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과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문화개혁을 위한 시민연대 등 21개 문화단체들은 지난 11월 4일 2002년 대통령 선거 후보자들에게 '문화정책에 관한 공개 질의서'를 발송, 답변을 받았다. 이 기사는 20개의 질문으로 구성된 공개질의서 중 '문화 공공성, 다양성, 자율성'과 '문화분야의 위상 제고방안'에 관한 각 후보 진영의 답변을 비교 검증한 것이다. 편집자.
***1. 문화 공공성, 다양성, 자율성 보장에 대한 대통령 후보들의 견해**
● 문화시장 개방 문제 : WTO 양허요청안 철회와 세계문화장관회의(INCP) 참여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미국은 1994년 우루과이라운드 이후 문화산물과 서비스를 자유무역의 대상으로 만들고자 시도해왔다. 미국은 문화산물이 오락거리(entertainment)에 불과하며 하나의 상품과 똑같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미국의 주장에 따르면 문화산물의 제작이나 소비는 시장에만 맡겨두어야지 여기에 국가가 관여하는 것은 자유무역의 정신에 반하는 불공정 무역행위가 된다.
하지만 유럽과 캐나다를 중심으로 한 대부분의 국가들은 문화는 한 국가의 가치있는 공공재이므로 일반상품과 다르다고 생각하며, 문화시장에 대한 완전한 개방이나 창작에 대한 보조금제도를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유럽 및 캐나다를 중심으로 한 많은 국가들은 문화분야(특히 산업적으로 발달한 TV, 영화, 음반사업이 포함된 시청각서비스 분야)에 대해서는 다른 나라에게 개방을 요구하지 않으며 요구받지도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나아가 이들 국가들 중 일부는 문화부 장관들(48개국 참여)이 참여하여 만든 INCP(International Network for Cultural Policy)라는 조직을 통해 WTO무역규범과는 별도로 문화분야 국제 협정을 맺을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런데 분위기 파악 못하는 한국정부는 지난 2002년 6월 30일에 각국에 대해 문화시장 개방이 포함된 양허(개방)요구안을 덜컥 WTO 사무국에 제출하고 말았다. 이는 문화에 대해서는 요구하지도 요구받지도 않겠다는 많은 국가들의 입장과 배치되는 것이며, 문화를 일반상품이나 서비스와 동일하게 취급하는 미국의 입장에 기본적으로 동의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문화단체들은 각 후보들에게 양허요청안을 철회하고, INCP에 참여할 의사가 있는지를 물었다. 다행스럽게도 '문화시장 개방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는 이유로 거부의사를 밝힌 이한동 후보를 제외한 대부분의 후보들이 양허요청안 철회와 INCP 참여에 대해 긍정적인 답변을 해주었다.
하지만 그 수준은 후보별로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진보진영의 후보라 할 수 있는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후보와 김영규 후보는 문화단체들의 취지와 요구에 완전히 동의의 뜻을 밝힌 반면, 현실 집권 가능성이 높은 이회창 후보와 노무현 후보는 각각 '재고', '재조정'이라는 표현을 써서 상대적으로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INCP 참여에 대해서 노무현 후보는 참석하겠다는 확답을 주었고, 이회창 후보는 '긍정적 검토'라고 답하여 다소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 언론ㆍ방송의 공공성 강화와 시청자 주권 확대
언론ㆍ방송 분야는 사회의 다양한 목소리를 담보해야 하며 특정 정치세력이나 이익집단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은 기본적인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또한 시청자들이 언론ㆍ방송 제작, 편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요구 역시 당연한 일이다. 이에 문화단체들은 시청자 참여프로그램의 실질적 정착, 미디어 교육의 공교육화, 초과이익 환수제 등을 통해 언론의 공공성을 강화하고 시청자 주권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2000년 제정된 통합방송법을 개정할 의사가 있는지를 물었다.
모든 후보들은 문화단체의 취지에 공감하고, 그에 맞게 통합방송법을 개정하겠다고 답했다. 특히 권영길 후보는 시청자 권리 보장, 미디어 교육의 공교육화, 방송의 사적 이윤 추구 방지 등을 위한 입법정책 방안을 구체적으로 내놓아 눈길을 끌었고, 노무현 후보는 지역 공공 미디어 센터의 확대와 방송의 자율성 신장과 공공성 강화를 '최우선' 목표로 통합방송법을 개정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 문화관광부 조직개편
문화분야는 우리 사회의 어떤 분야보다 자율성, 전문성, 창의성이 중요시되는 분야이다. 따라서 이를 정책적으로 지원하는 문화관광부나 산하조직 역시 자율적, 전문적으로 운영되어야 하며, 그런 마인드를 가진 사람들로 채워져야 한다. 이러한 취지에서 문화단체들은 문화관광부 조직편제 개혁, 문화분야 개방형 임용제 확대(최소 30%)와 실질적 정착화 노력, 문예진흥원의 자율성 보장, 문화기반시설 운영 개혁 등과 관련하여 후보자들의 의견을 물었다.
대부분의 후보들은 문화관광부의 조직편제에까지 고민하고 있지는 못했다. 다만 이회창 후보는 문화재청을 문화유산청으로 확대하겠다는 의견만을 밝혔고, 권영길 후보와 김영규 후보는 문화관광부를 문화부로 개편하겠다는 의견을 밝혔다.
개방형 임용제 확대나 문예진흥원의 자율화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후보들이 원칙적인 동의의 뜻을 밝혔지만, 실질적인 방안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도서관, 문예회관, 문화의 집 등 문화기반시설 확충 요구에 대해서 대부분 확대하겠다는 의견을 밝혔는데, 특히 도서관 확충에 대해 권영길 후보는 인구 5만명 당 1개관 꼴로 확대하겠다는 의견을 밝혔고, 노무현 후보는 임기 내 도서관과 장서수를 현재 수준의 2배로 끌어올리겠다는 답변을 주었다.
***2. "문화분야 위상을 높이자"는 주장에 대한 대통령 후보들의 견해**
각 후보들이 앞다투어 '이제는 문화의 시대'라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실제로 문화분야의 위상에 대한 인식수준은 구체적으로 조직과 재정에서 드러날 수 있다.
문화단체들은 문화부처의 위상 강화를 위해 문화부총리제와 대통령직속 문화예술자문위원회의 설치의사를 타진했다. 이회창, 노무현, 권영길, 이한동 후보 모두 문화부총리제도에 대해서는 취지에 공감하면서도, 현실적인 어려움을 들어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김영규 후보와 장세동 후보는 문화부총리제와 문화예술자문위원회 설치 요구 모두를 받아들였다. 다만 권영길 후보는 문화, 복지, 환경을 포괄하는 사회부총리제를 도입할 계획임을 밝혔다. 문화예술자문위원회의 설치에 대해서는 권영길 후보와 노무현 후보가 긍정적인 입장을 밝혔다.
문화예산이 전체 정부예산 대비 3%가 되어야 한다는 문화단체들의 요구에 대해서는 장세동, 김영규 후보만이 긍정적인 입장을 밝혔다. 권영길 후보는 정부 예산 대비 2%, 노무현 후보는 1.5-2%, 이회창 후보는 순수 문화예산 1.5%, 이한동 후보 1% 이상 정도의 목표치를 제시했다. 특히 권영길 후보는 민주노동당 집권시 부유세 신설, 엄정한 세금추징, 국방비 축소, 주식양도소득세 신설 등을 통해 34조 3천억원의 추가 세수를 올릴 예정이므로, 추가분이 포함된 정부예산의 2%는 현재 정부 예산의 3%에 버금갈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4천2백억이 조성되어 있으나, 2003년 중단예정인 문예진흥기금의 확충 요구에 대해 대부분의 후보들은 확대에 동의를 표시하였지만 구체적인 목표치나 재원조달 방식을 밝힌 후보는 많지 않았다. 이회창 후보는 임기내 1조원이라는 목표치를 밝혔지만 재원 조달 방안은 밝히지 않았고, 김영규 후보는 고액상속금지법을 통한 불로소득의 사회환수를 통해 임기 1년 내 1조원을 조성할 것임을 밝혔다.
***3. 문화대통령 자질, 누가 가장 많이 갖췄나**
적어도 문화분야 공공성, 다양성, 자율성 보장과 문화분야 위상제고라는 두 가지 범주만을 놓고 보았을 때, 각 후보들의 문화에 대한 공약 내용은 물론 인식 수준이나 고민의 깊이가 그다지 높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즉 절대평가를 하였을 때, 대부분의 후보들은 낙제점이거나 간신히 낙제점을 벗어난 수준이라는 말이다.
김영규 후보와 장세동 후보는 문화단체들의 공약을 대부분 채택해주었지만, 대부분의 답변에서 단체들이 참고로 제시한 배경설명을 거의 그대로 인용하여 동의의 뜻을 밝히고 있어, 문화적 이슈들에 대한 인식 수준이 그다지 높지 않음을 드러냈다. 이한동 후보는 그나마 공약내용마저 기대에 훨씬 못 미쳤다.
이회창, 노무현, 권영길 후보는 문화단체들이 제기한 질의의 내용을 웬만큼은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이회창 후보와 노무현 후보는 현실적인 집권 가능성이 높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단체들의 요구에 지나치게 신중하게 답변함으로써 문화분야에 대한 정책준비는 부족한 것이 아닌가라는 의구심을 갖게 했다. 다만 노무현 후보는 단체들의 질의의 배후에 있는 문제의식을 상당부분 짚어내고 있어, 문화 분야에 대한 소양이나 고민의 깊이에 있어 이회창 후보보다 앞서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권영길 후보는 질의를 이해하는 수준이나, 공약 내용, 공약의 실현 방안에 대해 비교적 상세하고 성의있는 답변을 해주어 상대적으로 가장 만족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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