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9일**
선거가 끝난 뒤 계속해서 선거 자축 파티 외에는 하는 일이란 게 없는 것 같군요. 토요일에는 바우카우 유엔 과도행정부(UNTAET)에서 이 근처 유엔 관계자들과 지역 주민들을 모두 초청해서 파티를 열었습니다.
한 사람 두 사람 무대에 올라 공히 하는 말이, "따지고 보면 동티모르 전역에서 이 바우카우 지역만큼 시끄럽고 말썽 많은 곳도 별로 없는데 아무 일 없이 선거가 잘 끝나서 너무 기쁘다. 모두에게 감사한다"였죠.
초기에 긴장했던 것과는 달리 너무나 조용히 선거가 끝나 약간은 김빠진 것도 같은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이번 선거를 계기로 동티모르도 확연히 안정에 접어들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고,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유엔의 위상도 동티모르 미션의 성공적인 진행으로 인해 약간은 올라가고 있는 모양입니다. 이 곳이 하루하루 더 안정적이 되어갈수록 제가 집에 돌아갈 날도 가까워 오는군요.
일본 얘기를 최근 들어 자주 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자꾸 마주치게 되기 때문이랍니다. 한국과 일본이 영원한 앙숙이니, 국제 사회에서의 경쟁자이니 하는 걸 떠나서 당장 이 곳에서 일본에 대해 신경질적이 되는 이유는 자위대 파병 문제 탓이죠.
일본에서 동티모르에 평화유지군 자격으로 자위대 병력을 파병하고 싶다고 합니다. 이미 부모형제를 학살한 민병대도 사면하겠다고 화합의 정치를 강조하고 있는 구스마오나 호르타 외무장관 같은 경우에야 일본의 경우에도 용서와 발전의 이름으로 파병을 환영하는 실정이죠.
"일본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우리 동티모르를 점령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 일본이 그 과거를 반성하고 우리와 발전적인 관계를 모색중이라면 우리는 자위대의 동티모르 파병을 환영한다."
호르타 외무장관의 공식성명입니다. 이를 지켜보는 한국인의 입장에서 호르타 외무장관에게 건의하고픈 말은 "그놈들이 어떤 놈들인데 그렇게 쉽게 환영하쇼!"라는 거죠.
아니나 다를까, 일본으로서는 갖은 난리를 쳐가면서 동티모르로의 대규모 파병의 근거를 대고자 열성입니다. 얼마 전에는 일본의 각종 신문사 기자단이 상록수부대로 우루루 몰려가 한참을 취재한 뒤에, 일본에 돌아간 뒤 이상한 기사를 쓴 적이 있었죠.
일본의 우익 신문 '산케이 신문'의 보도였는데, 상록수부대에서 자위대 파병을 환영한다고 말했다는 내용의 기사였습니다. 합동참모본부 해외파병과와 상록수부대, 동티모르 한국 대표부 모두 화들짝 뒤집어져서 경위를 조사한 결과 명백한 오보였습니다. 나쁜 녀석들, 밥 주고 커피 타 줘가며 취재 협조해줬더니 오보나 내고.
얼마 뒤에는 아사히신문 기자가 이 곳 동부여단을 방문하여 인터뷰를 해가며 끊임없이 동부여단장 입에서 "일본의 파병에 반대하지 않는다"라는 대답을 끌어내려 노력했다고 동석했던 A 소령님이 말씀하시더군요. 결국 원하던 대답을 동부여단장으로부터 얻어내고 말았답니다.
그러고 나자, 동석한 A 소령님께도 구색상 한마디 질문했답니다.
"한국군 입장에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생각하고 말 것도 없죠. 전범국가에서 사죄라고는 하는 척도 하지 않으면서 또 해외로 슬금슬금 군대를 내보내려고 하는 게 말이 되기나 하느냐, 너희들 동티모르 산 속에 군데군데 파놓은 너희 벙커들이 보이지도 않느냐 쏘아 붙였다더군요.
동티모르 산 속에 들어가면 폭격을 피하려고 일본군이 파놓은 벙커들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좀 커다란 두더지굴처럼 생겼는데, 한 군데 입구가 무너져도 다른 곳은 막히지 않도록 거미줄처럼 이 곳 저곳 연결시켜 가면서 곳곳에 출입구를 만들어 뒀었죠.
동티모르 섬은 연합군이 호주를 아시아 전장의 전진기지로 삼자 그에 대응할 수 있는 일본군의 전진기지로 사용되었던 적이 있답니다. 연합군 편이었던 호주 국민들도 당시 맥아더와 함께 호주에 머물던 미군들에 대한 인상이 엄청나게 나쁘게 남아 있는 형편인데, 침략군으로 들어와 있던 일본군을 바라보는 티모르인들의 마음이 어떻겠어요.
그 기자가 돌아간 후 태국군들이 모두 다 속이 후련하다면서 박수를 쳐줬다는 후문입니다. 우리야 정부 입장이나 국민들 정서나 모두 일본 얘기만 꺼내면 치를 떠니까 할 말은 한다고 해도 아무 문제없지만, 태국 같은 경우에는 그게 굉장히 미묘한 듯싶더군요. 그래서 애매모호하게 반대는 하지 않는다 정도로 이야기하는 것이고요.
전후 독일로부터 사죄와 배상을 받아내고 현재의 당당한 독일을 있도록 만든 것이 죄를 뉘우치고 확실히 사과하도록 강제해 낸 유럽 시민사회의 힘이라면, 일본을 변화시키는 것도 역시 아시아 시민사회의 연대여야 한다, 는 기사가 있었죠. '용서와 화해', 어쩌면 아시아의 화두일지도 모르겠네요.
이 편지를 다시 옮기고 있는 지금(2002-03-15), 일본 자위대의 평화유지활동 사상 최대규모의 병력(약 6백80명)이 동티모르로 도착하고 있는 중입니다. 동티모르 내의 비정부기구들은 딜리 공항에서 도착하는 일본군들을 향해 "일본 자위대는 철수하라.", "4만명의 동티모르인들이 당신들로 인해 죽었다"등등의 피켓을 들고 항의중입니다.
일본군이 2차대전 당시 저지른 일들은 아시아 전 국가에서 비슷하여, 이 곳에도 일본군 성노예, 소위 '위안부' 출신의 여성들이 많죠. 전 아시아 차원에서 이런 일본의 전후처리 문제에 대해 함께 목소리를 모아야 할텐데, 정부 차원에서야 가장 큰 지원국인 일본의 후원 때문에 아시아연대는커녕 그런 말을 하는 국민들에게 오히려 못마땅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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