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9일**
선거 하루 전날이 되었네요. 시끌시끌 말도 많았고, 작은 도시에서는 정당 지지자들간에 싸움도 많았다지만 다행히도 우려했던 폭력 사태 혹은 소요 같은 경우는 발생하지 않고 조용히 지난 것 같습니다.
선거 후가 더욱 걱정이라는 사람들의 우려도 시간이 지나가면서 드러나는 모습을 보자면 그냥 우려로 끝날 가능성이 높아 보이고, 무엇보다도 선거를 기점으로 해서 갑자기 동티모르 재건에 가속도가 붙는다는 느낌이 듭니다.
직장도 없이 무력하게 시간을 때우며 잡일 용역으로 하루를 보내던 사람들이 선거 운동에 참여하느라 그랬는지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이 곳 바우카우만 보더라도 새로 짓는 건물들과 보수하는 도로의 수가 전보다 훨씬 늘었습니다. 선거 때만 되면 부랴부랴 도로 정비하고 신축 공사하는 건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인가 보죠.
어제 밤에는 자정이 다 되어 딜리에서 마지막 선거유세를 마치고 돌아가는 프레틸린 정당 지지자들의 행렬이 경적소리와 환호소리를 내가며 부대 앞을 지나쳤습니다. 오늘 뉴스를 보니까 수만 명이 모여들어서 딜리 해안도로를 꽉 채웠다더군요.
공항까지 가는 딜리의 해안도로는 딜리 시내에서 가장 크고 긴 직선 도로인데, 그 도로를 이 인파들이 채워 버렸다는 겁니다. 세 과시도 아니고, 하여간 1위 유력 정당이라고 전국에서 지지자들을 끌어 모았나 봐요. 마지막 바람몰이였던 셈이죠.
<사진>
사진에는 달랑 트럭 한 대뿐이지만 이 앞뒤로 이런 트럭들이 정말 약 20대는 줄지어서 행진했습니다. 동티모르에 와서 현지인들이 이런 식으로 긴 차량행렬을 벌이는 걸 보긴 처음이었어요. 신기하다고 그 늦은 시각에 달려나가 사진을 찍은 저를 위해 포즈를 잡아주는 사람들이 재미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작전과 참모가 식사하면서 그러더군요. 어제 자기가 근무를 섰었는데, 정문에 자기와 보초 서던 병사, 단 두 명만 있었답니다. 그런데 차들이 이렇게 우루루 몰려 지나가는 것만도 충분히 위협적인데 거기에 대고 저는 사진을 찍고 있고, 찍히는 사람들은 뭐라고 큰소리를 치며 손을 휘저어대니까 긴장했었다네요.
저러다 사람들이 차에서 뛰어 내려 시비라도 붙으면 어쩌나, 바로 정문 앞인데 부대까지 밀려들어오면 막을 수도 없는데... 등등. 엄청 두려웠었다고 그러더군요.
거참, 사진 찍어 줘서 포즈 취한다고 손 흔든 것이고, 그 사람들 소리지르던 내용이 테툼어로 “하나, 둘, 셋, 프레틸린 만세!” 뭐 이런 내용이었을 뿐인데 그렇게 긴장하면 되냐고 말은 했지만, 혹시 사건이 생겼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겠다는 생각도 들긴 했습니다. 뭐, 그렇게 긴장했다던 사람들이 오늘 와서는 모두들 그 사진을 달라고 손내밀더군요.
26년 전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한 후 진행된 동티모르의 지방선거에서는 티모르 민주연합(UDT)이 프레틸린에게 '공산주의자' 딱지를 붙여 몰아세우면서 일부 친포르투갈계 정당들과 함께 인도네시아와 짜고서 프레틸린에 대한 테러와 비방을 저질렀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방 선거에서 프레틸린이 압승하게 되자 동티모르는 내전에 빠져듭니다.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티모르 민주연합을 위시한 친인도네시아계 정당들이 동티모르를 인도네시아에 합병하는 안에 서명하게 되고 인도네시아 군은 기다렸다는 듯 공수부대를 파병하여 동티모르를 점령합니다.
그리고 26년이 지난 지금, 한 때 마오쩌뚱과 레닌을 열심히 읽던 구스마오는 아주 온건한 '시인 혁명가'로 전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민병대에게까지 사면의사를 표명할 만큼 용서와 화해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 무너져가다가 구스마오에 의해 재건되었던 프레틸린도 내부의 좌파 세력들을 '티모르 사회주의자 연합'으로 분리시켜낸 뒤 지금에는 티모르 민주연합 저리 가라 할 만큼 중도 우파적인 노선을 걷고 있죠.
주민들은 “헛된 공약만 남발하는 정당들 전체에 대해 믿음이 가지 않는다”라며 투덜거리면서도 열심히 전국 순회 정당 토론회에 모여들고, 경찰과 평화유지군은 비상 대기 태세로 선거 다음날까지 24시간 출동준비 중입니다.
26년 전의 선거를 책 속에서만 읽었던 저로서는 26년 후 오늘의 선거가 얼마나 평화로운지에 대해서는 별 감이 오지 않는군요. 그래도 과도행정부에서 진행하는 라디오방송에 등장하여 오로지 평화적인 선거가 되기를 바란다는 이야기만 지겹도록 반복하는 수많은 동티모르인들을 보거나, 직접 대화할 기회가 생기는 주민들이 모두 “폭력만 일어나지 않는다면 누가 되건 성공이지 않느냐”라고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면 지금 선거가 아주 잘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은 드는군요.
상록수부대 관할지역 선거 준비상황을 살피러 갔던 선거관리위원회의 다른 한국인 스태프들이 오늘 딜리로 돌아가는 길에 여기 바우카우에도 잠시 들렀습니다. 그 사람들 차를 운전해주는 '제카 봉'이라는 사람과 몇 마디 나누다 친해졌는데 이런 궂은 일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안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어도 꽤 하고, 1999년 이전에는 동티모르 전화국에서 전화기술자로 일했던 엘리트인데, 지금은 그저 한국 대표부 운전사일 뿐이잖아요. 인도네시아가 물러 간 후에는 호주의 전화회사 텔스트라가 동티모르의 통신서비스를 담당해서 그 사람들과 일했었다는데, 무슨 문제였는지 말은 안 하지만 평생 일하던 통신 관련 일을 때려치우고 운전사 노릇이나 해야 하는 건 좀 안되었다는 생각입니다.
'봉'이라는 성은 어릴 적 고아였다가 중국인 양부모에게 입양되어서 받은 성이라더군요. 동티모르에는 포르투갈 시절부터 화교들이 참 많이 살았었는데 봉씨 얘기에 따르면 동티모르인들의 화교에 대한 인상은 유럽인들이 유태인들을 보는 인상과 흡사하답니다.
화교들만 진출하면 그 동네 동티모르 가게들은 다 문을 닫는 게 일반적이었다는군요. 여기 바우카우에도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딜리나 서티모르에서 직접 물건을 떼다가 파는 중국인 만물상이 하나 있는데, "우리 가게에 없으면 바우카우에 없는 거야"라고 큰소리 뻥뻥 칠 정도로 수완이 좋습니다.
거스름돈을 주겠다고 카운터 뒤 방석 밑에서 돈바구니(!)를 꺼내어 루피아화, 호주달러, 미 달러를 뭉치째로 세고 있는 모습은... 입을 딱 벌리게 합니다. 정말 돈을 '긁어모은다'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요.
이런... 또 다른 데로 빠졌는데, 나름대로 굉장히 궁금했던 점이 바로 '용서와 화해'라는 점입니다. 구스마오를 비롯하여 정치적 지도자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늘 강조하는 것이 '동티모르 재건을 위한 용서와 화해'라는 점은 몇 번 말씀드렸죠.
그런데 화해하고 상처를 아물게 하는 건 좋지만, 민병대들은 따지고 보면 자기 나라가 독립하게 되었는데도 그 꼴을 못 보겠다고, 나라를 인도네시아에 가져다 바치라고 난동을 부린 인간들이잖아요.
난동도 그냥 난동이 아니라 방화, 약탈, 살인, 강간... 하여간 절대 하지 말라는 것만 골라서 했던 인간들인데 그들을 '사면'하겠다고 구스마오가 계속 강조하고, 신문과 방송에서는 연일 동티모르인들의 화해노력만 보도하고... 뭔가 제 입장에서는 마음으로 받아 들일 수가 없던 겁니다.
누가 저더러 "일본놈들이 나쁜 놈이지, 친일파들이 무슨 죄가 있냐. 그들도 한국인이니까 용서해주자"라고 누가 말한다면 저는 입에 거품을 물고 항의하겠죠. 그래도, 그냥 이해해보려 하다가... 오늘 봉씨한테 물어봤어요.
구스마오를 비롯한 동티모르 지도자들이 전 민병대원들을 용서하자고 하는데, 난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동티모르 사람들은 정말 구스마오의 생각에 동의하는 거냐고 물어봤더니 이렇게 말하더군요.
"원래 정치인들이나 리더라는 사람들은 훌륭한 이야기만 하게 마련이잖아. 내가 한가지 예를 들어주자면, 얼마 전에 이런 일이 있었어. 딜리 법정의 판사가 인터뷰에서 그랬지. '민병대들도 용서는 할 수 있으나 그 전에 그들은 제대로 된 법정에서 민주적인 재판을 우선 받아야 한다. 판결 이후에야 용서도 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 생각이 그럴걸? 사람은 짐승이 아니잖아. 그런데 마구 다른 사람들을 죽였던 사람들을 어떻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용서할 수 있겠어. 지금은 나라가 세워지는 과정이고, 사람들이 구스마오의 이야기라면 일단 경청하는 분위기이니까 지도자들도 용서와 화해를 이야기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동티모르가 차근차근 안정되기 시작하면 그들의 이야기도 점차 바뀔 거야. 우선 법정에 출두해 재판을 받아라, 재판은 민주적으로 진행할 것이며 변론의 기회도 충분히 주겠다, 뭐 그런 식이 되겠지. 그 다음에야 그때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의 문제이겠지만, 내 생각에는 쉽게 용서한다는 건 불가능하리라고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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