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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파고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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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파고스<7>

김기협 위원의 SF기획 - 보네거트 작/박웅희 옮김

호텔 엘도라도의 여섯 투숙객, 즉 캐나다인을 자처하는 웨이트를 포함한 미국인 넷과 일본인 둘이 적을 둔 나라의 화폐는 지구상에서 여전히 높은 신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미국의 달러화든 일본의 엔화든 그 가치는 허상에 불과했다. 우주의 본질에 대한 견해가 그렇듯 달러화와 엔화의 신뢰성도 모두 사람들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만약 금융 위기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는 웨이트가 에콰도르에 캐나다달러를 가져올 만큼 확실하게 캐나다인 행사를 했더라면 그는 지금처럼 좋은 대접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순전히 사람들의 상상력이 빚어낸 결과였지만, 캐나다는 파산하지 않았는데도 외국인들은 물론 캐나다인들조차 캐나다달러를 받고는 쓸 만한 물건을 팔려 하지 않았다.

상상력이 만들어 낸 가치가 부식되기는 파운드와 프랑과 마르크도 마찬가지였다. 국가 영웅 안토니오 호세 데 수크레(Antonio Jose de Sucre(1785~1830). 베네수엘라 태생으로 에콰도르와 볼리비아를 해방시킨 혁명가이자 볼리비아 초대 대통령)에게서 이름을 딴 에콰도르의 수크레화는 바나나 껍질만도 못한 신세로 전락했다.

5층 객실에서 메리 헵번은 자신이 뇌종양에 걸리지나 않았는지 의심하고 있었다. 뇌가 그 동안 내내 최악의 조언을 하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일지 몰랐다. 그녀가 뇌종양을 의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불과 세 달 전에 남편 로이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 바로 뇌종양이었기 때문이다. 뇌종양은 그의 목숨만 앗아간 것이 아니었다. 그 전에 먼저 그의 기억을 교란하고 판단력을 마비시켰던 것이다.

뇌종양이 그에게 그런 짓을 하기 시작한 시기도 의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은 진저리나는 한 해가 되어 버린 그 해의 그 희망찬 1월에 남편이 ‘세기의 자연 유람’에 참가 신청을 한 것도 바로 그 뇌종양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가 ‘세기의 자연 유람’에 참가 신청을 했다는 것을 그녀가 알게 된 내력은 이렇다.

어느 날 오후, 그녀는 남편이 아직 회사에 있겠거니 생각하며 퇴근했다. 남편의 회사는 학교보다 한 시간 늦게 끝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로이는 벌써 집에 돌아와 있었고, 알고 보니 오후에 조퇴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워낙 일에 충실한 위인이라 게프코 사에 다닌 스물아홉 해 동안 단 한 시간도 빼먹은 적이 없었다. 아픈 적이 없었으니 병 때문에 쉰 적이 없음은 물론 다른 어떤 이유로도 쉰 적이 없는 남편이었다.

그녀가 어디 아프냐고 묻자 그는 그렇게 건강하기는 평생 처음이라고 말했다. 그녀의 눈에는 그가 늘 착한 소년으로 취급받는 것을 지겨워하는 소년처럼 으스대는 것처럼 보였다. 이 남자는 과묵하고 말을 가려하는 편이라, 평소에 객쩍은 소리 같은 것은 아예 입에 담지 않는 사람이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지금은 마치 잔소리 심한 엄마에게 대들듯이 가당찮은 말을 하고 있었다.

“땡땡이 좀 쳤소.”

메리는 이곳 과야킬에서 와서야 그런 상스런 표현은 뇌종양 탓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뇌종양은 속 편히 땡땡이를 치기에는 최악의 날을 골랐다. 전날 밤 차가운 폭풍이 불더니 하루 종일 진눈깨비가 몰아쳤으니까. 그런데도 로이는 일리엄의 간선 도로인 클린턴 가를 오르내리며 가게마다 들러서는 자기가 땡땡이를 쳤노라고 자랑하고 다녔다.

여하튼 메리는 그의 조퇴를 기쁘게 받아들이기로 하고, 그에게 지금은 뭔가 재미나는 일로 긴장을 풀어야 할 때라고 말하려 했다. 오락이라면, 그들은 주말과 휴가 동안은 물론 직장에서도 많이 즐겼다. 하지만 이 예기치 않은 일탈에는 일말의 불길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로이는 이른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그 날 오후의 일로 심란해 하는 것 같지 않았는가.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는 다시는 그러지 않기로 했고, 부부는 그 사건을 잊을 수 있었다. 두고두고 웃음거리로 삼을 일이긴 했지만.

한데 침대에 들기 전 로이가 자신의 못이 박인 손으로 만든 자연석 벽난로의 타오르는 불꽃을 응시하며 말했다.

“할말이 더 있소.”
“무슨 말씀이에요?”
“오늘 오후에,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니 여행사까지 들르지 않았겠소?”
일리엄에서 여행사라면 딱 하나뿐이었는데, 매기가 썩 좋은 곳은 아니었다.

“그래서요?”
“무슨 행사가 있다길래 우리도 참가 신청을 했소.”
로이는 마치 꿈 이야기라도 하듯 말했다.

“참가비도 지불했고 수속도 밟아 두었소. 우리 둘 다 말이오. 11월에 에콰도르로 날아가서 ‘세기의 자연 유람’을 떠나는 거요.”

그러니까 헵번 부부는 당시 스웨덴 말뫼에서 이제 막 용골을 붙였을 뿐 아직 청사진 다발 속에 들어 있던 바이아 데 다윈 호의 처녀 항해 홍보에 맨 처음 반응을 보인 사람들인 셈이었다. 로이 헵번이 매장에 들어섰을 때 여행사 직원은 그 날 받은 홍보 포스터를 스카치테이프로 붙이고 있던 참이었다.

여기서 또 내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내 자신 한 반 년을 말뫼에서 용접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바이아 데 다윈 호는 아직 내 도움이 필요할 정도까지는 형상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봄이 되어서야 나는 그 철제 처녀로 인해 말 그대로 머리가 어떻게 될 터였다. 질문 하나. 봄에 머리가 어떻게 되지 않는 사람도 있는가?

다시 본 줄기로 돌아가자.

일리엄의 홍보 포스터에는 아주 이상하게 생긴 새 한 마리가 화산섬 끄트머리에 앉아 항진 중인 백색의 아름다운 동력선을 바라보고 있는 광경이 그려져 있었다. 이 새는 갈라파고스 특산종이었으며, 따라서 거기 말고는 지구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기묘하게 생긴 이 검은 새는 체구가 오리만했으며 목은 뱀처럼 길고 나긋나긋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기묘한 것은 날개가 거의 없어 보인다는 점이었다. 보잘것없이 작은 날개는 몸에 납작하게 붙어 있었는데, 실은 물고기처럼 빠르고 깊이 헤엄칠 수 있도록 그렇게 퇴화된 것이었다. 그런 식의 포획법은 물고기를 잡아먹고 사는 새들이 대개 물고기가 수면에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긴 부리를 딱 벌리고 내리덮치는 것에 비해 훨씬 더 적극적인 방법이었다. 적응력이 뛰어난 이 새를 인간들은 ‘날지 못하는 가마우지’라고 불렀다. 이 가마우지는 물고기가 있는 곳까지 갈 수 있었다. 따라서 물고기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를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백만 년 전의 인간들이 자기네 커다란 뇌가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 회의하기 시작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가마우지의 선조들도 진화의 계보 어디쯤에선가 자기네 날개의 가치를 의심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다윈의 ‘자연 선택의 법칙’이 옳다면, 이런 과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날개가 작은 가마우지들이 고깃배가 노를 저어 나아가듯 해변에서 헤엄치는 것만으로도 비행사 친척들 중 가장 솜씨가 뛰어난 놈보다도 더 많은 물고기를 잡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런 놈들끼리 짝을 지었고, 그들 자손 중에 가장 날개가 작은 놈들이 더욱 훌륭한 어부가 되었고, 그놈들이 또 다시……

똑같은 일이 사람들에게도 일어나게 되었지만, 날개가 있을 리 없는 그들은 날개가 아니라 두 손과 뇌가 달라졌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제 더는 물고기가 미끼를 단 낚시에 걸리거나 멍청히 그물 속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사람들은 물고기를 잡고 싶으면 깊고 푸른 바다 속에서 백상어처럼 물고기를 뒤쫓으면 되는 것이다.

이제 그쯤은 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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