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8일**
동티모르 방위군 총사령관인 루악이 한국과의 군사 협력을 논의하러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물론 60만 대군의 한국군을 단 1천6백 명으로 구성된 티모르군의 사령관이 방문한다고 해서 한국 언론이 떠들썩하기를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째 신문에 기사가 단 한 꼭지도 실리지 않는 걸 보니 뭔가 씁쓸합니다.
오늘은 일요일인 덕에 천천히 느긋하게 일어나 낮잠도 늘어지게 자고, 하루종일 빈둥거리는 좋은 휴일을 보냈습니다. 여기서 물건을 사려면 늘 가는 단골 가게가 있는데 주인아저씨가 중국 사람이에요. 그 아저씨가 제게 중국말 할 줄 아냐고 물어보던데, 자기도 한국말 못 하면서 아시아인이라면 중국말 하리라 생각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군요. 그게 '중화'인가.
어쨌건 이 가게에서는 인도네시아 화폐 루피아로도, 호주 달러로도, US달러로도 모두 지불이 가능합니다. 환율이야 부르는 게 값이긴 하지만 그래도 다른 가게들이나 시장바닥과 비교하면 믿을 만 하죠. 이 집 딸이 있는데, 저를 보더니 "가톨릭이라면서 오늘 같은 날 성당에 안 오면 어떡하느냐"며 뭐라고 하더군요.
서로 짧은 영어로 주고 받은 바에 의하면 오늘이 예수께서 예루살렘의 왕이 되신 날이랍니다. 그게 뭔 의미인지... 하여간, 여전히 짧은 영어로 난 아직 세례도 안 받았고, 그래서 정식 가톨릭 신자가 아니다, 어쩌고저쩌고 떠들었더니 다음 주 금요일에 오라는군요.
바우카우 곳곳에서 행진을 벌인답니다. 굿 프라이데이(Good Friday)라고 부활절 전 수난 기념일이랍니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십자가를 메고 교회까지 행진한다네요. 사진 찍어서 보내 드릴께요. 물론 또 어딘가로 갑자기 운전하러 가야 하는 일이 없어야 가능한 일이겠지만.
***5월 15일**
지난 주말에는 '아시아의 밤'이라고, 이 곳에 와 있는 유엔 아시아 참가국들이 다채로운 문화행사(!)와 파티를 겸사겸사 열었습니다. 그걸 보러 간다고 열심히 차를 몰아 두 시간 걸려 딜리까지 갔죠.
바우카우 촌놈이 되어 버린지라 "소령님, 파티에 티켓을 미리 사야 입장 가능하답니다"라고 유엔 인트라넷 홈페이지에서 정보를 구해 말씀 드렸더니, A소령님 왈, "그래, 어디 오마르 중령한테 물어보자." 이러쿵저러쿵 얘기 끝에 중령님 왈, "표는 무슨... 입구에 가면 다 구할 수 있으니까 걱정 말고 그냥 가면 돼."
오마르 중령은 함께 일하는 필리핀 연락반의 중령 아저씨인데, 늘 주책을 떱니다. 나이는 환갑이 되어 가는 것처럼 보이는데(실제로 그렇지야 않겠지만) "말라리아약을 먹으면 임포텐스가 된다"면서 모기가 아무리 달려들어도 절대 약은 먹지 않는, 꿋꿋하고 늘 웃음을 안겨 주는 사람이죠.
그래서 그냥 무작정 표 없이 출발했죠. 아니나 다를까, 입구에서 무식하게 큰 소총을 들고 위압적으로 버티고 서있는 파키스탄 병사한테 제지당해서 못 들어가기를 40여분... 발만 동동 구르고 있자니 보다 불쌍했는지(우리 같은 무대책 인간들 꽤 많았습니다) 입장권을 팔아주더군요.
그래서 간신히 입장. 행사는 볼만했고(어디서 세 시간 동안 인도·파키스탄·말레이시아·네팔·타이·방글라데시·필리핀... 그 외 아시아 열 몇 개국 전통무용과 의상을 순식간에 볼 수 있겠어요...) 파티랍시고 그것도 아시아의 밤이라고 하여 빼 입고 온 미녀들도 많았는데... 나라가 나라인지라, 위험한 곳에 무슨 여자가 그리 많겠어요.
가끔씩 섞여 있는, 제가 좋아하는 빨간 중국 비단치마를 입은 아가씨들이나, 보기만 해도 화사한 타이 옷을 입은 아가씨들, 혹은 아예 파티용 드레스를 장만해 입고 온 금발미녀들 주위에는 수도 없이 많은 남자들이 3중 벽을 쌓고 있더군요. 그래서 먼발치에서 보는 걸로 만족했습니다.
키 크고 덩치 좋은 서양 애들에게 신체적 핸디캡을 극복하려면, 뭔가 뛰어난 '개인기'라도 있어야 할텐데, 어디 춤을 잘 추길 하나, 그렇다고 영어를 잘 해서 좌중을 웃음바다로 이끌 화술이 있나... 그냥 남들 노는 것만 보다가 돌아왔습니다.
아참, 하려던 얘기는 그게 아니고, 딜리가 얼마나 분위기가 험악해졌나 하면, 이 아시아의 밤 행사 때문에 경찰들이 클럽하우스 주위에 아예 줄을 섰어요. 군인들도 같이 줄서고요.
지난번에 놀러 왔을 때에만 해도 밤에 까페에 가서 술도 한 잔씩하고, 해변에서 바다야경도 즐겼었는데, 딜리 전체에 돌아다니는 사람이 하나도 없더군요. 군인들은 그나마 총이라도 들고 다니니까 가장 안전한 편이었는데, 이번에 호주 군인 한 명이 갑자기 튀어나온 괴한들에게 총을 꺼내 들기도 전에 칼부터 맞았답니다. 같이 교육받고 여기로 파견 나온 선배 바로 앞방에 자는 녀석이었다는데, 이 지경이니 당연히 모두 긴장한다더군요.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를 보면 오경필 중사가 멋지게 한마디 하잖아요.
"실전에서는 누가 빨리 뽑느냐 하는가는 중요하지 않아. 알간? 얼마나 침착한가, 얼마나 빨리 판단하고 정확히 움직이는가가 중요한기야."
그 호주 군인도 평소에는 권총 참 빨리 뽑았을 텐데, 막상 눈앞에 괴한이 칼 들고 들이닥치니까 똑딱이 단추 푸는 걸 허둥거렸다더군요.
***8월 15일**
'테툼어-영어사전'을 큰 맘 먹고 샀습니다.
크리스틴이라고 여기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호주 아가씨가 있거든요. 요즘 필리핀 군인들하고 친해지더니 이제는 아예 날마다 출근하다시피 하면서 저희 사무실 옆 로비(라고 말하면 우습고 그냥 뻥 뚫린 공간)에서 리포트를 써요.
무슨 기관 같은 곳에서 파견 왔는지, 11월에 호주로 돌아가는데 그 전에 다 작성해야 한다나요. 이 아가씨가 책들을 많이 가지고 있더군요. 살까 말까 망설이던 '구스마오 자서전', 99년도 국민투표를 전후로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던 당시 이 곳에서 목숨 걸고 르포를 썼던 기자의 '동티모르, 배반당한 사람들'이라는 나름대로 유명한 책 등등...
그 중에서도 '알기 쉬운 테툼어 기초'와 '테툼어-영어사전'은 탐나더라고요. 그래서 그 책들 구하기 쉽냐고, 나도 사고 싶다고 얘기했더니 '알기 쉬운 테툼어 기초'는 자기에게 한 권 더 있답니다. 그냥 줄 테니까 쓰라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다윈 가는 사람들 편에 부탁하여 사전만 샀어요. 여기서 한국으로 돌아간 후 내가 동티모르에 있었다는 걸 평생 기분 좋게 떠올릴 수 있으려면 여기 생활 자체에 가장 열심이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테툼어 자체는 굉장히 외래어로부터 많이 영향을 받는 '성장하는 말'이기 때문에 조금만 공부하면 뭔가 될 듯도 싶어요.
무엇보다 내가 두 발을 딛었던 땅의 사람들에게 내가 당신들에게 이만한 애정과 존경을 가지고 있다는 걸 표현하고 싶거든요. 제국주의 침략자들과 함께 아무 정보도 들어보지 못한 조선 땅까지 건너왔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학교를 세우고 고아들을 보살폈던 벽안의 이방인 선교사들만큼 헌신적일 수는 없을지라도 최소한 그 애정이나 존경 등의 마음은 비슷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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