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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구조 고민한 이들이여, 이제 질문을 바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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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구조 고민한 이들이여, 이제 질문을 바꿔라!

[프레시안 books] 가브리엘 타르드의 <사회법칙>

나의 80년대에 관한 가장 오래된 정치적 기억은 이런 것이다. 대통령을 희화화하면서 풍자하는 신문만평을 보고, '아니 대통령을 이렇게 모독해도 되는 것일까' 라고 의아해했었는데, 그 의아함 자체가 어쩐지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 의아함이 공개적으로 국가원수를 모독하는 행위가 불러올 앙갚음에 대한 우려에서 나온 것이었는지 아니면 막연하게 체득하고 있던 국가주의적 규범이 공공연히 도전받고 있음으로 인한 규범적인 혼란에서 나온 것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의아함이 기억으로 남은 것 자체가 내가 그러한 규범적 혼란에 관하여 어느 어른에게 명확히 질문하고 답을 구하는 데 두려움을 느끼고 해소하지 않은 채로 묻어두었기 때문일 것이기에, 양쪽 다 얼마간 맞는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 '국민학교'에 아직 들어가기도 전의 내가 어떻게 하여 이미 '국민'의 상징적 질서에 진입하였기에 그 상징적 질서의 분열 또는 변화 앞에서 당혹감을 느꼈던 것일까. 누군가 나에게 국가원수를 비방하면 안 되는 이유를 친절히 가르쳐 주면서 명시적으로 그 질서 안에 기입해준 것은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 <사회법칙>(가브리엘 타르드 지음, 이상률 옮김, 아카넷 펴냄). ⓒ아카넷
장 가브리엘 타르드(1843~1904)의 모델에서는 사람들의 욕망이나 믿음이 흔히 오해되는 바와 같이 그 개인의 생애사에 근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무의식적인 차원에서 직접적이고 사회적으로 교환된다. 타르드는 흔히 사회적 사실들을 개인의 심리적 현상으로 환원하는 심리학적 환원주의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나 그가 직접적으로 밝히듯이, 사회학은 "하나의 뇌 안에서 인상들이나 이미지들 간의 내적인 관계를 연구하고, 그 영역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그 내적인 요소들의 연합법칙으로 설명하려고 하는 심리학 (…) 일종의 확대되고 외면화된 영국의 연합관념론"이 되어서는 안 되며, "기초적인 사회적 사실을 구해야 하는 곳은 바로 또는 오로지 뇌내intra-cérébrale 심리학에서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뇌간 심리학inter-cérébrale"인 것이다(<사회법칙> 28쪽).

그의 이러한 독특한 관점은, 물리학, 천문학, 생물학 등의 자연과학의 분과학문들이 이루어낸 성과를 사회학이 달성하기 위해서는 이 학문들과 동등한 엄밀한 기초, 즉 과학으로서 어떤 학문이 대상으로 삼는 것의 실재적 구성 요소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확보해야 한다는 그의 소신에서 출발한다. 그는 프랑스 특유의 과학철학적 전통, 즉 형이상학metaphysics의 본래 어원에 충실하게 사유의 인식론적 조건들을 당대 과학의 성과에 대한 해석과 연결시켜 음미하는 전통에 서서 과학을 "현상을 그것들의 반복의 측면에서 고찰한 질서"라고 정의한다.

타르드가 보기에 과학을 인과관계에 대한 탐구만으로 특징짓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과학은 이전까지 근본적인 것으로 오인되었던 차이와 유사성들로 구성된 체계들이 논파되고 실재적인 요소들의 차이와 반복의 체계를 구성함으로써 성립된다(예컨대 천문학적 대상들에 관한 이질적인 특수학문들, 역학적 사실들에 관한 특수학문들은 있었지만 천문학, 화학, 물리학 등은 만유인력의 법칙, 에너지 보존 법칙과 같은 보편적 법칙으로 학문의 대상을 체계적으로 전유하면서 성립한 것이다.). 타르드가 보기에 사회학자들은 개인의 성향 또는 행위들의 인과적 근원을 흔히 집단이 개인에게 강제하는 힘에서 찾고는 하는데, 이러한 설명은 마치 고대의 천문학이 천체의 운동을 신의 역사에 의해 설명하거나 고대 의학이 질병을 실체적인 존재로 취급했던 것과 같이 허위적이고 환영적인 인식에 불과하며, 아직 사회학이 과학의 단계에 들어서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다.

사회학이 대상으로 삼는 것의 실재성에 대한 타르드와 뒤르켐의 입장 차이는, 사회학의 학문적 성격에 대한 논쟁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뒤르켐은 사회학이 자신의 대상을 독자적으로 다루는 단일적인 학문이 아니며, 여러 사회과학들이 각각의 분야에서 거둔 성과를 일반화하는 데에 그 존재 의의가 있다고 주장한다. 각각의 사회과학들은 자신의 영역에 대한 연구에서 독립성을 갖지만, 이들이 다루는 사실들이 모두 '사회적'이기 때문에 개별 사회과학들이 다루는 사실들은 어떤 공통된 현상을 갖게 되며, 사회학은 비교 방법을 통해 이 사회적 사실을 추상해내는 학문이라는 것이다. 뒤르켐이 주장하는 사회학의 독자성은 사회학이 다루는 대상의 고유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역사학, 경제학, 심리학, 생물학, 심지어 기후학 등등도 자살을 대상으로 다룰 수 있다.), 여타 '사회과학들'에 의해서는 파악될 수 없고 사회적 사실들을 사물로 취급하여 그 사이의 인과성을 다루는 사회학적 방법론에 의해서만 제대로 파악될 수 있는 영역이 있다는 방법론적 층위에 존재한다.

반면에 타르드는, 개인들 사이의 상호작용 외부에 독립적인 설명 방식을 요구하는 어떤 것이 있다는 주장은 부정하면서도 이 상호작용 자체의 매질로서 사회학의 대상이 되는 실재적인 양이 존재한다고 확신한다. 사회학은 특수한 사회과학들의 대상이 되는 단순한 현상들로부터 추출된 어떤 추상적인 것을 대상으로 삼는 게 아니다. 오히려 이 단순한 현상들조차 이미 기초적인 사회적 사실들이 결합되어서 구성된 것이다.

이처럼 뒤르켐과 타르드의 실제적 대립은 언뜻 보는 바와 같이 실재론과 명목론의 대립에 있지 않다. 뒤르켐이 타르드의 모방 이론을 비판하면서 모방이 사회적 사실을 설명할 수 없는 개인적 조건들의 차원에 머무른다고 지적할 때, 그는 아마도 타르드가 이처럼 '사회적'이란 낱말의 뜻을 근본적으로 혁신하면서 재전유하고 있다는 것을 일부러 무시하면서 자신의 이론적 지형 안으로 끌어들여 무력화시키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체들 간의 무의식적인 상호작용을 질료로 삼는 '물질적 심리학'이라니, 그런 형이상학적인, 말하자면 비과학적인 허약한 전제 위에서 어떻게 사회'과학'을 수립할 수 있을까? 이런 매우 타당한 질문 앞에서, 주체를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나 그에 대한 비판으로 제도를 출발점으로 삼는 것보다 이 관점이 과연 더 형이상학적인 것일까 라고 반문해 보는 것이 흥미로운 반성적 지점을 제공해줄 수 있을 것이다. 타르드는 행위의 일반적 패턴을 지배하는 규칙을 밝히고자 했지만, 그러기 위해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개인의 선택이나 판단의 기제가 아니라 사회적 상호작용의 과정이었으며, 그는 이 사회적 상호작용을 주체나 제도를 단위로 하여 이해하지 않고, 사회적 상호작용들을 매개하는 질료 내지는 원질로서 믿음과 욕망이라는 두 단위를 추출하여 이를 어떤 물질적인 양적 단위로 취급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날 타르드가 활발한 재해석의 관심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은 사회학과 근대성의 공모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비판의 맥락과도 연결된다. 주지하듯이, 기계론적 관료주의에 의한 일상세계의 식민화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중 어느 이념을 내걸었는가와 상관없이, 좌우 양진영을 막론하고 광범위하게 나타난 현상이었으며, 뒤르켐의 사회학은 사회주의적 정치가들에게도 '연대'가 존재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 사회적인 영역에 관한 철학적 이론을 제공하였다. 한편 60~70년대 후기구조주의의 열풍 속에서 이른바 차이의 존재론과 반인간주의적 사유의 영향을 받은 이들은, 근대철학 일반에 대한 비판과 아울러 뒤르켐이 말하는 '사회적 사실'을 대상으로 삼는 학문으로서 사회학 역시 태생적으로 계몽주의적 근대성을 내포하는 것으로 보고 비판적으로 인식하였다. 이들에 의해 '개인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을 다루는 타르드의 독특한 방식은 사회학이 이와 상반되는 형태로 전개될 가능성을 최초로 그리고 모범적으로 제시했던 방향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보통 거시적 접근은 구조에서 출발해서 개인의 행동을 설명하려는 것으로, 미시적 접근은 이와 반대로 개인의 행동을 결정짓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구조가 행위주체의 구조 내 위치를 결정하는 측면에 대한 거시적 분석과, 행위주체의 행위에 의해 구조가 재생산되는 과정에 대한 미시적 분석을 통합하는 것은 사회학의 영원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타르드의 관점을 받아들인다면, 사실 이러한 문제는 문제 설정부터가 잘못되었다고 말해야 한다. '개인적인 것'과 '구조적인 것(또는 당시의 용어로는, '사회적인 것')' 사이에 구별을 설정하는 것은 오류이다. 구별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표상되지 않는 것'과 '표상되는 것', 즉 무의식적인 것과 의식적 또는 전의식적인 것이다. 타르드를 미시사회학의 선구자 또는 미시사회학적 방법론의 창시자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거시사회학과 대립되는 의미에서의 미시사회학이 아니라 그가 모든 것이 미시적인 것임을 명확히 했다는 의미에서 그러할 것이다.

▲ <모방의 법칙>(가브리엘 타르드 지음, 이상률 옮김, 문예출판사 펴냄). ⓒ문예출판사
이러한 관점이 관료제와 관련된, 앞서의 질문과 연결되는 지점은 명확하다. 들뢰즈는 뒤르켐 학파가 타르드를 "짓밟았던" 이유를 "뒤르켐은 통상 이항적이고 공명하고 덧코드화된 거대한 집단적 표상들 속에서 특권화된 대상을 찾았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한다. 구조적인 것들 즉 '사회적 제도'들에 어떤 독립적인 존재론적 위치를 부여하는 듯한 접근 방식, 특히 근대를 사회 전 측면에서의 관료제의 정착 및 심화 과정으로 기술하는 것은, 그 자체로 그런 구조화된 표상들에 특권적 위치를 부여함으로써 사회의 관료제화하는 경향을 암묵적으로 승인하는 것이 아닌가? 달리 말하면, 대중의 학문이 아니라 관리하는 자의 학문으로 성립되어 온 사회학의 계보학적 성격을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타르드는 <사회법칙>(한국어판 이상률 옮김, 아카넷 펴냄)에서, <모방의 법칙>(한국어판 이상률 옮김, 문예출판사 펴냄) <보편적 대립> <사회논리학>과 같은 주저들에서 보다 세밀하게 전개된 그의 사회학 이론을 요약하면서 그에 대한 비판에 보다 체계적인 대답을 제공하고자 하고 있다. 사회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해볼 만한 사회학의 본질과 영역에 대한 고민을, 이른바 주류사회학이 성숙하기 이전 낯선 문법으로 전개되는 거장의 필치와 함께 되새겨 보기에 적합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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