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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병일기-동티모르 주둔 1년<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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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병일기-동티모르 주둔 1년<9>

“한국? 50년 전쟁없으니 평화의 나라”

***3월 10일**

최근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을 가지고 필리핀 연락반 사람들하고 잠시 얘기를 나눴습니다. 이 사람들, 처음에 시장에서 긴급대응반이 주민들 체포할 때엔 우연히 같이 있었고, 다음날 주민들이 긴급대응반 진지 앞에서 데모하고 최루탄 터지고 할 때에는 조사차 시장에 갔었다가 말려 들었다더군요.

“위험하지 않았나? 총도 안 들고 갔었다면서 걱정도 안 되더냐?” 하고 물었더니 이 사람들 하는 말이 걸작입니다.

“필리핀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전쟁중이다. 공산혁명 시도가 있었고, 회교 분리주의자들이 계속 말썽을 일으키고 있다. 이 전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난 사관학교 졸업하자마자 전방에서 싸웠었다. 이마에 흉터는 그 때 총알이 스치고 간 자국이고, 몇 번이고 부상당하고 죽을 고비도 넘겼다. 동티모르 상황은 별 것도 아니고 이건 위험 축에 끼지도 못한다.”

그 말을 듣고 나서도 대단하다는 생각보다는 뭐랄까, 평화에 익숙해진 나라 국민으로서 보건대, 이 사람 전쟁광이거나 마초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먼저 들더군요. 그래서 한마디 쏘아 붙였습니다.

“세계적인 차원에서 보면 동티모르 상황은 명백히 정상이 아니다. 지금 우리는 불안한 정국에 있는 것이고, 군인이지만 최대한 안정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이 사람, 지지 않고 또 한마디 합니다.
“넌 한국에 있어서 잘 모를 거야. 뭐, 너희 나라는 언젠가 다시 통일될 거고, 전쟁이 없어 온지 벌써 50년 정도 됐지? 평화로운 나라 사람이니까, 어찌 알겠어.”

뭐라 할 말은 없는데, 씁쓸합니다. 이 씁쓸함의 근원을 잘 모르겠군요. 우리 나라도 불안하다고? 부시가 지금 다 되어 가는 듯한 밥에 재 뿌리고 있는 중이라고? 아니면, 필리핀 군인들 너희는 너무 호전적이라고? 아니면, “아 당신네 나라가 그렇게 어려우셨군요. 정말 대단하십니다”하고 비꼬는 마음이 들어야 하는 건가? 진심으로 필리핀 인들의 어려운 사정에 경의를 표해야 하나?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가슴 한 구석에 앙금이 남습니다. 절대 서로를 이해 못할 것 같은 느낌, 대화 도중 어느 순간 높은 벽이 솟아 오른 듯한 느낌이 드는거죠.

멕시코에 갔을 때 함께 어학프로그램을 듣던 미국인에게 사파티스타의 얘기를 해줘봐야 그 사람은 그저 사파티스타라는 게 멕시코 갱단인가보다 생각할 따름이었습니다.

그게 아니라고, 사파티스타는 전설적인 멕시코의 혁명영웅 에밀리아노 사파토의 정신을 이어받는다고 만들어진 반란군이고, 멕시코의 미래를 위해 존재하는 거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노벨상 수상자 주제 사라마구나, 노엄 촘스키 같은 학자들을 비롯해서 세계 각지의 지식인들이나 사회단체들이 지지하는 그런 유명한 단체라고 설명해봐야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인가 하고 쳐다볼 뿐이었죠.

마찬가지로 한국에 사는 저도 누군가 이슬람 근본주의니, 무슨 종파니 누가 얘길 해봐야 그게 다 거기서 거기 같습니다. 필리핀 군인이 전쟁을 이해 못하는 저를 보고 평화에 흠뻑 젖어 있는 유치한 녀석처럼 보는 것도, 제가 그들을 별나라에서 스타워즈나 벌이는 사람들처럼 보는 것도 마찬가지 노릇이겠죠.

***3월 11일**

오늘 내일 중 대규모 소요가 있을 거라는 소문이 돌고 있는데 일단 오늘은 조용히 넘어 갔네요. 그래도 모두들 잔뜩 경계의 태세를 갖추고 있습니다. 민간인인 유엔 직원들은 군인인 우리처럼 무장하고 있을 수가 없기 때문에 숙소를 아예 이 곳 부대 안으로 옮겼어요.

태국군들은 계속 비상대기 상태로 주요 시설물 경비를 24시간 서고 있고, 사건의 당사자인 요르단 긴급대응반은 상황발생 거의 일주일이 되어가는 지금까지 주둔지에서 한 발도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유엔 과도행정부(UNTAET)측에서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는 경찰 조사와는 별개로 특별 조사반을 구성해 요르단 긴급대응반으로 파견했습니다.

현지 주민들로부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들이 요르단군을 싫어하는 게 단순히 고압적인 자세와 종교적 갈등만은 아니더군요. 확인되지 않아서 몹시 조심스러운 사안이긴 합니다만, 주민들은 계속 요르단 경찰들이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돈을 지불하지 않은 적이 많았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포르노잡지를 주민들에게 팔려 하고(길에서 키스했다고 시위하는 나라에서... 이런!), 심지어는 성추행에 강간까지 저질렀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시간이 지난 지금도 확실하게 진실이 밝혀지지는 않았지만(밝혀지기 쉬운 일도 아니고, 진실을 덮어 두는 게 어쩌면 더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길일 수도 있겠지요) 정황을 보건대 이런 나쁜 소문들의 상당부분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요르단이라는 나라에 대해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군부대이건 경찰력이건 간에 적어도 동티모르에서는 요르단인들이 주둔중이던 곳마다 이런 비슷한 사건들이 발생했습니다. 그러니 더더욱 신뢰를 잃게 마련이지요.

이쯤 되다보니 유엔 과도행정부측에서도 당연히 요르단 경찰들에게 무작정 신뢰를 보일 수는 없게 되었습니다. 가재는 게 편이라고, 유엔경찰 측에서는 긴급대응반 편을 계속 들어주지만(소문은 확인되지 않았고, 요르단 경찰들의 체포절차는 적법했다고 반복주장하고 있습니다) 현지 분위기는 유엔 과도행정부이건 여기 평화유지군이건, 현지 주민들이건 간에 그다지 요르단 경찰들에게 호의적이지 못합니다. 조사가 제대로 진행되어 사태가 적법하고 정당하게 해결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이번 사건이 중요한 것이, 이 사건 자체가 심각하다기보다는 이 사건에 대한 처리가 곧 앞으로 발생할 가능성이 무척 높은 여러 가지 위법 혹은 애매한 사항에 대한 선례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경찰차량에 돌을 던지는 일, 시위진압 경찰에게 타이어를 불태우며 바리케이트를 쌓고 공무원 차량을 습격하여 차량에 불을 지르고, 자신과 다른 종교단체의 사원에 방화를 하는 등의 일등은 이제 곧 선거철이 다가오면서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는 일이거든요.

그래서 경찰은 더더욱 주민들에게 약하게 보이기 싫어하고, 유엔 과도행정부 측으로서는 가뜩이나 유엔에 대해 불만이 높아지는 주민들 여론을 무시할 수 없는 노릇이고, 여기 각 정당들로서는 이 번 사건을 통해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고자 자꾸 불난 데 기름을 끼얹고 있는 중이고... 아주 복잡합니다.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해결책은 이미 물 건너 간 듯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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