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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병일기-동티모르 주둔 1년<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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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병일기-동티모르 주둔 1년<12>

장교 행세 하다 봉변당하다

***4월 11일**

딜리에 또 갔었습니다. A 소령님이 동부여단장 어드바이저로 직책을 부여받은 후 첫 임무로 평화유지군 정보분야 회의에 다녀오기 위해서였죠. 회의가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 30분까지였는데, 그 사이에 저는 필요한 물건 몇 가지 사고, 환전하고, 그저 차 타고 딜리 시내를 쏘다녔습니다.

지난번에 딜리에 갔을 때에는 필리핀 녀석이 짜증나게 굴어 화내고, 싸우고, 결국은 진술서까지 써야 했는데···, 딜리에 몇 번이나 간다고 갈 때마다 자꾸 일이 생깁니다. 오늘은 슈퍼마켓에서 토마토 소스나 사다가 스파게티나 만들어 볼까 했었는데, 갑자기 싱가포르 사람으로 추정되는 유엔 스태프 한 명이 다가오는 겁니다.

"Excuse me, officer." 혼자 차 몰고 일과시간에 유유자적하게 돌아다니고 있으니 장교로 보였겠죠. 어쨌거나 괜히 장교 소리에 들뜨는데(아무 데서나 사장님, 선생님 붙여주면 좋아하는 사람들 마냥 저 역시 속물기질이 다분하다는 걸 이 이야기를 하면서 저도 깨닫고 있습니다), 문제가 생겼는데 도와줄 수 있겠느냐더군요.

“물론”이라고, “무슨 문제냐”고 온화하고 다정하게 권위 있는 사람인 양 응답해 주었죠. 문제인 즉, 미화 50 달러를 길거리에서 환전하는 암달러상과 바꿨는데, 호주달러 97.5 달러를 준다고 해놓고서는 50센트를 안 준다는 겁니다.

나: 그거야 거리에서 바꿨으니까 그렇죠. 이 사람들은 공식적인 룰이 있는 게 아니라서 50센트가 아까우면 그냥 물러 달라고 하세요.
그(갑갑한 표정을 지으며): 그게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나(마치 이런 문제 정도는 우습다는 듯 거들먹거리며): 아하, 왜 돈을 물러 주지 못하겠다고 그래요? 어디 한 번 가볼까요?
그(못 말린다는 듯): 그게 아니라 문제는 환율이야 어찌되었건 상관없는데, 그 사람이 내가 50달러를 안 줬다고 우기는 거에요.
나(이제서야 상황을 깨닫고는): 그래요? 일단 그 사람이 누구죠?

그래서 그 싱가포르 사람이 달러상 앞에 저를 데리고 갔습니다.
달러상: 나는 절대 이 사람한테 50 달러 받은 적 없어요. 뒤져봐요.(벨트색과 잠바를 벗어 주면서 따지듯 나를 본다)

주위에는 지나가던 현지인들이 몰려들지, 저는 마침 총도 안 들고 나온 참이어서 불안하지, 누구 편들 수도 없는 것이 목격자는 하나도 없지... 난처해져 버렸습니다. 이러다가 또 누가 돌이라도 던지지 않을까, 요즘 딜리에서는 유엔 차가 경적만 시끄럽게 울려도 지나가는 사람들이 기분나쁘게 한다고 돌을 던진다던데...

최대한 공평하게 보이기 위해 둘을 향해 말했죠.“미안하지만, 두 분 중 한 명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나는 그런 거짓말을 가려낼 능력도 권한도 없습니다. 잠시 진정하시고, 두 분 모두 제 차로 경찰서로 같이 가시죠. 그러면 거기서 진실을 밝혀줄 겁니다.”

그런데 동티모르인들의 특징이 경찰서나 법, 재판 이런 걸 극도로 감정적으로 싫어한다는 걸 깜박 잊어버린 게 잘못이었습니다. 완전히 불에 기름을 부어 버린 꼴이 되었어요. 몇 백년 동안 잘못한 게 없이도 경찰서로 끌려가고 재판이란 걸 받으면 늘 자신들만 손해를 봤었고, 법이란 항상 식민종주국을 위한 법이었던 나라에서 경찰서에 가자는 소리는 “지금 내가 당신을 감옥에 넣으려고 하거든요” 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일로 보이는 겁니다. 제가 실수한 거죠.

달러상 아저씨가 소리지르기 시작합니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 경찰서에 가자고 그래! 저 사람이 돈을 안 줬고, 난 잘못한 것 없어. 왜 나더러 경찰서에 가자고 하는 거야!”

공평해 보여야 권위가 서는 법인데 그 사람은 소리지르고 화를 내고 주위에 사람들은 이제 완전히 네다섯 겹으로 저희들을 둘러 싸 버렸고... 다행히 영어를 하는 동티모르인 한 명이 나서줬습니다.
“이 분은 당신이 잘못해서 경찰서에 가자는 게 아니라 둘 중 누가 옳은 지 알 수가 없으니까 경찰에게 함께 가보자는 거야.”

주위에서 사람들이 한 명씩 두 명씩 목소리를 높여가며 뭐라뭐라 이야기하던 중이었는데, 다행이었습니다. 일단 분위기가 가라앉았어요.

이미 상황을 침착하게 이끌고 주도해 가는 경험 많은 장교 행세 하기는 글러 먹었고, 일단은 빨리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생각밖에는 없었죠. 그래서 우아하게 사건 당사자 둘을 경찰서까지 데려다 주려던 계획에서 방향을 틀어 지나가는 유엔차를 불러 세워 경찰 좀 불러 달라고 부탁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관료적인 유엔 직원들의 모습에 대해 한두 번 얘기한 게 아니지만, 역시 아니나 다를까 경찰차를 불러서 세워도 내려서 조사할 생각은 않고서 “우리 관할 구역이 아니니 관할 경찰을 불러 주겠다, 조금만 기다려라” 소리만 하고 떠나더군요.

결국 경찰이 올 때까지 제가 한 거라곤 가게 입구 앞에 우루루 몰려 있는 사람들을 가게 옆으로 옮겨 놓은 것하고(가게 주인이 장사 안 된다고 짜증냈어요... 으...) 둘 중 한 명이 도망가지 못하게 계속 붙들어놓고 감시한 것하고, 주위에서 목소리 높이려는 사람이 나타나면 진정시키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유능한 고급장교라기보다는 허둥지둥 당황하는 풋내기 병사 티가 팍팍 났을 거예요.

결국 경찰이 왔고, 제보자 이름을 적어야 한다고 아이디 넘버하고 이름하고 소속부대 적어가더군요. 분명히 어딘가의 상황보고에 또 '한국군 미스터 김'이 어쩌고저쩌고 하고 실릴 겁니다. 딜리에 올 때마다 이름을 한군데씩 남겨두고 가는 셈이 되어 버렸어요. 다음에 딜리에 오면 또 무슨 일이 생길까 이제 기대가 될 지경입니다.

***4월 13**

언젠가 밀레니엄 맞이 세계풍경 어쩌고저쩌고 하는 신문기사에서 타이에서는 달력이 다르다고 하는 소리를 언뜻 봤던 것도 같은데, 어쨌건 오늘이 타이의 신년기념일-그네들 말로는 송크란이라고 하던 것 같던데-이었습니다. 난데없이 ‘해피 뉴 이어’라는 인사를 받아야 했어요. 그들이 즐기는 과정이 얼마나 광폭한지, 갑자기 달려들더니 제 얼굴과 옷, 머리에다 허연 분칠을 강제로 해대고, 그걸로도 뭔가 모자르다 생각했는지 결국에는 절 번쩍 들더니 물에다 집어 던져 빠뜨렸습니다.

저희 학교에 자하연이라고 지저분한 연못이 하나 있는데, 축제 때 거기에 학생들끼리 서로 빠뜨리고 빠지고 하거든요. 그 지저분한 연못 물 생각이 나는-그 물보다는 깨끗했지만- 물에 빠졌어요. 요즘에는 몇 년 전 그 연못에서 술 취한 학생을 빠뜨렸다가 그 학생이 죽는 바람에 축제 시기가 되어도 아무도 자하연에 빠지지 않지만, 그렇게 더러운 물에 집단으로 빠져 가며 미친 척 하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지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모를 겁니다.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 CNN에서 타이 본국을 중계 중입니다. 광란에 빠져 서로 물을 뿌리고 허연 분가루를 뿌려 대고 밀가루 뒤집어쓴 양 허옇게 되어 가지고는 즐겁다고 웃고 있는 사람들이 나오고 있네요.

여기서는 그저 물병에 담긴 물만 뿌렸는데, 타이에서 하는 걸 보니 아예 소방차 마냥 차에 물을 실어 가지고서는 호스로 길가는 사람들에게 물을 쏘아 댑니다. 제가 당한 건 그저 양반 대우받은 거라고 생각해야겠어요.

여기 타이군 병원에 여군 간호장교가 두 명 있습니다. 평소에 군복입고 있을 때에는 그저 타이 여자들은 정말 못 생겼나보다 했는데, 오늘은 신년행사라서 그런지 그네들 전통의상을 입고 나왔어요. 감동했습니다. 타이 옷은 정말 날개더군요. 나이 40씩 된 아주머니 중령분들인데, 정말로 10년씩은 젊어 보이는데다가 잠시 원래 미인이었나 보다 하는 착각까지 들었어요. 그전에는 세상에서 가장 예쁜 여자 옷은 중국식 빨간 비단치마라고 생각했는데, 타이 옷도 오늘 보니 만만찮습니다.

오후에는 Good Friday라서 십자가를 들고 행진하는 마을 사람들을 보러 시내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이런 게 가톨릭 국가에서만 볼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신문을 보니까 우리 나라에서도 십자가를 메고 예수 복장과 로마 병사 복장까지 구해다가 행진을 하더군요.

잠시 잊었었습니다.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몇 안 되는 평화로운 다종교 국가였다는 걸. 그 평화로 인해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알 수 없다는 걸. 한국에서 한발 떨어져 생각해보니 정말 대한민국 사람들이 대단한 사람 같습니다.

다른 나라들에서는 일반적으로 종교로 인해 서로 죽이고 죽고 하루에도 몇 번씩 폭탄이 터지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신교-구교 갈등도 없고, 불교인들과 기독교인들 사이에 치고 받았다는 이야기도 없잖아요.

단지 불교 내부에서 스님들끼리 싸우는 모습이 가끔 눈살을 찌푸리게 하긴 하지만, 그래도 누구 죽는 사람도 없고, 사회 전체가 그런 모습에 대해 비판적이라는 것 역시 굉장한 일입니다.

우리야 서로의 종교에 대해 간섭 않는 것이 숨쉬듯 당연한 일이지만, 세상 많은 곳에서 종교의 이름 아래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잖아요.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유럽 사람들에게는 불법 체류자들에게도 조건 없이 인도적 대우를 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고, 심지어 상황을 최대한 참작하여 그들의 불법체류를 정식으로 이민으로 받아들여 주라고 주장하는 것마저 당연하게 여겨지는데 대한민국에서는 한국인과 결혼까지 한 외국 불법 체류자에게 일할 권리조차도 주지 않습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서로를 죽이는 나라를 외신에서 보면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란 것이 그대로 이 배타적인 민족을 바라보는 타국의 시선이 된다 생각하면 끔찍하지 않나요? 종교의 이름으로 서로를 죽이는 것만큼이나 인종적 구분으로 서로를 차별하는 것 역시 야만일 겁니다.

함께 지내는 타이 사람들의 나라에서는 이슬람교와 국경에서 무력 충돌이 벌어져 사상자가 생겼다고 하고, 필리핀 사람들의 나라에서도 몇 년간 이슬람교와의 내전으로 나라가 엉망이라고 합니다. 이슬람교가 원래 교리상 잔인하고 분쟁의 소지를 만드는 종교라고 말하려는 건 아닙니다. 그런 생각이야 머리가죽 벗기는 네이티브 아메리칸이 잔인하고 무지하다고 보는 것과 똑같은 생각이니까요.

단지 지금 저와 함께 웃으며 지내는 사람들의 나라에서는 종교로 인한 죽음이 끊이질 않고 있고, 우리 나라에서는 저와 함께 웃으며 지내는 사람들의 나라에서 일하러 온 사람들을 가리켜 '불법 체류자'라고 비난하고 멸시하려 드는 모습이 갑자기 떠올라서요. 우리 모두의 황색 얼굴은 별반 차이가 없는데, 서로 그 황색 얼굴들을 향해 증오를 뿜는 모습이 참 차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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