지난 7월 초 중국 동북지방을 여행하면서 만난 조선족 동포는 중국에서 유명한 전쟁사 작가 두 사람 중 한 사람으로 왕수쩡을 들만큼 중국에서는 잘 알려진 작가라고 한다.
이 책은 훙쉐즈(洪學智), <중국이 본 한국전쟁 : 중국인민지원군 부사령관 홍학지의 전쟁 회고록>(홍학지 지음, 홍인표 옮김, 한국학술정보 펴냄)과 미국 기자 데이비드 핼버스탬(전 뉴욕타임스 베트남 주재 특파원)이 쓴 <콜디스트 윈터>(정윤미 옮김, 살림 펴냄)와 대비하면서 읽으면 한층 더 유익하며 좀더 객관적인 평가가 가능하다고 본다.
마침 필자가 지난 7월 초 중국 칭다오(靑島)를 방문했을 때 공항 구내서점에 <콜디스트 윈터>가 중국어로 번역되어 있어 구입하였다. 살펴보니 大衛 哈伯斯塔姆(David Halberstam) 저,<最寒冷的冬天 - 美國人眼中的朝鮮戰爭>이란 제목으로 2010년 번역 출판되었다(王祖寧·劉寅龍 譯, 徐進 審校, 重慶 : 重慶出版社). 그런데 놀랍게도 2010년 11월 초판이 발간된 이후 2013년 2월 제21차 인쇄를 했다고 출판사항에 인쇄되어 있었다. 그만큼 중국인들이 한국전쟁에 대한 관심이 크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3.
필자는 <한국전쟁>을 읽으면서 그동안 우리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과 흥미 있는 일화, 전쟁에 참가한 개개인의 생생한 움직임, 국제적 동향까지도 실감나게 느낄 수 있어 매우 유익했다. 특히 중국은 물론 미국과 한국, 일본에서 나온 각종 자료와 보고서, 전사 관련 문헌들을 참고하여 당시 국제정세와 한반도를 둘러싼 4대 강국 및 열강 등의 움직임을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의 한계도 보인다. 우선 6.25전쟁의 당사자인 한국과 북한, 그리고 한국군과 북한군의 동향이나 관련 서술이 부수적이거나 거의 없다는 문제점이다. 저자 왕수쩡의 입장에서 볼 때 '한국전쟁'은 어디까지나 '정의로운' 명분에 서있는 중국인민지원군이 압도적 우위를 자랑하고 오만한 미군과 미국의 한반도 및 타이완, 아시아 침략에 맞서 싸운 영광스러운 전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서술은 2000년대 초반 중국 역사교과서의 서술 내용과 기조를 같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전쟁>은 6.25전쟁에서 한국군이 정말 형편없고, 무능하며, 오합지졸이며, 패주만 하는 군대로 묘사하고 있다. 아마도 이 내용은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과연 이 책의 서술이 사실인지 의심도 들었다. 우리는 지금까지는 매우 어려운 조건에서도 영웅적으로 분투하며 용맹하게 적과 싸우는 한국군을 그려왔던 것이다.
정말 가슴아프며 속쓰린 서술 내용도 적지 않다. 대표적 예로 이승만정부와 한국국민들의 정전협정 반대와 관련된 서술을 찾아볼 수 있다.
교전 쌍방이 협상을 개시하는 협정에 서명한 뒤로 거의 잊혀지다시피 한 한국정부는 씻을 수 없는 모욕을 입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중략) 이 정부를 거들떠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전쟁은 이 정부의 영토에서 진행되고 있었지만, 이 정부는 전쟁에서 아무런 실권도 없었다. (964~965쪽)
마치 임진왜란 상황, 혹은 1904~1905년 당시 당사자인 우리는 빼놓은 채 중국과 일본, 러시아가 한반도를 분할하자는 논의를 했던 상황을 연상케 하는 내용이다.
▲ <폭격>(김태우 지음, 창비 펴냄). ⓒ창비 |
하지만 저자 왕수쩡은 이처럼 압도적인 화력과 우세한 장비, 오만한 자신감으로 충만한 맥아더 사령관,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친 막강 미군도 헐벗고 굶주리며 열악한 장비로 무장한 채 '정의로운 전쟁'이란 명분과 엄격한 규율, 강인한 정신력으로 무장한 중국군에 '패퇴'한 사실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역시 '중국인의 입장'에서 '한국전쟁'을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일정한 비판적 검토가 필요한 이유이다.
무엇보다 우리가 정말 주목해야할 부분은 중국의 참전 이유와 정전 이후 그들이 평가한 '항미원조전쟁'의 의의가 아닌가 한다. 저자는 미국이 타이완 문제에 간섭함으로써 '중국내전'에 개입했다고 본다. 이 전쟁의 의의는 물론 중국(특히 동북지방)을 보위하고 신생 '중화인민국화국'의 국제적 위상을 제고했으며, 중국의 '일부'인 타이완(臺灣) 해협에 미국의 제7함대를 진출시켜 '중국내전'에 간섭한 미국을 응징한 정의의 전쟁이란 시각이다. 역시 이러한 서술도 냉정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4.
이 책은 1999년 처음 출판될 때 제목이 <원동(遠東) 한국전쟁>이었으나, 2009년 개정판을 내면서<한국전쟁>으로 바뀌었다. 때문에 한국인들에게는 신선한 이미지를 주기도 한다. 하지만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각은 여전히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에 머물러 있으며, 2000년대 초반에 사용되었던 중국 중·고교 역사교과서의 서술내용을 방불케 한다. 또한 중국 당국의 '항미원조전쟁' 인식과 기본적으로 궤를 같이 한다.
또한 필자가 몇 년 전 가본 단둥(丹東, 과거 安東市) 소재 '항미원조기념관'의 전시관점이나 방침, 전시내용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북한의 신의주 바로 건너편에 있는 단둥은 북한과 중국 사이의 최대 무역도시로 유명하다. 이 기념관에서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입구 맨 앞에 있던 중국인민지원군 전사상과 상감령(上甘嶺) 전투 디오라마였다. 온갖 악조건을 무릅쓰고 용전분투하는 중국군의 모습을 웅장하게 묘사한 전시품들이다. 이를 중국이 유사시 압록강을 다시 건널 수도 있다는 메시지로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 <콜디스트 윈터>(데이비드 핼버스탬 지음, 정윤미 옮김, 살림 펴냄). ⓒ살림 |
또 하나의 아쉬운 점은 한국전쟁 관련 지도나 그림, 사진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출판사에 문의해본 결과 원본에 그렇게 되어 있어 번역본에도 수록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책에는 무수한 인명, 지명, 부대 편제와 이름, 군사용어 등이 나오고 있어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보조 자료를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일반 독자들이 북한의 지명이나 중국군과 미군의 편제, 전문적 군사용어 등을 충분히 이해하기 어렵다고 보기 때문이다. 독자들의 반응이 상당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추후 인쇄시 수정·보완을 기대한다.
5.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은 군인, 혹은 전쟁이나 전쟁사, 6.25전쟁사(혹은 한국전쟁사)에 관심 있는 전문가뿐만 아니라 일반인이나 학생들도 쉽게 읽을 수 있는 유익한 저작물이라고 본다. 중국을 알고, 한반도를 둘러싼 중국·미국·러시아·일본 등 주변 4대강국의 냉엄한 각축과 국제질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인 교양서라고 할 수 있다.
올해 7월 27일은 6.25전쟁(또는 한국전쟁)의 정전 6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에 걸맞게 학계에서는 정전 60주년을 조명하는 학술회의가 몇차례 열렸고, 정계와 언론 등 각계에서도 나름대로 상당한 관심을 갖고 정전 60년의 의미와 문제점,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해야 할 당위성 등을 검토하기도 하였다. 학계에서도 6.25전쟁(한국전쟁)에 관한 심도 있는 연구가 축적되고 있으나, 이번에 소개하는 왕수쩡의 이 책처럼 일반 독자나 국민들에게 호소력 있고 영향력 있는 대중서는 발간된 적이 별로 없다. 6.25전쟁 당사자였던 한국이나 한국인들이 오히려 분발해야 할 상황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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