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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파고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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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파고스<14>

김기협 위원의 SF기획 - 보네거트 작/박웅희 옮김

현생 인류의 발원지 산타 로살리아 섬에서 정착해 산 45년 동안, 이곳에는 출생은 많았지만 축하할 만한 정식 결혼이라곤 없었다. 거기서는 사람들이 애초부터 짝짓기를 했다. 히사코와 셀레나는 남은 평생 짝을 이루고 살았다. 선장과 메리 헵번은 처음 10년 동안 짝을 짓고 살았다. 그녀가 그로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어떤 짓을 저지를 때까지는 그랬다. 그 어떤 짓이란 그의 정자를 허락 없이 이용한 일이었다. 여섯 명의 다른 여성들도 모두 한 가족으로 살긴 했지만, 역시 기왕의 친소 관계에 따라 짝을 지었다.

2027년 가미가제와 아키코 사이에 산타 로살리아 섬 최초의 결혼이 이루어졌지만, 이때는 이미 원래의 정착자들은 모두 오래전에 내세로 통하는 꾸불꾸불한 하늘색 터널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없었고, 만다락스는 따개비를 가득 단 채 남태평양 바닥에 가라앉아 있었다. 만약 만다락스가 그때까지 남아 있었더라면 결혼에 대해 아주 불쾌한 말들을 일러 주었을 것이다. 예컨대 이런 식으로 말이다.

가장과 여주인, 그리고 두 명의 노예로 구성된
하나의 공동체로, 모두 합해 둘이 된다.
― 암부로스 비어스(1842∼?)

사랑에서 얻은 결혼이, 시간이 지나면
포도주에서 얻은 식초처럼,
그 고상한 천상의 풍미를 잃고 시큼해져서,
흔하디흔한 가정의 냄새를 풍기게 된다.
― 바이런(1788∼1824)

이런 말이야 이외에도 많다.

갈라파고스 제도에서 이루어진 인간의 마지막 결혼은, 따라서 지구상의 마지막 결혼은, 23011년 페르난디나 섬에서 거행되었다. 오늘날은 결혼이 무언지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만다락스가 과거 한창 때 결혼에 대해 보인 냉소는 대체로 그 정당성이 입증되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내 부모만 해도 결혼을 함으로써 서로 불행해졌지 않은가. 어느 날 산타 로살리아 섬에서 노파가 된 메리 헵번이 털북숭이 아키코에게 한 말도 이를 뒷받침한다. 그녀는 그때 자기와 로이는 거의 틀림없이 일리엄 시를 통틀어 행복한 결혼 생활을 보낸 유일한 부부였다고 말했으니까.

당시 결혼 생활을 그토록 어렵게 만든 것은 그 밖의 숱한 번민을 불러일으킨 바로 그 원흉, 과대 두뇌였다. 그 천덕꾸러기 컴퓨터는 너무나 많은 주제들에 대해 너무나 많이 대립되는 견해들을 동시에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떤 한 견해나 주제를 너무나 빨리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있었으므로, 남편과 아내의 격렬한 말다툼도 눈을 가린 채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들의 싸움처럼 끝날 수 있었다.

예컨대 메리 헵번이 옆방에서 자살을 생각하고 있는 사이에 히로구치 부부는 자기 자신과 상대방에 대한, 그리고 사랑이며 섹스며 일이며 세계 같은 것들에 대한 견해를 번개 같은 속도로 바꾸고 있었다.

히사코는 한 순간엔 남편은 너무나 어리석다, 자기가 자신과 뱃속의 아이를 구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음 순간엔 남편은 누구 못지않게 영리하다, 자기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남편이 이 구렁텅이에서 금방 자기들을 구해 낼 것이라고 생각을 바꾼다.

*젠지는 한 순간은 그녀가 무력하고 천덕꾸러기 노릇이나 하고 있다 하여 내심 그녀를 저주하나, 다음 순간엔 이 여신과 그녀가 곧 나을 딸을 위해 필요하다면 목숨까지 바치겠노라 다짐한다.

대체 무슨 소용이 있어서 인간 아이를 다 기를 때까지 최소한 14년 정도는 함께 지내게 되어 있는 두 동물의 머릿속에, 광기까진 아니더라도 그토록 심한 감정의 변덕이 일었던 것일까?

오랜 침묵 끝에 *젠지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뭔가 다른 문제로 고민하고 있어.”

그의 말은 그녀가 그들이 현재 빠져 있는 총체적인 난관보다 훨씬 사적인 문제로 열에 받쳐 있고 꽤나 오래전부터 그랬다는 지적이었다.

“아니에요.”

그녀가 말했다. 이런 응답은 저들 커다란 두뇌들의 또 다른 특성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만다락스는 꿈도 못 꿀 능력이 있었는데, 그것은 시도 때도 없이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가 다시 다그쳤다.

“무엇 때문인지 당신은 지난 한 주일 동안 내내 끙끙거렸소. 속 시원히 털어 놔 봐요. 무슨 문젠지 말해 보란 말이오.”

그녀가 다시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라니까요.”

누가 이런 컴퓨터와 14년을 보내고 싶겠는가? 진실을 말하는지 어떤지 전혀 판단이 서지 않는 이런 컴퓨터와.

그들의 대화는 일본어였으며, 내가 이 이야기에서 시종 사용하고 있는 백만 년 전의 미국 영어가 아니었다. *젠지가 만다락스를 가지고 신경질적으로 만지작거리다가 어디를 어떻게 건드렸던지 만다락스가 두 사람의 말을 죄다 나바호 인디언의 언어로 통역하기 시작했다.

“그렇게도 알고 싶으세요? 유카탄에 있던 어느 날 오후 오무호에서 만다락스를 만져 봤어요.”

히사코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오무호는 전장 100미터에 달하는 *매킨토시의 전용 요트였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당신은 가라앉은 보물을 찾으러 자맥질을 하고 있었지요?”

당시 *젠지는 수영을 잘 못하면서도 *매킨토시의 성화에 못 이겨 40미터 아래 가라앉아 있는 갤리선(15-18세기 초 스페인과 지중해 지역에서 사용한 큰 돛배)에 스쿠버다이빙으로 들어가서 깨진 접시며 포탄 따위를 건져왔다. *매킨토시는 그의 앞 못 보는 딸 셀레나에게도 3미터짜리 나일론 끈으로 그녀의 오른쪽 손목을 그의 오른쪽 발목에 묶고서 잠수를 하도록 시켰다.

히사코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만다락스란 놈, 참 대단하더군요. 당신은 내게 말해 주지 않았지만, 못하는 것이 없더라구요. 더 듣고 싶으세요?”

이번에는 그가 거짓말을 해야 할 차례였다.

“아니, 됐소.”

그런데도 그녀는 고집스레 말을 이었다.

“만다락스는 아주 훌륭한 꽃꽂이 선생이더군요.”

꽃꽂이는 그녀의 장기였다. 하지만 일개 작은 블랙박스가 자신이 가르치는 것을 가르칠 수 있으며 그것도 1천 가지의 언어로 가르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자 그녀의 자존심은 여지없이 구겨지고 말았다.

“말하려고 했어. 말해 줄 생각이었다구.”

물론 거짓말이었다. 사실, 그는 그녀가 만다락스의 꽃꽂이 기능을 알아낸다는 것은 은행 금고의 암호 숫자를 맞히는 것만큼이나 가망 없는 일이라 생각했었다. 그녀는 만다락스의 작동법을 익히는 걸 무척 싫어했으며, 죽을 때까지 작동법을 모르고 지낸다.

그런 그녀가 오무호에서 별 생각 없이 이 버튼 저 버튼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만다락스가 별안간 꽃꽂이 강사로 변신하는 것이 아닌가. 만다락스가 말하길, 가장 아름다운 꽃꽂이는 하나나 둘, 혹은 기껏해야 세 요소로 이루어지며, 세 요소를 배열할 때 셋 다 같거나 셋 중 둘이 같아도 되지만, 셋 모두가 달라서는 안 된다고 했다. 만다락스는 또 둘 이상의 요소를 배열할 때 요소들의 이상적인 높낮이 비율, 그리고 요소들과 화병이나 화반(花盤)의 직경 및 높이 사이의 이상적인 비율까지 말해 주었다.

*젠지 히로구치가 만다락스에게 꽃꽂이 등의 지식을 직접 가르친 것은 아니었다. 그 일은 부하 직원들이 맡아 했다. 만다락스에게 꽃꽂이를 가르친 직원은 히사코의 유명한 강의 시간에 녹음기를 가져가서는 나중에 그 내용을 축약했을 뿐이었다.

*젠지는 오나시스 여사를 깜짝 놀래 줄 선물로 만다락스에게 꽃꽂이를 가르쳤노라고 히사코에게 둘러댔다. 그는 ‘세기의 자연 유람’ 마지막 밤에 여사에게 그 기계를 선물할 계획이었다고 말했다.

“여사를 위해 꽃꽂이를 가르친 거요. 아름다움을 예찬하는 분이라고들 하지 않소?”

이 말은 요행히 사실이었지만, 히사코는 믿지 않았다. 1986년 당시 좋지 않은 일은 대개 그렇게 일어났다. 거짓말이 하도 횡행하다 보니 모두가 더는 아무도 믿지 않았다.

히사코가 말했다.

“어련하셨겠어요? 당연히 오나시스 여사를 위해서 그랬겠죠. 그렇게 해서 당신 아내의 영예도 높이셨고요. 나 같은 사람을 그 불멸의 거장들 반열에 올려놓으셨으니.”

불멸의 거장들이란 만다락스가 인용하는 대사상가들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녀는 이제 바짝 심술이 돋아서 그가 자신의 업적을 폄하한 만큼 자기도 그의 업적을 깎아내리고 싶었다.

“내가 멍청한 여자지.”

만다락스가 이 말을 충실하게 나바호어로 옮겼다.

“당신이 하는 일이 타인에 대해 그토록 악의적이고 모멸적인데도 그 사실을 깨닫는 데 그토록 긴 세월이 걸리다니, 내 자신을 용서 못할 지경이에요.”

그녀가 말을 이었다.

“이봐요, *히로구치 박사 나리. 당신 눈에는 당신 외에 모든 사람이 그저 이 지구에서 자리나 차지하고서 소음이나 일으키고, 귀중한 자원이나 허비하고, 땅 좁은 줄 모르고 애들이나 펑펑 낳고, 아무 데고 쓰레기나 버리는 하찮은 인간들로 보이죠? 그러니, 우리가 당신같이 훌륭한 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몇 가지 어리석은 일들이 기계에게 넘어가 버리면, 지구는 훨씬 더 멋진 곳이 되지 않겠어요? 지금 당신이 귀 긁개로 쓰고 있는 만다락스 말이에요, 그 잘난 기계는 언어, 수학, 역사, 의학, 문학은 물론 하다못해 꽃꽂이라도 지식을 가진 사람에게 보답은커녕 감사조차 할 줄 모르는 속 좁은 자기중심병자의 변명이 아니면 대체 뭐죠?”

인간이 하는 모든 일―그렇다. 모든 일이었다―을 기계에게 시키고자 하는 당시의 광증이 어디에서 비롯했는지에 대해서는 내 견해를 밝힌 바 있다. 여기서는 SF 작가이셨던 아버지가 언젠가 스포츠 로봇을 만들고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놀림을 당하는 어느 남자의 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는 사실을 덧붙이고 싶을 따름이다.

그 주인공은 매번 홀인원을 칠 수 있는 골프 로봇과 매번 골을 넣을 수 있는 농구 로봇, 매번 에이스를 칠 수 있는 테니스 로봇 같은 것들을 개발했다. 처음에 사람들은 그런 로봇이 무슨 소용이 있는지 알지 못했다. 하여, 발명가의 아내는 내 어머니가 아버지를 버린 것처럼 남편을 버렸고, 그의 자식들은 그를 정신 병원에 넣으려 했다. 그러자 그는 여러 광고업자에게 자기 로봇들이 자동차, 맥주, 면도날, 손목시계, 향수 등 파는 것이면 무엇이든 광고할 수 있다고 알렸다. 아버지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그렇게 해서 굉장한 부자가 되었다. 그 로봇들처럼 되고 싶어 하는 스포츠광이 쌔고 쌨기 때문이었다.

왜냐고는 묻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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