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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병일기-동티모르 주둔 1년<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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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병일기-동티모르 주둔 1년<14>

“용서와 화해, 참 어려운 얘기죠”

동티모르와 대한민국의 연결고리란 그저 우리 나라에서 그 나라로 평화유지군을 파병하고 있다는 것 정도입니다. 쓰는 말이 다르고, 옷 입는 습관과 얼굴 색깔이 다르고, 먹는 음식의 종류가 다릅니다. 우리와 그들은 정말 많이 다릅니다.

동티모르는 우리와 참 많이 다른 나라이지만, 이상하게 비슷한 점이 많이 발견되기도 하는 나라입니다. 어제 독립을 찬성하던 시민들을 학살한 민병대 대원들이 오늘 인도네시아 법정으로부터 무죄를 선고 받습니다. '용서와 화해'의 이름으로요. 어제 나라를 인도네시아에 팔아먹었던 인간들이 슬그머니 나타나 '용서와 화해'를 부르짖으며 독립 동티모르와 인도네시아 사이의 좋은 다리를 놓겠다는 망언을 합니다.

하지만 비슷하면서도 다른 부분들이 있습니다. 군사력도, 경제력도, 거의 아무 것도 없는 나라이지만, 그래도 우리에겐 없는 무언가가 있는 듯 합니다.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은 그런 부분들입니다.(9월 9일자까지)

***2월 8일**

오후에는 전 민병대 대원들의 고향복귀 프로그램을 위한 토론회가 열리기로 예정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기로 되어 있던 유엔 직원들은 약속시간이 20분이 지나도록 오지 않고... 초조해지는 저희 A 소령님께 유엔에서 오랫동안 일해온 UNHCR(유엔고등난민판무관)의 직원이 충고합니다.
"유엔이란 데가 원래 이런 뎁니다."

동티모르 주민들을 독립 이후에도 지금까지 계속 공포에 몰아넣고 있는 집단이 바로 민병대입니다. 유엔 평화유지군의 신속한 배치 결정도 바로 이들의 잔악한 학살 행위로 인해 결정된 거고요.

그런데 국제 언론에서는 이러한 민병대원들마저도 "과거를 반성하고 다시 동티모르에서 사회 일원으로 살겠다면 용서하겠다"며 포용하는 '훌륭한' 동티모르 인들을 칭송했지요. 오늘은 그 칭송에 걸맞게 전 민병대원들 중 두 명이 돌아오겠다고 의사를 타진했고, 이를 준비하기위해 유엔직원들과 평화유지군, 현지 주민들, 민병대원들이 토론하기로 한 것입니다.

비록 유엔 직원들의 늑장으로 늦게 준비되었지만 그래도 갖가지 준비가 갖춰진 이후까지도 현지 주민들은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의자가 무색해지자 유엔 직원들은 어색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서로를 보고 허탈한 웃음을 지었죠. 결국 토론회는 취소되었습니다.

민병대원들을 용서해주겠다(고 언론에서 보도하)던 주민들이 토론회에는 아무도 안 나온 현상을 두고 유엔 직원들은 "홍보가 덜 되어서 그렇다"고 말했지만, 주교님도, 수녀님도, 마을 대표도 아무도 안 나온 건 아무리 봐도 홍보부족 이상의 무언가로 보입니다.

'용서와 화해'라는 말은 참 좋은 말이지만 누가 누구에게 사용하느냐, 언제 어디서 사용하느냐에 따라 많이 달라지는 말인 것 같습니다. 민병대가 불지르고 폭파시킨 재산은 그렇다 쳐도 부모형제가 그들의 손에 죽은 지 채 몇 년 되지도 않았는데 섣불리 용서를 이야기하긴 좀 이른 것 같습니다.

국제언론이 아무리 위대한 동티모르인이라 추켜세우며 용서와 화해를 통해 동티모르의 시끄러운 이야기를 "그래서 그들은 이제부터 자기들이 잘 살고 있는 거야"라는 결론으로 봉합하려 해도, 아무리 동티모르 정치 지도자들이 대범한 결단으로 용서를 해도, 동티모르인들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원한마저 깔끔히 녹여 버릴만한 것일까요?

박정희 대통령이 돈 몇 푼 받고 일본의 전쟁배상 책임을 면제해주고 국제언론에서 대한민국의 '장한 결정'을 칭찬하는 형국이라면 너무 비약일지도 모르겠지만, 하여간 여기서 동티모르인들을 보면서 드는 느낌이 그렇게 상큼하고 깔끔한 것만은 아닙니다.

***4월 5일**

여기 온지 얼마 안되어 보내드린 편지에서 인도네시아와 동티모르의 화해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죠? 단지 서방 언론이 "훌륭한 동티모르인들이 인도네시아를 용서하고 전 민병대를 용서하고 있습니다"하며 칭송하고, 유엔이나 국제사회는 그렇게 이들의 갈등을 봉합하여 표면적인 성과만 이룬 다음에 떠나려 마음먹고 있다고요.

그런데 신문을 뒤지다 구스마오의 인터뷰 기사를 발견했는데, 약간 시각을 돌려보자면 인도네시아와의 화해는 이 불안정한 나라의 생존전략으로 볼 수도 있겠더군요.

기자가 묻습니다.

"인도네시아와 화해한다는 것이 어렵지 않느냐?"
구스마오가 대답합니다.

"물론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난 24년간 우리를 둘러싼 악조건 속에서도 이기는 법을 배워왔다. 인도네시아는 우리들을 살해했지만... 우리는 더 나은 방법을 찾아냈다. 그들을 우리 편으로 만들면 되는 것이다. 인도네시아 군인들과 티모르인들 중 인도네시아에 협력하던 사람들이 결국 프레틸린(동티모르 독립혁명 전선)으로 넘어왔다. 그들은 정글에서 우리에게 합류했고, 우리의 다른 영웅들처럼 영웅으로 죽어갔다."

결국은 게릴라 시절의 그 마음처럼 인도네시아를 동티모르의 적으로 돌리기보다 그들을 자기들 편으로 끌어들여 안정을 유지하겠다는 겁니다. 유엔 철수 후의 동티모르의 안전은 불행히도 현재 호주에 의존하는 방법 외에는 적을 줄이는 것밖에는 없기 때문이죠.

물론, 순진한 생각이라며 호되게 비판받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동티모르는 여전히 미국과 호주, 그 외 서방국가들과 평화유지군 활동에 참여하는 아시아 국가들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고, 외국 기업을 최대한 유치하여 자국의 안전을 보장받고자 하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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