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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병일기-동티모르 주둔 1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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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병일기-동티모르 주둔 1년<3>

“우리는 6백년간 걸어다녔다니까”

***2월 16일**

날씨에 대해 한 말씀 드리죠. 여긴 적도에서 약간 남쪽으로 내려온 곳이라 지금이 여름입니다. 남반구니까. 하긴,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없는 곳이 적도니까 여름이라고 부르면 안 되고, 여긴 현재 우기(wet season)죠. 우기가 건기보다 온도면에선 약간 낮다던데, 습도가 높아서 불쾌지수가 상당하다고들 하더군요.

그러나 사실은 ... 아주 선선하고, 밤에는 추워요. 제가 있는 이곳 바우카우가 해발 5백 미터 고지대인 탓에 적도임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쾌적한, 마치 한국의 초여름 날씨 같은 상황이 지속되는 중입니다. 아니, 요즘은 매일 장대비가 몇 차례 지나가니까 장마라고 해야 하나...

요즘 케네스 데이비스의, 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한 세계지리 ‘Don't Know Much About Geography’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 거기에 열대 몬순기후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지구의 기온은 적도에 가까워질수록 올라간다고 주장했고, 따라서 적도 부근에서는 사람이 살기 힘들다고 말했던 것은 완전한 오해라더군요.

오히려 더운 곳은 회귀선 부근-따라서 사막도 이 곳에 형성되게 된 것이죠-이고, 적도 지역 중에서도 뚜렷한 우기와 건기로 나뉘는 몬순기후 지역은 살기에 적합합니다. 사실, 전 이곳에 와서 감기도 걸렸었답니다. 물론 지금은 다 나았어요.

요즘은 우기인데다가 태풍 비센테라는 놈이 이 부근에서 비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중이어서 도무지 해가 뜨질 않습니다. 게다가 해발 5백 미터밖에 안 되는데도 안개인지 구름인지 모를 뿌연 수증기가 아침저녁으로 시야를 가로막을 정도로 끼어대서 곳곳에 곰팡이가 안 피어나는 곳이 없군요.

가장 저를 당황스럽게 하는 건 책에 곰팡이가 슬었다는 겁니다. 당연히 책에 곰팡이가 피어났다니까 “자슥, 얼마나 책을 안 읽었으면 책에 곰팡이가 피어?”라고 생각하시겠지요?

아... 정말 억울합니다. 제가 여기 와서 가장 자주 들고 다니고 가장 자주 펼쳐보고 있는 책에도 곰팡이가 슬었다니까요. 거참, 밖에 나갔다가 A소령님 업무 보시는 동안 할 일 없으면 차안에서 읽으려고 들고 다니는 책에 곰팡이가 슬다니...

뿐만이 아닙니다. 옷걸이에 걸어 놓은 군복에도 곰팡이가 피었어요. 팡이제로를 하루에 두 번씩 곳곳에 뿌려대는데도 팡이제로가 효과가 제로입니다. 이거 한국 곰팡이한테만 잘 듣는 거 아닌가요?

<사진>

우기가 되면 이런 날씨가 계속됩니다.

***2월 19일**

주말에는 상록수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로스팔로스에 다녀왔습니다. 동티모르 전체의 면적이 경상남북도보다 약간 넓은 정도라는데, 형편없는 도로 사정으로 인해서 운전하는 당사자로서의 느낌은 서울에서 부산까지 왕복한 것과 맞먹습니다.

도로가 좁고 좌측통행이란 건 둘째 치더라도, 쭉 뻗은 직선코스에서 갑자기 등장하는 구멍들과 튀어나오는 가축들의 위협은 정말 갖은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합니다.

통일 전 동독에서 서독인들이 서베를린으로 갈 때 이용하는 도로는 동독인들보다 서독인들이 훨씬 많이 이용했다죠? 그래서 동독에서 배짱을 부렸다던데요. “너네가 사용하는 도로, 너네가 보수해! 우리는 걸어다닐 거야!”

동티모르인들이 거기에서 한 수 배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6백년 동안 걸어 다녔어. 차타고 다니는 니네가 보수해!”

그 결과, 차가 못 다닐 지경으로 도로가 유실되지 않는 한 구멍난 도로는 보수될 기미가 보이질 않습니다. 한국군이 특유의 부지런함으로 주민들을 달래 가면서 간신히 협조를 구해 만들어낸 작은 다리 하나는 결국 한국군 혼자 다 지어낸 꼴이 되었습니다. 그 길로는 한국군이나 유엔 직원들보다는 동티모르 주민들이 다니는 버스가 훨씬 많이 지나다닐 텐데도요...

또 동물들은 왜 이리 많은지, 마치 내가 랜드로버를 타고 사파리 관광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동물들이 도로로 뛰어 듭니다. 긴 뿔을 달고 있는 물소가 도로 한가운데 떡하니 주저앉아 빵빵거리는 경적 소리를 들으며 마치 “그래 내가 더러워서 비켜준다”라는 태도로 거만하게 엉금엉금 기어서 구석으로 비켜줄 때면, 괘씸하다기보다는 물소의 자비심에 고마운 생각마저 들 정도입니다.

가끔씩은 산양인지 염소인지 알 수 없는 종자들이 1백여 마리씩 무리 지어 진짜 '양치기'(물론 모두들 진짜라고 생각하시겠지만, 그래도 정말로 양치는 사람은 여기서 처음 만났답니다. 신기해서...)의 인도를 받아 도로를 가득 메운 채 걷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평지라면 양치기가 비켜주지만, 한쪽은 낭떠러지, 다른 한쪽은 절벽인 꼬불꼬불한 산길에서는 양(인지 염소인지)들을 만나면 그냥 그 녀석들과 같이 가야 됩니다. 그럴 때면 빨리 가려는 욕심은 진작에 포기하고 아예 차 세워놓고 한 15분 쉬었다가 움직이곤 하죠. 사파리...라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 오기 직전 동물원으로 데이트하러 갔었는데, 그 때 열대지방 동물들 우리를 지나가면서 “거기 가면 저런 녀석들이 우리에 갇힌 게 아니라 나하고 같이 사는 거 아냐...”라고 말했었는데, 정말 같이 살고 있습니다. 마치 제가 큰 동물원 속의 동물이 된 것 같은 느낌도 들곤 합니다.

우리 나라 아이들도 길 가다가 다람쥐 보면 "다람쥐다!"하고 소리지르고, 개를 보면 "멍멍이다!"하고 소리치잖아요. 여기 아이들도 길 가다가 우리 차가 지나가면 "꼬레아다!"하고 소리칩니다. 우리는 동물원 동물마냥 명찰도 달고 있고요!

그리고, 혹시 몇몇 분들이 말씀해 주신 똠냥군인지 뭔지 하는 그 맛있다는 태국요리가 혹시 제가 매일 먹는 신선로처럼 생긴 그릇에 담겨 나오는 새우와 브로컬리와 샐러리와 이름모를 야채와 닭고기가 잔뜩 섞여서 뭐라 표현할 수 없는 희한찬란한 향들의 오묘한 조화와 함께 어딘가 매콤, 새콤, 거기에 도저히 견디기 힘든 달콤까지 합쳐진, 수프도 아니고 전골도 아닌 음식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게 세계적으로 유명한 태국의 자랑이라고요? 맙소사...

식사는 태국군과 함께 태국 식당에서 먹습니다. 동부여단이라고 해야, 한국군 4명, 필리핀군 6명을 제외하면 바우카우 지역을 담당하는 태국 대대와 함께 같은 지역에 있는 태국군이 대다수여서 기본적인 먹고 자는 문제는 태국군들 협조하에 해결하는 셈이죠. 그러다보니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아 고생을 해야 했는데, 편지 받아보시던 분들은 속도 모르시고 “태국음식이 얼마나 맛있기로 유명한데 투덜거리냐”라며 이상하게 생각하시더라고요. 아무리 유명한 음식이라도 매일 먹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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