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파병일기-동티모르 주둔 1년<8>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파병일기-동티모르 주둔 1년<8>

계속 비만 오면 아주 조용한 나라

***3월 8일**

3월 5일 저녁 9시경 바우카우 신시장(독립 이후 전 바우카우 중심가 건물들이 대부분 민병대에 의해 파손되고 난 후 유엔 기관들을 중심으로 뉴타운이 건설되었고, 구시장의 대부분 기능 역시 신시장으로 옮겨오고 있는 중입니다) 근처에서 민간경찰 긴급대응반(기동순찰대 비슷한...)과 현지 주민들간의 충돌이 있었습니다.

당시 충돌의 원인에 대해서는 현지까지도 주민 측과 긴급대응반 측의 입장에 차이가 많은 터라 사실관계만 이야기하자면, 긴급대응반이 주민 3인을 체포하여 경찰 본부로 연행하였습니다. 다음날 저녁 주민들이 경찰본부로 몰려가 항의를 벌였고, 이 과정에서 성난 주민들은 경찰 건물에 돌을 투석하였고, 경찰은 인근 태국군의 도움을 받아 사태를 진정시키고 주민 16명을 검거했습니다.

바우카우에서 최초로 일어난 유엔에 대한 적개감의 표출이었던 데다가, 검거된 주민 중 한 명이 약간의 실탄과(총은 없고) 수류탄 한 발을 휴대한 게 발견되어 다음날(7일) 새벽 동티모르 전역으로부터 바우카우 지역에 대한 비상한 관심이 집중되기 시작했습니다.

7일 오전이 되자 주민들은 또 시위대를 조직해서 이번에는 긴급대응반(요르단 경찰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주둔지로 향합니다. 주민들은 도로를 막고 돌로 바리케이트를 쌓고 요르단 긴급대응반에게 돌을 던지면서 시위를 합니다. 요르단 경찰들은 주둔지 방호가 목적이었다고 주장하긴 하는데, 하여간 주민들에게 투석기를 사용해서 돌로 맞대응하고 최루탄(요르단 경찰들은 그냥 연기였다고 주장합니다. 도대체 뭐가 맞는 소리인지...)까지 사용하며 주민들을 바리케이트 건너편에 묶어 둡니다.

상황이 여기까지 번지자 주교님과 동티모르 저항의회 바우카우 지역 의장이 이 곳으로 와서 중재에 나섭니다. 중재과정에서 또 약간의 마찰이 생겨서 경찰 차량 앞 유리와 주교님 차량 뒷유리가 깨집니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또 태국군이 출동하고 태국군 경호 하에 경찰 대표가 도착해서 주민대표들과 회의를 제안합니다. 회의 도중 시위대는 해산하고, 회의에 참여하러 오던 대표들 중 이곳 지역행정관 차량이 신원미상의 주민들로부터 습격을 당해 차량은 덤불 속에 처박히고, 지역행정관 비서가 경상을 입습니다.

어쨌건 회의는 시작이 되고, 회의 도중 경찰본부 뒤에 있는 회교사원에 누군가 방화를 저지릅니다.

8일 오늘은 여기 유엔 사무총장 특사(형식적으로는 최고위직입니다)와 각종 기구 최고 책임자들이 모두 모여서 상황을 보고하고 간단한 대응방안을 논의합니다. 그 와중에 신시장 쪽에서는 주민들이 플래카드를 들고 나와 피케팅을 합니다. ‘우리는 유엔과 평화유지군을 사랑한다. 그러나 요르단 긴급대응반의 행태는 용납할 수 없다.’ 현재 상황은 계속 진행중이고 동시에 많은 의문점을 남깁니다.

우선 사건의 발단입니다. 처음에는 그저 술취한 젊은이 3명을 긴급대응반이 체포했는데 그 용의자의 친구들이 우르르 경찰본부로 몰려와서 돌을 던진 사건인 양 보고되었던 일이 왜 이리 커졌는가 하는데 의문이 있습니다.

주민들은 그 젊은이들은 근처 다른 마을 젊은이들이 신시장에 쳐들어와 물건을 훔쳐간다는 정보를 입수해서 자체 방호를 서고 있던 것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조사 결과 긴급대응반은 자신들의 순찰구역인 신시장에 순찰을 돌려고 진입하려 했으나 이 자체 방호단에게 저지당했고, 주민들은 긴급대응반이 이를 범법행위로 간주해 강제로 방호단을 연행한 것이라 받아들입니다.

이 배경에는 기본적으로 요르단 긴급대응반의 주민들에 대한 고압적인 태도와 종교적 차이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회교사원 방화는 아마 요르단인들에 대한 주민들의 반감이 극단적으로 표출된 경우일겁니다.

문제는 이런 배경에 대한 설명 없이 경찰 측에서 문제를 단순히 처리하려 했다는 것이죠. 긴급대응반에게 순찰구역을 따로 배정하고 그들 자의로 수사 및 구금의 권리를 주었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게 중론입니다.

결국 경찰 측에서는 “규정상 하자는 없었다. 하지만 앞으로 긴급대응반의 모든 작전은 우리의 통제에 따르게 될 것이다”라는 모순된 입장표명을 합니다. 규정상 하자가 없는데 왜 일국의 경찰 대대를 통제합니까?

회의장에 오던 지역행정관 차량 습격사건도 의문입니다. 회의장에 오던 차량은 동시에 총 4대가 이동하고 있었는데, 선두에는 태국군 차량이 있었고 그 뒤에 엘 세트(L7, 이게 이름입니다. 본명 대신 모두 이렇게 부르더라고요)라는 음험한 정치깡패를 연상시키는 사람이 따르고, 맨 뒤에 지역 행정관과 동티모르 저항의회 멤버들이 탄 차가 따랐습니다.

그런데 이 엘 세트라는 사람과 동티모르 저항의회가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있거든요. 그리고, 엘 세트의 차는 아무 일 없었는데 맨 뒤에 오던 행정관 차량만 습격을 당한 겁니다. 뿐만 아니라 행정관 차량에 타고 있던 동티모르 저항의회 사람들 중 둘은 최근에 익명의 누군가로부터 방화위협을 당하고 있었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엘 세트를 의심스레 쳐다봅니다. 유엔 감시단의 비공식 루트를 통한 정보에 의하면, 이 일련의 사건의 배후에 엘 세트와 엘 세트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치는CPD-RDTL(굳이 번역하자면 동티모르 민주공화국 지지 연합 정도가 되겠지만, RDTL, 즉 '동티모르 민주공화국'이라는 표현 자체에 약간의 정치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포르투갈로부터 인도네시아로 정권이 넘어갈 때 약 일주일 정도 존재했던 짧은 독립국을 RDTL이라고 부르는데, 당시 성급하게 독립 선포를 함으로써 오히려 인도네시아에게 침략의 신호를 보낸 셈이었던 일군의 독립주의자들이 세웠던 바로 그 나라를 일컫습니다. CPD-RDTL은 바로 이 RDTL을 재건한다는 강령을 내건 정치단체입니다. 마땅한 번역이 힘들어 계속 이렇게 쓰겠습니다)이라는 정치조직이 개입되어 있다더군요.

하지만, 엘 세트 쪽에서는 오히려 동티모르 저항의회가 이 사건의 배후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엘 세트가 경영하는 레스토랑이 시위대의 시위 때 투석으로 피해를 입었거든요.

결론적으로 이번 사건(요르단 경찰과 주민들간의 알력)을 틈타 동티모르인들 간의 정치적인 갈등이 본격적으로 표면화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더욱 큰 문제는 대개의 (때로는 폭력적이기도 한) 청년 그룹들은 동티모르 저항의회보다는 CPD-RDTL에 우호적인데, 이들 중 한 명이 수류탄을 소지한 채 검거되었다는 사실은 엘 세트로부터 무기가 흘러나오고 있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는 겁니다.

실제로 엘 세트는 경찰의 거듭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경찰 업무를 돕겠다며 종종 소화기(小火器)로 무장한 채 허가 받지 않은 검문소를 설치하고 수사를 벌이는 일을 했었습니다. 이번에도 누구도 요청하지 않았는데 엘 세트는 “내 사람들을 풀어 조사를 돕겠다”며 지역사회에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중입니다.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 지는 더 두고 봐야 하겠지만, 이번 사건이 동티모르 전역에서 주목을 받는 이유는 이 곳 정치지형에서 벌어질 수 있는 상당부분의 갈등이 모두 이 사건에서 표출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그것도 상대적으로 다른 지역보다 안정적이고 평화롭던 바우카우에서 어느 순간 작은 계기로 급격히 벌어진 일이라는 데 모두들 주목하게 되는 겁니다.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 궁금하군요.

***3월 9일**

오늘은 예의 그 엘 세트와 기념촬영을 했습니다. UNMO(유엔 군 감시단, 왜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이영애가 하는 그 역할 기억나시죠?)한테 찾아가서 “엘 세트하고 인터뷰한다고 들었다. 혹시 우리도 그 자리에 동석할 수 있겠나?” 했더니 재깍 데리고 가서 인사시켜주더니 기념사진을 찍도록 해주더군요.

그리고... 인터뷰를 참관해볼까 했더니만 후딱 우리만 내버려두고 다른 곳으로 장소를 옮겨버립니다. 뭐, 군 감시단이라는 자리가 공정해야 하고 분쟁 해결에 도움이 되어야 하는 역할이니까 다른 어느 기관에서 자신들의 조사과정에 참여하는 걸 극도로 꺼린다는 상황에 대해 새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부탁하기 어려운 일을 부탁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어 미안했었고요.

경찰서 안에 군 감시단 사무소가 있기 때문에 사무소를 나와 복도를 걸어가다 안면 있는 경찰을 한 명 만났습니다. A소령님이 한마디 던지셨죠.
“엘 세트가 여기 와 있더라구요.”
경찰 하는 대답이 가관이죠.
“그 들고 있는 권총 한발만 쏘지 그래요. 그놈만 없으면 동티모르 전역의 문제가 사라질텐데.”

현 상황에 대한 경찰의 인식이 잘 드러나는 대답입니다. 엘 세트가 문제가 많은 인물이기야 하죠. 사실. 그래도 그렇지... 경찰 긴급대응반과 현지 주민들간의 잦은 충돌은 이런 인식이 경찰활동 저변에 깔려 있다는 걸 볼 때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닌 듯 싶습니다.

어제 밤부터 오늘 새벽까지는 최근 들어 최초로 아무 일 없이 조용한 밤이 지속되었습니다. 이 곳 태국군들, 이렇게 표현하더군요.
"어제는 모처럼 별 일 없는 밤이었다. 이 모든 것이 다 훌륭한 여러분들이 열심히 노력해 주어서...가 아니라, 단지 비가 엄청나게 쏟아졌기 때문이다."

계속 비만 오면 동티모르는 참 조용한 나라가 될 겁니다. 그 동안 우기였기 때문에 안정적이었다는 말이 돌던데, 정말인지도 모르겠어요. 이 사람들, 비 오면 아무도 돌아다니지 않습니다. 차들도 유엔 차 외에는 거의 안 움직이고요.

이제 건기로 접어들어 가고 있고, 딜리에서 대학을 다니는 학생들이 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오기 시작하면 아무래도 여기도 시끌시끌해질 거라 말들을 합니다.

그런 대로 문제점들이 표면화되고, 갈등요인들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지고 대응방안에 대한 논의가 오고 감에도 불구하고 동티모르를 바라보는 외신들의 시선을 보면 상황이 그다지 좋지만은 않군요. 여기서 상황보고 받아볼 때에는 그냥 그러려니, 원래 CPD-RDTL은 그런 데니까... 엘 세트는 늘 말썽이니까... 하면서 지냈는데, 오늘자 시드니 모닝헤럴드는 동티모르 전역이 심각한 정치적 혼란 상태로 접어들은 양 헤드라인을 뽑았습니다.

'동티모르 지도자 구스마오 암살 기도, 성난 군중들 유엔 직원들 습격해. 바우카우에서는 회교 사원에 방화'

이렇게 최근 일주일간의 사건들을 동티모르 전역으로 확대해서 생각하니까 확실히 분위기가 뒤숭숭해진 것은 틀림없는 일인 듯 합니다. 수도 딜리에서는 구스마오에 대한 암살모의가 녹음된 테이프가 발표되고(구스마오에게 누군가 제보한 모양이더군요. '암살에 수류탄 사용' 어쩌고 하는 내용이 녹음되었다던데...) 실제로 용의자들 아지트에서 수류탄 몇 발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상황이 그저 구스마오의 추측대로 인도네시아의 사주 혹은 인도네시아 내 동티모르에 대한 불만세력의 개인적 지원을 등에 업은 전 반독립파의 보복기도라면 별 문제가 없는데(실제로 용의자들 중 하나는 동티모르 탄압을 목적으로 결성되었던 인도네시아 특전부대 코파수스의 비밀 공작원이었음이 밝혀졌습니다) 그런 견해는 경찰과 구스마오 측의 주장일 뿐이고, 이런 상황에서도 또 일련의 시위대가 유엔 건물들을 둘러싸고 무고한 연행(그 코파수스 요원을 포함한 용의자들을 지칭)에 항의한다며 시위를 벌인 겁니다.

요즘 들어 이 곳 상황에 대해 저 역시 혼란을 느끼는 것은 결코 문제가 경찰의 대응양상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스마오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지도가 몹시 높기 때문에 구스마오의 진술과 유엔과의 공식 채널을 확보한 동티모르 저항의회의 입장이 마치 정설처럼 받아들여지는 것도 문제의 한 축을 형성하는 거죠. 내부적인 정치문제가 심각하고, 동티모르 저항의회에 대한 일부 청년들의 불만이 별다른 표출구를 못 찾고 엘 세트나 CPD-RDTL 같은 여타의 권력에 가서 붙어버리는 것 역시 문제입니다. 일단은 상황을 좀 더 지켜봐야겠네요.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