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티모르에서 평화유지군으로 있는다는 것은 한국에서 주한미군으로 있는 것과는 좀 다릅니다. 물론 달라야 하고요. 거창하게 무슨 일을 하고 어쩌고를 떠나서 일단 이번 장에서는 여기 생활의 큰 특징 중의 하나인 끝없는 만남과 갈등에 대해 이야기할까 합니다.
'만남과 갈등'도 굉장히 거창하게 들리는데, 별 게 아니라, 피부색 다르고 문화와 언어가 다른 사람들과 자꾸 만나다보니 생길 수밖에 없게 되는 감정의 골이라거나 혹은 친밀감 등을 적은 부분들을 모았습니다. 또, 같은 민족임에도 서로 싸울 수밖에 없게 되는 인종 갈등이라거나 동티모르 내부에서의 갈등에 대해서도 함께 적어 봅니다(9월 21일자까지).
***2월 22일**
인도네시아에서 인종갈등이 대참사를 불러왔군요. CNN에서 “목이 베어진 시체가 몇 구...”하는 것 같아 영어가 짧아서 잘못 들은 줄 알았는데, 신문을 보고 확인해보니 정말이네요. 동티모르보다는 이곳을 식민지로 두고 있던 인도네시아가 훨씬 더 불안정하고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 같아요.
인도네시아인들이 동티모르 독립에 그렇게도 부정적이던 이유 중 하나가 다민족 국가인 인도네시아의 분열을 걱정했기 때문이라는데 직접 이곳에서 느끼자니 피부에 소름이 다 돋을 정도입니다. 한 소수민족이 자기 구역에서 독립하겠다고 할 때마다 거리에 시체가 쌓이고 총격이 오가고 방화와 약탈이 벌어지는 나라 바로 옆에 붙어서 상황을 보고 있자니...
***2월 26일**
국제면 기사들에 자꾸 눈이 갑니다. 이 곳이 어느덧 약간씩 익숙해진다는 뜻이기도 하고, 여전히 동티모르에 대해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소리기도 하겠죠. 어쨌거나 인도네시아 칼리만탄 지역의 대량 '인종청소'는 그 잔인함과 처참함이 엄청나더군요.
다음 평화유지군 파병 지역도 또 인도네시아가 될 것 같다는 불안함이 가중되는 중입니다. 초기의 불안함에서 벗어나 침착하게 이번 사건을 바라보니 문제는 역시 수하르토 강점기의 잘못된 유산에 있더군요.
수하르토의 철권통치는 인종문제에 있어서도 아주 잘못된 접근 방식을 택했습니다. 인도네시아의 통합을 위해 강제로 주민들을 이주시키곤 했던 것이죠. 수천 년 팔레스타인인들이 살아온 땅에 갑자기 이스라엘이 들어가 '이스라엘' 하고 선포한 것과 똑같은 꼴이랄까요?
그래서 중동은 여전히 화약고 상태에 있는 것이고, 인도네시아도 군부라는 강력한 물리력이 사라지자 곳곳에서 잠재되어 있던 불씨들이 살아나는 것 아니겠어요?
보르네오섬의 칼리만탄 지역도 토착민들은 다약족이라 불리는 종족들이었습니다. 수하르토는 이 지역에 마두라섬에 살고 있던 마두라족을 강제로 이주시킵니다. 다약족은 이 과정에서 자신들의 중심 거주지역에서 밀려나 칼리만탄의 변두리로 쫓겨가게 됩니다. 당연히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죠.
이번 사태는 언제든 폭발할 수 있었던 불씨가 와히드 현 인도네시아 대통령의 무능함과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들썩거리는 인종문제의 영향으로 불이 붙었다는 데서 비롯됩니다.
칼리만탄 주정부 재조직 과정에서 다약족 공무원 두명이 자신들이 납득 못할 사유로 해고됩니다. 이들은 자신들 대신에 고용된 마두라족 공무원과 그 일행들을 포함 다섯 명을 살해하고, 마두라족은 또 여기에 대해 다시 살해로 보복합니다.
이 과정에서 피가 피를 부르고, 결국 상황은 다약족이 창과 만다우라고 불리는 칼, 불어 쏘는 독침 등의 재래식 무기로 무장한 채 마치 준비되어온 것 같은 '인종청소'를 자행하는 것으로 진행이 됩니다.
아직도 '적의 머리를 베어 가지고 있으면 전사의 힘이 강해진다' 따위의 미신을 믿고 마두라족의 머리를 자르고 있는 다약족을 보면 도대체 여기가 과연 인터넷으로 세계가 연결되어 있는 21세기인지 구석기 시대인지 분간하기가 어렵습니다. 다약족이 그르다 옳다의 문제가 아니라, 도대체 이제껏 사람들이 살아오면서 이루어내었다 자부하는 업적들이 얼마나 불균등하게 배분되어 왔는지를 새삼 깨닫게 되는 겁니다.
요즘은 동티모르 정치사를 번역하는 중이어서 날마다 '티모르 저항의회'니, '티모르 사회당'이니, '티모르 국민당'이니 하는 정치 세력들의 이름을 외우게 됩니다. 고등학교 정치시간마냥 이 단체는 우익 민족주의 정당, 이 단체는 맑스레닌주의 정당, 이 단체는 중도좌파, 이 단체는 기독교당... 그러다가 눈을 들어 바다건너 보이는 인도네시아를 바라보고, 아직도 허리춤에 마세테(이 지역 사람들이 사용하는, 우리가 흔히 정글도 라고 부르는 칼)를 차고 땔나무를 베어 가는 동티모르인들을 바라보다 보면 도대체 이념이란 게 이 사람들의 생활과 무슨 상관인지 의심하게 됩니다.
당장 필요한 것은 말 그대로 '땅과 자유'일 뿐인데도 유엔이나 국제사회는 자신들의 색안경을 벗을 생각도 하지 않으면서 올 총선에 의석은 몇 석으로 한다, 의장직은 누가 임명하고 티모르인 비율은 어떻게 한다 따위의 책상공론이나 반복하는 중이겠지요.
불을 보듯 뻔합니다. 선거철이 다가오고 티모르인들의 정치의식이 고조되면 그들은 의석이나 행정구역상 의원 비율 따위는 별 의미가 없을 겁니다. 그 때 그들은 돌멩이를 집어들어 유엔건물로 날리겠지요. “너희들 먹고 즐기는 데 돈 쓰지 말고 우리에게 일자리나 달라!”고 외치면서.
유엔 직원들 중 상당수가 아무 의욕 없이 단지 높은 보수와 한가한 업무에 유혹되어 이곳으로 왔다던데, 그렇다면 동티모르인들의 요구에 그들은 뭐라고 말을 할 수 있을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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