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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병일기-동티모르 주둔 1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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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병일기-동티모르 주둔 1년<1>

"뭐, 동티모르에 가겠다고?"

새 독립국 건설의 마지막 손질에 바쁜 동티모르. 이곳에 파병됐던 한 한국군 병사의 일기를 소개한다. 이름은 김상훈씨(24. 서울대 서어서문학과 4년). 그는 99년 12월에 입대해 2001년 1월부터 1년간 동티모르에 파병됐다가 지난 2월 22일 제대하고 올 새 학기에 복학했다.

김씨는 우리에게 낯익은 상록수부대로 파병된 것이 아니라 태국군 필리핀군과 함께 소수의 한국 군인들로 구성된 동티모르 동부여단에 파견돼 한국군 부대와의 연락반 역할을 수행했다.

그 과정에서 겪은 동티모르 주민들과의 낯선 체험, 여러 외국군과의 합동 작전은 물론, 동티모르와 유엔 사이의 미묘한 정치기류와 갈등 속에서 겪은 독특한 경험담을 이 일기에 담고 있다.

이 글은 일기형식이지만 그가 파병기간 동안 이메일로 가족들에게 띄웠던 많은 편지들의 일부다. 편집자

***"절대로 안된다" 어머니 반대**

<사진1-필자 얼굴>

"내가 지금 아들이 군대에 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불안한데, 뭐, 동티모르에 가겠다고?"
인사과에 근무하는 입대동기가 동티모르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며 공문서를 보여준 지 사흘째. 가족의 동의 없는 해외파병은 불가능하다는 말 때문에 시간 내는 게 결코 쉽지 않은 졸병 생활 중에서도 하루에 몇 번씩 눈치를 살피며 집으로 전화를 드려야 했습니다. 소집일은 다가온다는데 어머니께서는 여전히 절대로 안 된다며 반대하시는 것이었어요.

입대 전에 어머니와 그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동티모르 사태가 심각해지자 당시 우리 정부는 평화유지군 파병을 검토하게 되었죠. 입대 전이었던 저는 어머니에게 동포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는 것보다는 저기서 저런 일을 하는 게 더 좋아 보인다고 지나가는 말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저기는 특전사 군인들이 가게 된다며? 그나마 다행이다. 나는 우리 아들들이 저런 곳에 가게 될까 봐 걱정이야"라고 대답하셨죠.

반세기 가까이 전쟁 없던 나라에 살아온 처지로서는 동티모르로 파병되는 한국군의 모습이란 월남전으로 떠나는 그 모습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었는데, 그 대상이 자식이 될까 봐 걱정이셨을 겁니다.

어쨌건, 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국제사회에 진 빚을 갚고, 적극적으로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겠다는 명분 하에 파병을 강행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저 역시 공짜로 넓은 세상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왜 마다하느냐며 지원서를 냈죠.

부모님의 동의도 문제였지만, 전 군에 내려보낸 공문에 병사는 단 두 명만을 뽑는다고 적혀 있던 것도 걱정이었습니다. 집안의 반대뿐 아니라 당장 소속부대에서도 당시 제가 하던 일을 이어서 할 후임병을 언제 구하느냐고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아야 했죠.

***'연락반' 수행하는 파견병력**

여기서 잠깐 설명하면 이렇죠. 동티모르로 가는 한국군의 주력은 '상록수부대'라는 이름의 한국군 1개 대대입니다. 특전사 1개 대대를 모체로 거기에 공병대와 의무대 등의 지원대가 더해져 1개 대대 약 4백50명 가량을 구성하고요.

그 외에 연락 참모단이라고 별도로 선발하여 보내는 소수의 병력이 있는데, 세 소속으로 갈라졌죠.

하나는 수도 딜리에 있는 평화유지군 사령부 참모로 외국군(대략 30개국 정도)과 공동으로 부서를 구성하여 본부로서의 기능을 담당합니다.

또 하나는 한국군 대표부(National Command Element, NCE)라고 하여 5명 가량이 본국의 합동참모본부와 전체 동티모르의 한국군 부대 사이의 연락 임무를 담당하죠.

동티모르로 병력을 보낸 모든 국가는 각자 이 NCE를 가지고 있는데, 이 곳에서 자국 부대의 최종 통제를 담당합니다. 병력의 이동이나 새로운 작전에의 참가 등등을 최종 결정하는 곳이죠(물론 외국도 마찬가지이지만, 우리나라 NCE는 본국의 합동참모본부의 통제를 받고요). 

이는 명목상으로는 각국 부대가 뉴욕의 유엔본부-동티모르의 과도행정부- 평화유지군 사령부의 통제를 받아야 하긴 하지만, 실제로 자국군에게 인명피해나 물질적 피해가 예상되는 작전을 타국이 간섭하자면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에 잡음이나 마찰을 줄이기 위해 본국 정부와 빠른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도록 만들어 놓은 부서입니다.

다른 하나는 바로 제가 소속됐던 동부여단입니다. 바우카우라는 곳에는 태국 필리핀 한국으로 구성된 동부여단의 여단 본부가 위치하고 있었는데, 동부여단도 한국군 대대 바로 위의 상위 부대이기 때문에 외국군과 한국군 사이의 원활한 의사소통과 빠른 첩보 수집 및 전달을 위해 연락반을 필요로 했죠.

저희와 필리핀 연락반이 그런 의미에서 태국군이 주가 되어 있는 동부여단 사령부에서 그 일을 담당했던 겁니다. 한국군 병사로서는 저 외에 딜리의 평화유지군 사령부에서 일하던 다른 한 명이 함께 갔어요.

그래서 저희는 단 두 명이 선발되었던 것이지요. 저희가 도착하기 전 그곳에서 일하고 있던 전임병(최규식씨라고 전에 짤막하게 연합뉴스에 소개되어 전해지기도 했었습니다)도 있었고, 그 후임병도 있고 하여 보통 세 명 정도가 유지되었습니다. 지금은 한국군 부대가 서티모르 내의 동티모르 영토인 오쿠시라는 곳으로 이동하여 동부연락반은 해체되었고요(감축 계획에 따라 동부여단 자체가 해체되었습니다).
 
상록수부대와의 차이라면, 상록수부대가 6개월에 한번씩 대대규모가 일제히 교대하는 데 반해, 저희는 1년간 활동하고, 소속도 한국군 대대가 아니라 각자 역할에 따라 저같은 경우는 '동부여단' 소속, 딜리의 사령부에서 근무하던 분들은 '평화유지군 사령부'소속이 되는 겁니다.

한국군이기 때문에 최종적으로는 모두 NCE 밑에서 일괄적으로 통제를 받지만, 형식상으로는 각국에서 선출해 타국 부대로 파견시킨 일종의 파견병력인 셈이죠.

***"잘한 결정이었다"**

이래저래 사람들은 선발 과정에서 제가 떨어지기만을 바라는 것처럼 보였고, 가고 싶다는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파병 전 교육을 받으러 떠나는 전날까지, 아니 동티모르의 수도 딜리 공항에 비행기가 내리던 그 순간까지 과연 이게 현실인가 싶은 의아한 마음은 멈추질 않았어요.

불에 탄 자동차와 총을 멘 군인들, 군데군데 움푹 파여 있는 열악한 도로 사정에 간신히 동티모르로 왔다는 걸 실감하고서야 정신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어머니께서 반대하셨는데도 큰소리쳐가면서 떠나온 길이었는데, 막상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그렇다면 네 인생이니까 네가 선택한 대로 해보라며 당신께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동의해 주셨던 아버지가 야속해지더군요.

그 때 조금만 더 말리시지,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살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의 한겨울을 보내다가 떨어진 열대의 땅은 몹시도 끈적거렸고, 환경은 이루 말할 데 없이 열악했지만, 그래도 인생에 몇 번 오지 않을 기회 같은데 꼭 떠나야만 하겠다며 그렇게 큰소리를 치고 나서 이제와 집을 향해 투정을 부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지금부터 적을 이야기는 바로 그 당시부터 그렇게 큰소리치며 혼자서 세계평화를 구할 양 떠나왔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몸 건강하고 잘 지내고 있다라는 내용으로 가족들에게 보내야 했던 편지 모음입니다.

부연설명을 좀 하자면, 공문이 부대까지 전달된 뒤 지원의사를 밝힐 때까지의 기간이 단 사흘이었고, 그 동안 결정을 해야만 했습니다. 집에서 걱정하시는 건 사실 부차적인 문제였고, 저 개인적으로도 망설여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보라고는 전혀 없는 데다가 정보를 구하러 여기저기 알아보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았던 거죠. 게다가 당시에는 한참 월남전 당시 한국군의 베트남 양민학살 문제가 사회적으로 불거지던 시점이라 자연스레 '동티모르=베트남'의 등식이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결국에는 검증된 탄탄대로로만 걸어가는 사람은 평생 지나봐야 남들 다하는 일밖에 할 수 없다고 스스로를 세뇌시켜가며 지원서를 냈습니다.

결과적으로 지금에 와서야 잘 한 결정이었다 생각하지만, 당시에 "그러려면 넌 내 아들 하지 말아라"라는 이야기까지 들어가며 어머니를 설득시키느라 애 먹었던 기억이 다시금 떠오르네요.

***80만중 20만이 희생된 독립전쟁**

알고 보니 제가 하게 된 일은 동티모르 제2의 도시(라고 해봐야 시골이지만) 바우카우라는 곳에서 연락반 운전병 겸 행정병 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총 들고 실전 상황에 맞부딪힐지도 모른다고 잔뜩 각오하고 지원했는데, 출발 전 1개월간의 교육에서 들어보니 그런 식의 직접적인 위협은 전혀 없다더군요. 저도 일단 안심하고, 가족들에게 드릴 좋은 변명도 생겨났습니다.

바우카우라는 곳에 위치한 동부여단의 여단 본부에서 보통 부대에서 보통 운전병들이 하듯이 운전하고 차량 관리하고 덧붙여 여단 사령부에서 일상적인 행정 잡무를 1년간 한 것이지요.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외국인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이전 1년간 충북에 있는 전 부대에서 하던 일과 별 차이도 없는 일이었죠. 함께 일하던 한국군은 장교를 포함해서 단 네 명뿐이었는데, 다행히도 좋은 분들을 만나 가족처럼 오손도손 지낼 수 있었습니다.

한국군 대대와 멀리 떨어져 근무했던 탓에 어쩔 수 없이 스스로 알아서 해결해야 하는 일이 많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몸은 고달팠어도 결과적으로는 좋은 경험의 바탕이 되었던 것 같군요. 당장 한국군 대대로 보고서라도 하나 보내려면 네 명이 모두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묻고, 조사해야 했기 때문에 친한 사람들도 생기고 색다른 경험들도 늘었던 것 같습니다.

<사진2-동티모르 지도 넣어주세요>

동티모르는 인도네시아의 동남쪽에 위치한 티모르 섬의 동쪽 절반입니다.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보다 오히려 호주 북부 지역의 주도(州都) 다윈과 가깝죠. 그래서 호주와 동티모르는 이래저래 많은 인연으로 얽혀 있습니다.

원주민들은 같은 말레이-오세아니아 계통의 사람들이고, 2차대전에서는 호주군을 도와 일본에 대항해 싸웠으며, 현재는 동티모르 남쪽, 호주 북부의 티모르해에서 나는 석유와 천연가스 문제로 협상을 벌이고 있습니다.

호주 정부는 전통적으로 동티모르에 대해 중립적인 제스처를 취하려고 노력했지만, 전 식민종주국이던 포르투갈과 인도네시아의 눈치를 살피느라 박쥐같은 행보를 보여서 비난을 사곤 했었죠.

동티모르의 백단목에 눈독을 들이던 포르투갈 상인들에 의해 처음에는 교역이 시작되었다가, 결국 탐욕스런 백인들이 아예 동티모르를 자기들 땅으로 삼아버렸죠. 당시 막 세계로 뻗어 나가려던 네덜란드 역시 티모르 섬에 눈독을 들였고, 포르투갈은 네덜란드와의 몇 차례 충돌 끝에 티모르 섬을 반으로 갈라 각각 통치하게 됩니다.

이렇게 약 4백년에 걸친 포르투갈 지배는 1974년 포르투갈 내부의 정치적 변화로 끝을 맞게 되고, 이후 인도네시아군이 강제로 동티모르를 점령합니다. 그러나 종교적으로, 문화적으로 이질적이었던 동티모르는 독립운동을 계속하게 되고, 결국 80만 인구 중 20만이 학살되어가면서 계속 싸워온 끝에 이제 올 5월에 정식으로 독립국가 선포만을 앞두고 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차차 하도록 하죠.

***입이 간지러워 쓰기 시작한 편지**

이런 이야기들과 함께, 처음 도착한 후 하루 이틀 흘러가며 새롭고 신기하고 때로는 두려운 상황들이 주위에서 생겨나자 입이 간질거려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싶더라고요. 그렇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2001년 8월에는 제헌의회를 구성하는 선거가 치러졌는데, 2001년 2월초부터 그 선거가 끝날 때까지의 과정이 편지의 주된 내용입니다. 선거 이후에는 정말이지 놀랍도록 사회가 안정적으로 변했고, 그로 인해 그전까지 열심히 써오던 편지도 쓸 내용이 적어지게 되었어요. 더구나, 안정과 함께 제 긴장도 풀려갔던 모양입니다.

지금 이 순간 동티모르는 오는 4월에 치르게 될 대선 때문에 다시 약간 긴장된 분위기로 돌아갔을 겁니다. 그 사람들에게 선거는 늘 극심한 혼란을 떠올리게 만드는 일이었거든요.

게다가 이번 선거는 정식으로 동티모르가 독립 선포를 하게 되기 직전의 중요한 선거니까요. 다행히 지난 선거가 무사히 성공적으로 끝나고 사회가 안정화되었듯, 이번 선거도 잘 끝나겠죠.

처음 도착해서는 숟가락으로 떠서 숨을 후 쉬면 다 날아갈 것 같다며 인디카 쌀에 대고 투덜거리고, 인도네시아 크레텍 담배의 냄새가 역겨워 쉽사리 주민들 가게에도 들어가지 못하던 도시 청년이었는데, 귀국한 지금에는 그 맛과 향들이 그리워집니다.

떠나오던 당시에는 평화롭고 안정적이며 활기에 넘쳐 이곳저곳에 새 건물들이 지어지고 도로가 보수되고 있었는데, 지금은 어떤 모습일까요. 비가 오는 궂은 때를 보내고 난 듯, 갖은 우여곡절 끝에 곧 정식으로 독립을 하게 될 세계에서 가장 젊은 나라에 멋진 쌍무지개 한 쌍 떠오르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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