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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병일기-동티모르 주둔 1년<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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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병일기-동티모르 주둔 1년<13>

유엔? 그래도 백인들은 끼리끼리

***9월 3일**

오늘은 딜리에 다녀왔습니다. 슈퍼마켓에 들어가 피죤과 프라이팬 등등을 사고 나오는데 꼬마들이 차 주위에 몰려 서 있다가 "우리가 차 지켜줬으니까 돈 줘요"라고 그러더군요. 얼마 배우지 못한 어색한 테툼어를 주워 삼키면서 "우리, 지금 갈 거니까 돈 안 줘"라고 얘기하고 매몰차게 차에 올라탔습니다.

아니, 공용 주차장에 차 세워 놓았는데 지켜주긴 뭘 지켜준다고 그러는 거야, 라는 생각도 들었던 데다 최근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지만, "난 참 너희들이 이렇게 어린 시절을 보내는 게 가슴 아프지만 벌써 이런 모습을 7개월째 보고 있단 말야. 별 감흥이 안 생겨"라고 늘 이야기했었기에 오늘도 그냥 무심히 넘겼죠.

많이 무뎌졌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많이 못되어진 거라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현실이 이렇게 된 상황에서는 자꾸 아이들을 아이들로 보는 게 아니라 작은 어른들로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5백 킬로미터 남쪽 호주의 다윈에서는 이 또래의 아이들이 세상 때라고는 하나도 모르는 것 같은 얼굴로 까르르 웃으며 하루를 보내는데.

***9월 21일**

얼마 전 상록수부대에 재보급선이 들어왔습니다. 늘 그렇듯 재보급선 위에서 성공적인 재보급을 축하하는 선상 파티가 열렸죠. 거기서 캐나다인으로 보이는 나이든 대머리 아저씨와 미국 남자, 아일랜드 남자 이렇게 세 명이 대화를 하더군요.

"엊그제 태국인들이 초대해서 그 파티에 갔었는데 술을 어찌나 마셔댔는지 아직도 머리가 아파."
"허허, 여기서는 조심해야겠는걸. 한국 사람들은 쌀로 만든 술을 마시는데 그게 마실 때는 잘 몰라도 상당히 독해."
"그저 동양인들은 술만 먹으면 끝장을 봐야 된다니까."
"그러게 말야. 그 사람들은 그저 엄청나게 마셔야지만 되는 줄 알아."
(한 명, 저를 슬쩍 보고 눈치를 줍니다. 그랬더니 눈치 받은 사람이 저를 쳐다보고 하는 말)
"괜찮아, 이 사람들은 어차피 우리가 하는 말 이해 못해."

오만 방자한 인간에게 따라주고 있는 소주가 아깝더군요. 남의 파티에 와서 공짜로 즐기고 있으면 약간이라도 감사하든가, 아니면 적어도 조용히 있기는 해야 할 거 아니에요. 소주가 쌀로 만들었네, 과일로 만들었네, 와인이네 위스키네 따지는 걸로 화제를 옮겼던 인간들에게 일어나서 쏘아 붙여줬어요.

"소주는 쌀로 만든 거고, 증류주니까 와인보다는 위스키에 가까운 거야."
... 일순 침묵, 싸가지 없는 그 인간들도, 그 어색한 침묵을 만들어낸 저도 다같이 머쓱해졌죠.

유엔은 공식적으로 국제기구입니다. 미국인들이 분담금의 4분의 1 가량을 내지만 총회에서는 한 표를 가진 회원국일 뿐이고, 작은 나라 싱가포르도 똑같은 한 표를 가지지요. 거부권이라는 힘센 나라를 위한 우대조항이 있지만 그래도 형식적으로나마 공정하게 작은 나라들의 목소리까지 발언권을 주는 공간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렇기 때문에 유엔은 어떤 나라, 어떤 종교도 보편적인 원리에 입각해 차별하지 않으려 합니다. 사무총장이나 총회 의장은 늘 대륙별로 돌아가면서 배분시키고, 흑인이나 황인이라고 차별 받는 일은 절대 없습니다. 적어도 겉으로는요.

하지만, 실제로 유엔 본부는 뉴욕에 있죠. 그리고 유엔의 공용어는 영어·불어·스페인어입니다. 모두 유럽어죠. 앞에 내세우기는 세계평화를 위해 어쩌고 운운하지만, 정말 세계평화를 위해 뭔가 제안이 올라오면 미국 한 나라에서 거부권 행사를 통해 세계의 뜻을 짓밟아버릴 수 있습니다.

그런 모습이 연회장이라고, 사무실이라고, 각 유엔 미션장소의 구체적인 활동 공간이라고 해서 달라지겠어요. 말이 좋아 국제기구이지, 백인들은 백인들끼리, 그것도 앵글로색슨은 앵글로색슨끼리, 라틴계는 라틴계끼리, 슬라브인들 따로, 흑인들 따로, 아랍인들 따로, 아시아인들 따로... 그 경계를 넘어서는 우정이란 건 존재하지만 희귀하고, 가능하나 시도하기 쉽지는 않은 겁니다.

브리핑에서 아주 유식한 듯 폼을 잡아가며 “유엔의 세계인권선언에 따르면”, “유엔의 반인종주의 선언에 의하면”, “유엔의 여성의 지위 향상에 관한 무엇에 의하면”... 해가면서 보편적 인권과 인종차별 철폐, 남녀의 동등한 위치와 종교와 신념의 자유의 전도사가 되던 인간들이 자기네 부족끼리 모이면 행하는 짓을 보세요.

반인종주의를 가르치면서도 동티모르인들이 게을러서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투덜대고 있는 인간들, 여자나 남자나 동등한 위치라고 늘 의석비율이나 단체장 비율에는 신경쓰는 척하면서도 뒤로 돌아서면 여자들 치마 길이와 능력의 상관관계나 만들어 대는 인간들, 소수 종교가 보호되어야 하고 어쩌고 떠들다가도 지난 번 회교사원 방화사건 이후 단 한번도 그 사원에 다시 찾아가지 않는 기독교인들이 유엔의 모습이란 생각입니다.

백인 앵글로색슨 프로테스탄트(WASP)는 미국 사회에서만 우월적 지위는 아닌가 봐요. 유엔 본부가 뉴욕에 있을 때부터 세계인들은 와스프가 되어야 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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