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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병일기-동티모르 주둔 1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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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병일기-동티모르 주둔 1년<2>

“김구 선생이 미군 이등병보다 못하다니”

열대의 더위란 처음 겪는 사람에게는 보통 괴로운 일이 아닙니다. 대개 첫 달이 지나기 전 파병온 한국군들의 절반 정도가 복통과 설사, 혹은 말라리아로 한번씩 고생을 하게 된다더군요.

그런 점에서 저는 참 운이 좋은 건지 적응력이 좋은 건지 그런 일 하나 없이 가뿐하게 새 생활을 즐기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입대 전에도 “너 같은 녀석이 군대가서 어떻게 견뎌낼지 걱정이다”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제대한 지금에는 “너 상당히 적응력이 좋다”라며 다들 놀라더라고요.

여기서는 우선 하루하루 일상에 대해 적은 부분들을 모았습니다(8월 15일자까지). 낯선 외국인들의 땅, 호기심에서 약간의 이해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입니다.

***2월 9일**

종일 비가 퍼부어 대다가 정오를 기점으로 잠깐 해가 반짝 뜹니다. 옳다구나 빨래를 시작했지요. 돌아가던 세탁기가 탈수 과정으로 접어들자 하늘이 껌껌해지기 시작합니다. 이런... 구름이 물러갈거야... 탈수가 끝나자 다시 비가 정말이지 콸콸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빨래 말리기는 글렀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때, 날씨 때문에 헬기가 못 떠서 어쩔 수 없이 차를 타고 오시기로 한 딜리의 연락단장(H대령)님께서 무전이 옵니다.

A소령님이 무전을 받고 나서 말씀하더군요.
"빨리 준비해라. 폭우로 도로가 유실되었단다. 우리가 모시러 가야 할 것 같아."

한국에서 교육받을 때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기는 했습니다. 동티모르는 도로를 제대로 만들어 놓은 게 아니어서 우기 때 폭우만 오면 도로가 떠내려간다고...

낮잠은 커녕 빨래도 못 널고 부랴부랴 출발했습니다. 도착해보니 상황은 정말 가관이더군요. 아스팔트 도로가 5미터 정도 5미터 깊이로 끊어져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비에 씻겨 내려간 듯이 말이죠. 내참...

타이 군이 마침 복구를 시작한 상황이어서 도로가 복구되길 기다릴까 어쩔까 고민을 많이 하다가 결국 높은 분들이 결론을 내립니다.

"A소령하고 김상병은 여기 남아서 도로 복구되면 우리 차 가지고 돌아와. 우리가 너희 차 가지고 먼저 갈테니까."

어쩌겠습니까. 바빠도 단장님이 더 바쁘고 계급도 단장님이 더 높고, 나이도 단장님이 더 많고, 인원도 그쪽은 네 명 우리는 두 명인데... 할 수 없이 차를 바꾸고 나서 떠나가는 우리 차 뒤를 향해 손을 흔들며 바이바이 하고는 그냥 하염없이 도로가 복구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곳에 도착한 게 2시 30분인데 8시 30분이 되어서야 복구가 끝나더군요... 저희 같은 사람들이나 유엔 직원들이야 어쩔 수 없이 도로가 복구되면 차 타고 가겠다고 기다린다지만, 6시간 동안을 그 퍼붓는 비속에서 가만히 서서 복구과정을 지켜보고 있는 동티모르 주민들의 마음은 이해할 수가 없더군요.

단지 복구 과정을 보겠다고(동티모르 주민들의 특징은 결코 유엔에서 마을 도로를 고쳐주거나 다리를 놔줄 때 도와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자기 집 지붕을 유엔직원이 수리해줘도 그냥 쳐다만 볼뿐이랍니다. 그건 너네 일이다라는 자본주의적 직업관도 아니고... 거참 하여간 절대 안 도와줍니다) 빗길을 뚫고 몇 킬로미터씩 걸어온 겁니다.

그리고는 몇 시간씩 그 지루한 복구작업을 그냥 멍하니 쳐다보고는... 칠흑같이 깜깜해진 밤길을 또 비를 맞으며 걸어서 돌아갑니다.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덤프트럭과 포크레인이 자주 보기 힘들어도 그렇지... 거참 이런 모습은 정말이지 ... 당혹스럽더군요.

어쨌거나 간신히 빗속을 뚫고 복구된 도로를 건너 여기까지 돌아왔습니다. 오는 길에 제 차가 도무지 몇십 마리의 개구리를 밟아 죽인 건지 모르겠습니다. 비올 때엔 개구리 횡단보도나 개구리 신호등을 좀 만들어줘야겠단 생각을 합니다. 불쌍해라... 명복을 빌어주고 있습니다.

***2월 14일**

걱정하시던 바와는 달리, 그리고 스스로 걱정했던 바와도 달리 민병대의 위협은 사실상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을 정도로 요즘은 안정적인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초기에 다국적군과 민병대 사이에 교전이 벌어져 호주군이 죽고, 유엔 요원들이 살해되던 당시의 험악함이 국내에 좀 과장을 섞어가며 소개되어 이 곳이 거의 전시 상황인 양 묘사가 되었었는데, 요즘엔 그런 험악함을 이야기하면 우스울 정도로 상황이 호전되었어요.

대신, 민병대와의 직접교전이라는 치명적 상황의 공백을 메운 덜 치명적이고 덜 직접적인 새로운 불안요소가 이 곳의 골칫거리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다른 게 아니라 현지인들, 즉 동티모르인들의 대 유엔 시위가 거세어진다는 거죠.

독립 직후, 도저히 독립을 인정할 수 없었던 민병대들이 동티모르인들에게 야만적인 학살을 행할 때, 현 CNRT(동티모르 민족회의) 의장인 사나나 구스마오는 즉각적인 유엔 평화유지군 파병을 국제사회에 요청합니다. (그 유명한 사나나 구스마오의 원래 이름은 호세 알렉산드레 ‘사나나’ 구스마오. 본명인 호세 알렉산드레 구스마오에 게릴라 시절의 애칭 ‘사나나’가 붙여졌는데 그가 태어난 마을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마치 에르네스토 게바라에 애칭인 ‘체’를 붙여 체 게바라라 부르듯)

그래서 그 상황 이후 한국의 상록수부대도 이곳에 주둔하게 된 것이고, 저도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유엔을 향해 동티모르인들이 돌을 던지기 시작합니다.

유엔 주둔 후, 만 1년이 넘었는데 아직 동티모르인들은 일자리도 없고, 그나마 가장 좋은 일자리에 속하는 유엔 관련 일자리(라고 해봐야 청소 용역, 빨래 용역, 그나마 고급으로 치는 게 영어-현지어 통역 등...)도 영어 못하는 사람 안 받아주고, 받아줘야 유엔 말단 직원 월급의 10분의 1도 안 준다고 불평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사실 가장 보수를 못 받는 군인들, 그 중에서도 겨우 상병인 제 월급도 미화로 1천 달러 가량 됩니다. 현지인들은, ETTA(동티모르 과도행정기구)라고 앞으로 현 유엔과도행정기구를 대체할 동티모르 임시정부 같은 조직이 있는데, 여기 핵심멤버로 일해봐야 유엔에서 받는 돈은 3백~4백 US달러입니다. 김구 선생이 미군 이등병보다 돈을 조금 받는다... 라는 상황인 거죠.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이미 이런 상황을 겪어봤던 우리네의 정서이자, '목숨 걸고 도와주러 자기와 상관없는 곳까지 쫓아간' 외국인들의 정서이지만, 조금만 이 사람들 입장에서 바라보면 사실 말도 안 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들 입장에서야 '도와주겠다'고 와있는 사람들을 곰곰이 보고 있자니 반년에 한 달씩 휴가 다니며, 한 달에 자기네 1년 월급을 벌며, 콜라나 맥주 값보다 비싼 생수로 양치질하고, 동티모르에서는 최고 수준의 식사를 하고, 그러면서도 막상 자기들에게 일자리를 달라면 '예산문제'로 힘들다는 유엔이 이해할 수가 없겠죠.

유엔이 와서 온갖 폼은 다 잡으면서 “나라 세우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가르쳐 주겠다”고 말은 하고 있지만, 실제로 돈을 벌 수 있는 공장을 지어주는 것도 아니고, 관광단지를 조성해 주는 것도 아니니, 독립 후 삶에 대한 기대치는 엄청났는데 변한 게 없다는 생각을 안 할 수도 없는 모양입니다.

도와주겠다고 온 녀석들이 도움은커녕 자기들 배만 불리는 듯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그 정도(월 1천 달러가 목숨 걸고 남의 나라에 가는 사람에게 큰 돈은 아니죠...) 보수도 없다면 과연 유엔 활동이 유지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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