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6일**
그냥 평범한 하루였습니다. 가슴팍에 '마린'하고 써 붙인 미군 해병대 녀석들이 와서는 불타버린 회교사원을 복구해 준다고 시끌벅적, 어디서 다 떨어진 운동화와 티셔츠 몇 벌 들고 오더니 키세스 초콜릿 하나(한 봉지 말고 그 낱개 하나)와 함께 '기증식'까지 벌여가면서 난리법석. E 대위님 왈, "쩨쩨하게 다 큰 어른 손에 초콜릿 하나 쥐어 주는게 무슨 놈의 기증이냐!"
잘 사는 나라 사람들이 왜 이리 짜게 구는지 몰라요. 이 녀석들이 정말 싫었던 건, 차를 주차해두고 책이나 좀 볼까 하고 책을 폈는데 옆에 있는 이 녀석들 차가 시동이 걸려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유는 단 하나, 에어컨으로 냉방해둔 차가 더워질까 봐. 갑자기 미국인들이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어딘가에서 읽었던 '에어컨과 히터를 함께 틀어 환기와 난방을 동시에 하는 겨울철 미국인 가정'이 오버랩 되면서 짜증이 벌컥 솟았습니다.
***3월 29일**
지난번 딜리에 갔을 때 사소한 말다툼이 있었습니다. 딜리 평화유지군 주둔지인 고베 하우스에는 허가된 차량 이외의 차는 들어갈 수 없게 되어 있고, 약 20미터 떨어진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그러나 잠시 짐을 싣기 위해서 캠프로 들어가고 나가는 것 정도는 이제껏 통상 정문에서 경계를 서는 경비병의 허가를 얻으면 가능했었어요.
도착한 날도 그렇게 허가를 얻고 별 문제없이 들어갔다 나왔다 했었는데, 돌아오는 날 경비병이 짐 좀 실으러 10분만 들어가자는데 못 들어가게 막는 겁니다. 그런 법이 어디 있냐고 금요일날도 들어갔었다고 하면서 실랑이가 벌어졌는데 주위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경비병더러 “10분 들어가겠다는 걸 가지고 뭘 그러느냐”고 충고하기 시작하자 경비병이 결국 10분만이라며 허가를 내줬어요.
들어갔다 나오는 데 또 불러 세워서는 “이번엔 내가 특별히 봐줬다. 다음부터 그러지 마라”며 마치 제가 대단히 큰 잘못과 편법을 저지르는 양 뭐라고 그러는 겁니다. 이 녀석 말이 영 싸가지가 없는 것이, “봐라, 규정에 허가받은 차 말고는 못 들어가게 되어 있다”라며 규정서류를 꺼내 눈앞에 찔러대듯 들이밀며 “넌 영어도 못 읽냐”고 떠들어대는 겁니다.
여기 와서 이런 싸가지 없는 녀석들 정말 많이 만납니다. 필리핀 군인인데, 신경질 나서 저도 한마디 했죠.
“10분만 짐 실으러 들어가는게 그렇게 큰 문제냐? 게다가 넌 무슨 말을 그렇게 무례하게 하냐?”
둘 다 존칭 같은 거나 공손한 표현 따위는 싸그리 날려 버린 채 거의 싸움에 가깝게 떠들어대고 있으니까 행인들이 몰려들었고 결국 그 주위에 둘러섰던 사람들이 그 필리핀 군인을 보며 “이봐, 짐 있다는데 너무하잖아” 등등의 말로 제 편을 들어줬던 겁니다.
그래서 문제없이 캠프 안으로 차를 가지고 들어갔죠. 그런데 나오려는 데 다시 또 마치 자기가 옳은데 내가 무리한 요구를 했고, 그래도 한 번 인심써서 봐줬으니 다음엔 그러지 말라는 식으로 타이르는 겁니다.
기분이 나빠져서 “캠프 관리 규정이 존재하는 이유는 다 평화유지군 요원들의 안전과 편의를 위해 그런 것이다. 짐 내리려고 10분정도 차 세웠던 게 그렇게 잘못이라면 규정 자체가 틀린 것 아니냐? 넌 그런 생각도 못하냐?”라고 소리치고는 뒷말은 듣지도 않고 나와 버렸습니다. 그랬더니 이 녀석이 뭐라고 보고를 했는지 필리핀 경계지원대장 명의로 사령부에 투서가 올라왔답니다.
딜리에서 일하는 참모 분들이 모두 잔뜩 긴장해서 무슨 일이냐고 제게 전화하고 경위서 작성해서 보내달라고 그러더군요. 전말인즉, 이 녀석이 “미스터 김이 규정을 어긴 채 경비병의 제지를 뿌리치고 수차례에 걸쳐 무단으로 고베 하우스에 진입했다. 또한 짐을 싣겠다고 차를 가지고 들어가서는 짐도 없이 사람만 태우고 나왔다” 등등의 헛소리를 늘어 놓은 겁니다.
딜리 사령부에서 브라질 헌병대가 조사하러 바우카우로 출장 나오겠다고 그러고, 진술서 영어로 작성하느라 딜리 연락반의 F 대위라는 분이 업무 이외에 추가로 일하느라 진땀빼고... 저는 명예 훼손과 허위사실 유포로 손해배상 청구하겠다고 길길이 뛰었는데, 윗 분들은 저도 규정을 어겼고 필리핀군은 근거없는 이야기를 퍼뜨렸으니 서로 조용히 넘어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어쨌거나 이 번 일을 근거로 삼아 정식으로 방문자들의 짐을 싣고 내리기 위해 임시로 차를 진입시키는 규정을 정식으로 추가하기로 건의가 올라갔다고 하고, 여기 필리핀 연락반의 오중령님도 자기 병사가 잘못한 것 같다고, 자기가 추궁하겠다고 얘기하고 있고, 딜리의 저희 참모분들도 자초지종을 듣고 나니 “걱정하지 말고 당당히 진술서대로 자신있게 얘기해서 이 번 기회에 그 못된 녀석들 버릇이나 고쳐주라”고 얘기하는 중입니다. 그러니 별 일이야 없겠지만 하여간 필리핀에 대한 인상을 잔뜩 구겼습니다.
그러나 어제 마나투토에 가서 봤던 모습은 그 구겨진 인상을 조금 펴 줬어요. 친선 축구 시합하러 갔던 것이었는데, 축구 시합동안 단지 운전만 하러 그곳에 갔기 때문에 심심해하던 저와 계속 놀아주던 친절한 필리핀 사람들도 좋았고, 저녁 식사시간 동안 그저 생음악 연주하러 나와서 노래도 잘 못하는 군 간부들 백밴드 해주던 필리핀 군인들로 구성된 밴드는 과찬이 아니라 정말로 당장 음반 내도 될 만한 수준이었습니다.
또 식사 후에는 필리핀 전통 춤이라는 걸 추면서 곳곳에 현대적인 댄스를 집어넣어서 모두를 재미있게 해줬지요. 정말 따뜻한 분위기 속에 화기애애하게 즐기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어딜 가서 누굴 만나건 좋은 인상이나 나쁜 인상은 모두 자기와 접촉하는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지, 그 사람이 어느 나라 사람인가에 따라 정해지는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아직도 전 쉽게 필리핀 사람들은 다 그래, 미국 사람들은 다 그래, 뭐 그런 식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오류에 빠지곤 합니다.
주의하려고 해도 그게 몹시도 뿌리깊은 건가 봐요. 하긴, 한국에선 전라도나 경상도 출신들은 단지 호남이냐 영남이냐는 차이로도 그런 차별을 두곤 하잖아요. 그것도 몹시 뿌리 깊은 채로.
***4월 10일**
인도네시아에서 다약족이 마두라족을 계속 공격하고 있다더군요. 헤드라인만 보면 다약족이 현재 살인과 방화를 저지르고 있기 때문에 악한들처럼 보이지만, 예전 편지에서 썼듯이 수하르토 체제하에서 살던 곳을 빼앗겼던 쪽은 다약족입니다.
수하르토에 빌붙어 다약족이 살던 땅에 들어가 관공서 요직과 대지주 노릇을 독차지했던 쪽은 지금 공격당하는 마두라족이고요. 살인과 방화를 옹호할 생각은 없지만, 그저 다약족이 악한처럼 보이는 건 왠지 국외자인 제가 봐도 억울해서요.
그리고 지금 와서 새롭게 배운 건데, 다약족이 마두라족의 머리를 자르는 이유는 적의 머리를 베어 가지고 있으면 자신의 힘이 강해진다는 그런 의미에서가 아니랍니다. 그런 의미라면 다약족이 아주 잔혹한 소수민족으로 보이는데, 이 곳 티모르에도 그런 머리를 자르는 풍습이 있었다는군요.
그런 풍습은 대개의 오스트라네시안 계열의 민족들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답니다. 죽은 적의 머리를 자르는 풍습의 기원은 이 민족들이 사람의 영혼은 머리에 들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사람이 죽은 후 머리가 몸에 붙어 있으면 그 사람들의 영혼이 영원히 이승을 떠돌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그래서 그들은 죽은 사람의 평안을 위해 머리를 자른답니다.
물론 이 과정은 잔인한 의식이 아니라 종교적인 신성함이 요구되는 의식이기 때문에 항상 죽은 이의 머리를 잡고 죽은 이의 발이 땅에서 떨어질 때까지 높이 들어 올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온몸이 공중에 뜬 상태에서 머리를 잡고 깨끗한 칼로 한번에 머리를 잘라낸다는군요. 몸은 바닥에서 굴러도 머리에는 먼지 하나 묻지 않게 하여 죽은 적의 전사에 대한 예의를 표하는 거랍니다.
왠지 네이티브 아메리칸들이 적의 머리가죽을 전리품으로 벗겨낸다고 잘 못 배웠던 과거가 반복되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다른 민족의 문화에 대해 쉽게 재단하는 건 굳이 미국인들만의 문제는 아닌가 봐요. 다약족이 적의 머리를 잘라 자기의 힘의 원천으로 삼는다는 미국 신문을 보고 눈곱만큼의 의심도 없이 다약족을 저개발된 인간들마냥 바라본 저도 네이티브 아메리칸을 인도사람이라고 불렀던 서유럽 사람들마냥 편협하기 이루 말할 데 없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