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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파고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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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파고스<9>

김기협 위원의 SF기획 - 보네거트 작/박웅희 옮김

로이 헵번이 죽어가고 있는 동안, 그리고 일리엄 시 전체가 죽어가고 있는 동안, 그러니까 그 남자와 그 도시가 모두 인류의 건강과 행복에 비우호적인 발달에 의해 살해되고 있는 동안, 로이의 큰 뇌는 그를 설득해 자신이 1946년 과야킬처럼 적도 바로 밑에 있는 환상 산호도 비키니 섬에서 있었던 미국 원폭 실험에 참여한 해병이었다고 믿도록 만들었다. 그는 정부를 상대로 수백만 달러를 요구하는 소송을 걸겠노라고 말했다. 거기서 쐰 방사능이 자기 부부가 애를 갖는 것을 막았고, 이젠 자기 뇌에 암까지 유발했다는 것이었다.

로이가 해군 복무를 한 건 사실이었지만, 그 외에 미합중국을 상대로 한 소송에서 그에게 유리한 증거라곤 하나도 없었다. 그는 1932년생이었고, 국가측 변호사들은 그 사실을 쉽게 입증할 터였다. 그러니까, 그가 피폭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시기에 고작 열네 살이었던 사실이 금방 들통나게 되어 있었다.
연대야 틀리든 말든 그는 정부가 소위 하등 동물들에게 자행한 소름끼치는 짓들을 생생하게 떠올렸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그는 별 도움 없이 거의 혼자서 일했는데, 우선 온 섬에 말뚝을 박고 말뚝마다 각종 동물을 묶었다. 그 일을 하게 된 연유를 그는 이렇게 밝혔다.

“그들이 나를 선택한 건 동물들이 나를 잘 따르기 때문이었소.”

이 말만은 사실이었다. 어떤 동물이든 그를 잘 따랐던 것이다. 로이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로는 게프코 사에서 직업 훈련을 받았을 뿐 아무런 공교육도 받지 못한 반면, 메리는 인디애나 대학에서 동물학 석사 학위까지 받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동물들과 어울리는 데는 그녀가 로이를 따라가지 못했다. 예컨대 그는 새들의 언어로 새들과 이야기할 수 있었는데, 그녀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그녀의 조상은 어머니쪽과 아버지쪽이 모두 음치 내림이었기 때문이다. 개나 농장 동물은 물론 게프코 사의 경비견이나 새끼 딸린 암퇘지까지, 제아무리 성깔 사나운 짐승이라도 로이는 5분 이내에 친구로 만들어 놓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말뚝에 묶인 동물들을 회상하면서 눈물을 흘릴 만도 했다. 동물을 상대로 그런 잔인한 실험이 자행된 것은 사실이지만, 실험 대상은 양과 돼지와 소와 말과 원숭이와 오리와 닭과 거위였지 로이가 설명한 것과 같은 그런 동물들은 분명 아니었다. 그는 공작과 백표(白豹)와 악어와 신천옹 등을 말뚝에 매었다고 했다. 그의 커다란 뇌 속에서 비키니 섬은 노아의 방주와는 정반대였다. 모든 동물이 한 쌍씩 피폭(被曝)되기 위해 거기 끌려왔던 것이다.

그야 전혀 의식하지 못했지만 그의 이야기 중 가장 황당한 대목은 이 말이었다.

“도날드가 거기 있었소.”

도날드는 이제 겨우 네 살 난 골든리트리버(털이 누런 영국 원산의 순한 조류 사냥개) 암놈으로, 그 시간이면 아마 일리엄의 자기 동네를 돌아다니고 있을 터였다,

로이는 이렇게 되뇌곤 했다.

“모든 게 다 어려웠지. 하지만 가장 어려웠던 것은 그놈의 말뚝에 도날드를 묶는 일이었소. 자꾸 시간만 흘러갔소. 도날드를 말뚝에 묶는 것만큼은 차마 못 하겠더란 말이오. 그놈은 묶는 대로 가만히 있더니 다 묶고 나니까 내 손을 핥고 꼬리를 흔듭디다. 그래, 내 그랬지. 아니, 부끄러움이고 뭐고 그냥 소리쳤어. ‘잘 가라, 친구야. 이제 넌 딴 세상에 가지만, 그곳은 틀림없이 여기보다 나을 거야. 어딜 가면 이 세상보다 나쁜 곳이 있겠냐?”

로이가 이렇게 바보짓을 연출하고 있는 동안 메리는 평일이면 어김없이 전에 가르치던 아이들 몇 명을 모아 여전히 커다란 뇌를 주신 것을 하느님께 감사해야 한다는 믿음을 심어 주고 있었다.

“너희들이라면 대신 기린의 목이나 카멜레온의 위장술, 아니면 코뿔소의 가죽이나 큰뿔사슴의 가지뿔을 택했겠니?”

늘 이런 식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예의 그 터무니없는 소리를 쏟아내고 있었다.

다음에는 로이가 있는 집으로, 인간의 뇌가 얼마만큼 잘못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는 그의 시위 현장으로 돌아갔다. 그는 검진을 받을 때 잠시 입원한 것 말고는 한번도 입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 유순했다. 이젠 운전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잘 이해했다. 메리가 지프형 스테이션웨건의 키를 감추었을 때도 서운해 하지 않았고, 심지어 더는 야영 갈 일이 없을 것 같으니 그걸 팔아 치우는 게 좋겠다는 말까지 했다. 해서, 메리는 자신이 일하는 동안 로이를 돌볼 간호사를 고용하지 않아도 되었다. 퇴직한 이웃 사람들에게 몇 달러만 집어주면 기꺼이 말동무가 되어 주고 그가 자해 같은 걸 하지 못하도록 잘 지켜 주었다.

그를 돌보는 사람은 전혀 성가실 일이 없었다. 그는 텔레비전을 많이 보았고, 몇 시간이고 뜰 안에서만 도날드, 그러니까 상상 속에서는 비키니 섬에서 죽은 골든리트리버와 놀았다.

하지만, 메리는 뒤에 갈라파고스 제도에 관해서는 마지막이 될 수업을 하던 중에 어떤 회의가 끼어들어 잠시 말을 잇지 못한다. 그 회의란, 말로 표현한다면 이쯤 될 것이다.

“난 거리를 싸돌아다니다 이 교실로 들어와 곧장 아이들에게 생명의 신비에 대해 설명을 해 대는 미친 여자가 분명해. 그런데도 이 아이들은 내 말을 믿고 있어. 내가 모든 것을 완전히 잘못 알고 있는데도.”

메리는 인류의 위대한 스승이라는 그 모든 옛 사람들에 대해서도 회의해야 했다. 그들의 두뇌는 온전했지만,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잘못 짚기는 로이와 별반 다를 게 없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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