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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병일기-동티모르 주둔 1년<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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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병일기-동티모르 주둔 1년<7>

“영어는 권력이지요”

***3월 2일**

외국에 나오면 늘 느끼곤 하는데, '영어는 권력'입니다. 이 말을 다시 쓰자면, 한국사회에서 일상적으로 서울대생이라는 위치에 있다보니 느끼곤 하는데, '학벌은 권력'이라는 말과 같은 말이지요.

여러 나라 사람들이 모여있는 자리에서(특히 편견이 섞여 있을지도 모르지만, 미국과 호주 사람들이 많이 이런 일을 저지르는데) 누군가를 윽박지르듯 심하게 몰아 세우는 사람들은 대개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마치 잘못한 애를 타이르는 듯한 말투로(이 또한 영어가 짧은 제가 뉘앙스를 구별 못해서일 수도 있겠지만) 사소한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들에게 시시콜콜 충고를 하죠.

엊그제 마나투토라는 필리핀 대대 담당지역에 갔을 때 한 유엔 직원이 저를 보고 "이 길로 차를 들여오면 어떡하느냐, 보도블록이 깨어지지 않느냐? 이러면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냐" 그래요.

그 사람이 멀찌감치 서서 이야기하기에 잘 들리지 않더군요. 잘 들리지 않는다고 몇 번 되물었더니 기고만장입니다.
"넌 그런 기본상식도 없냐? 여기가 길인데 왜 이걸 밟았냐? 다른 차들 다 돌아서 들어오는 거 안 보이느냐?"

이번엔 가까이 다가와서 얘기하길래 잘 들려서 중얼중얼 열심히 대답해 줬습니다.
"나 오늘 여기 처음 왔고, 여기 밟으면 안 되는지 몰랐다. 나도 보도블록이 깨지면 안 좋을 것 정도는 안다. 미안하다. 그렇다고 나한테 소리지르면 어떡하나? 처음 온 손님한테 이러기냐?"

대개 동양인들은 영어를 잘 못한다 생각했는지, 더구나 군인이니까 더더욱 그러려니 생각했던지 제가 영어로 대꾸하니 갑자기 소리지르던 말투가 누그러집니다.
"아, 그래? 그래 처음이니까. 다음부터는 저 옆으로 돌아 들어오면 된다."
그러더니 후다닥 사라지더군요. 씩씩거리며 제 차로 쫓아오던 때와는 달리.

이런 건 사실 유엔 직원들만의 치사한 구석일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원래 유엔에서 영어로 텃세 부리는 사람들이 많다더군요. 모두가 영어를 유창하게 모국어처럼 구사할 수야 없을 테니까요. 그러나 일상적으로 영어가 권력이라고 느끼게 되는 건 이런 경우보다는 오히려 제가 겪었던 다음과 같은 경우입니다.

스페인에 갔을 때였습니다.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영업소에서 여행자 수표를 바꾸려는데 수수료를 떼려더군요. 그 영업소는 '론리 플래닛'이라는 여행 가이드북에서 알려준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대리점이고, 번듯하게 간판에도 그렇게 써 놨는데 말이죠.

스페인어로 떠듬거리며 "무슨 대리점에서 수수료를 받냐? 이제까지 스페인 어느 대리점에서도 수수료는 안 받더라"고 얘길 했더니 대강 "우리는 그렇게 한다. 이제껏 그렇게 해왔으니까 싫으면 네가 다른 영업소로 찾아가라" 하면서 배짱 부리는 겁니다.

안되겠다 싶어 영어로 말을 바꿨습니다. 뭐, 영어라고 더 잘할 건 없지만 여행 경험상 세계 어디를 가도 영어권 국가가 아닌 나라에서는 영어에 대해 콤플렉스가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죠.

"그래? 좋다. 매니저 불러와라. 매니저 불러오고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스페인 총국에 전화 걸어보고, 그리고 당신들이 나한테 사기 친 거라면 이대로 그냥 안 돌아간다. 내가 여기서 시간 손해보고 기분 나빴던 거 다 받아내고 돌아갈 테다."

그러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가 나타납니다.
"원래 우리는 수수료 받고 바꿔 주는데, 당신이 여기서 버티고 있어서 영업에 방해가 돼서 그냥 수수료 없이 환전해준다. 그냥 조용히 나가달라."

기분이 몹시 나빴지만, 열차 시간 때문에 그냥 나왔습니다. 계속 떠듬거리고 스페인어로 얘기했다면? 그냥 저를 무시하고 자기들 일을 봤겠죠. 동양 관광객이 기다리다 지쳐 수수료를 지불할 때까지. 그 작은 마을에서 환전할 수 있는 곳은 거기뿐이었거든요.

그래서 영어가 학벌하고 똑같다는 겁니다. 누구는 날 때부터 갖고 태어나고 누구는 다른 말을 갖고 태어났는데 그게 권력화되고 모든 이에게 짐이 되고 스트레스가 된다는 건 학벌과 쌍둥이 꼴입니다.

누구는 공부 좀 잘하는 능력을 갖고 태어나고, 누구는 옷을 잘 만든다든지 노래를 잘하는 능력을 갖고 태어났는데 공부 잘 해서 학벌 좋은 사람은 평생 일자리를 잡을 기회도 늘고, 저의 경우도 그렇지만 군대에 와서도 운 좋게 하고픈 일을 할 기회도 늘어나잖아요.

학벌 없으면 무조건 몇 백대 일, 몇 천대 일의 경쟁률을 뚫어야만 하는 겁니다. 영어 잘 하면 오라는 데가 넘쳐서 고민이고, 한국말 아무리 잘 해봐야 국어선생님 하기도 힘든 게 우리 현실 아닌가요? 똑같은 거란 생각이 듭니다.

***3월 7일**

여기 상황은 이제 완전히 선거 분위기로 접어든 모양입니다. 민병대의 위협보다는 불만 있는 각계 계층들의 문제가 더 심각합니다. 어제는 경찰서 앞에서 여기 젊은이들이 또 시위를 하며 돌을 던져댔어요. 딜리에선 종종 있는 일이지만, 바우카우에선 최초라고 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이 곳 정당들이 지지기반을 끌어대기 위해 종종 현실을 왜곡하고 여론을 호도 한다는 데 있습니다. 예를 들어, 메이저 정당에 속하는 동티모르 저항의회(동티모르 하면 떠오르는 인물, 사나나 구스마오가 의장직을 맡고 있는...)를 비판하기 위해 젊은이들을 향해 "나이 많은 동티모르 저항의회는 당신들의 고통을 모르고 여전히 유엔에만 기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성공하려면 젊은 당신들을 위해 인도네시아와 호주하고 다시 손을 잡아야 한다"라고 말하며 선동하는 식이죠.

몇 단계씩 논리를 건너뛰면서 동시에 말도 되지 않는. 그런데, 세계 어디서나 이런 말도 안 되는 선동이 잘 먹힌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사회 일각에서 "지금 정부는 국가재산을 북한에 퍼주고 있다. 그래서 나라가 망해간다"하고 입에 게거품 무는 것과 똑같이.

한시 바삐 이 곳 사람들에게 정치적 안정과 민주적 질서가 잡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노력 중이에요. 도와주러 왔다가 돌 맞고 싶지는 않은 노릇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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