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갈라파고스<22>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갈라파고스<22>

김기협 위원의 SF기획 - 보네거트 작/박웅희 옮김

도노소 대사의 ‘마지막 칸카보노’를 위한 26행의 애도시는 아무리 잘 쳐 줘도 때가 일렀다. 차라리 ‘마지막 남미 본토인’과 ‘마지막 북미 본토인’과 ‘마지막 유럽 본토인’과 ‘마지막 아프리카 본토인’과 ‘마지막 아시아 본토인’ 들을 위해 종이 위에 눈물을 떨구는 것이 옳았다.

그는 전화로 바비 킹에게 “오나시스 여사가 끝내 불참하는 걸 알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두 기절하고 말거요”라고 말했는데, 그 후 한 시간여 사이에 그의 우려는 현실로 드러난다.

“일이란 한 달 새에도 돌변할 수 있는 겁니다. 처음엔 ‘세기의 자연 유람’ 외에도 에콰도르인들이 기대를 갖고 기다릴 만한 일이 많이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그 행사가 그들이 기다릴 만한 유일한 일이 돼 버렸지 않아요?”

킹의 말이었다.

“커다란 크리스탈 샴페인펀치 사발을 준비했는데 밤을 새고 나니 녹슨 글리세린 통으로 변해 있는 격이지요.”

도노소가 말을 받았다.

그는 ‘세기의 자연 유람’이 에콰도르에 임박한 해결할 길 없는 경제난을 한두 주 정도 지연시켜 준 것만은 사실이라고 했다. 북쪽의 콜롬비아 정부와 남동쪽의 페루 정부는 이미 군사 쿠데타로 전복된 터였다. 그리고 페루의 군사 지도자들은 국민의 관심을 돌려놓으려고 이제 막 에콰도르에 선전 포고를 할 참이었다.

“만약 오나시스 여사가 지금 에콰도르에 간다면, 우리 국민들은 여사를 구세주처럼, 기적을 행하는 사람처럼 영접할 겁니다. 여사가 과야킬에 식량을 실은 배를 불러 주거나 미군 전폭기를 동원해 낙하산으로 곡물과 우유와 과일을 아이들에게 떨어뜨려 주기를 기대할 겁니다.”

도노소가 말했다.

여기서 나는 한마디 덧붙이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은 어떤 것이 되었든 구원 같은 것을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태어난 지 아홉 달만 넘으면 그렇게 된다. 오늘날 인간의 유년기는 거기까지가 끝이니까.

내 자신도 열 살까지는, 그러니까 어머니가 아버지와 나를 두고 나가실 때까지는, 어리석음과 부주의로부터 구원을 받으려면 남의 힘을 빌려야 했다. 그 후로는 스스로 구원했다. 메리 헵번은 석사 학위를 따는 스물두 살 때까지 부모로부터 독립하지 못했다. 바이아 데 다윈 호 선장 아돌프 폰 클라이스트는 스물여섯이 될 때까지, 즉 자기 아버지가 헌팅턴 무도병의 발병으로 어머니를 살해할 때까지, 노름빚과 음주 운전과 공무 집행 방해와 공공 기물 파괴 같은 짓들에 부과된 벌과금을 늘상 부모가 대 주었다. 그는 그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자기가 저지른 과실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지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유년기가 대개 그토록 늘어졌으므로, 부모가 돌아간 후에도 평생 동안 누군가가―하느님이나 성인이나 수호천사나 별 같은 것들이―늘 자기를 돌보아 줄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수도 없이 많았다.

오늘날 사람들은 그런 환상을 품고 있지 않다. 사람들은 일찌감치 세상을 알게 된다. 자식이든 부모든 아차 방심하다가는 그대로 범고래나 백상어에게 산 채로 먹히게 마련이다. 이런 광경을 목도하지 못한 어른은 참으로 드물다.

백만 년 전,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는 것을 막거나 수정된 난자를 자궁에서 제거하기 위해, 그러니까 인구가 식량 공급을 초과하는 것을 막기 위해, 기계적 수단을 사용하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를 놓고 늘 뜨거운 논쟁을 벌였다.

오늘날은 그런 문제가 깨끗이 해결되었다. 그런 부자연스런 노력은 전혀 필요가 없어졌다. 범고래와 백상어들이 인구를 지극히 적절한 수준으로 유지시켜 주므로 굶주리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메리 헵번은 일리엄 고교에서 일반 생물뿐만 아니라 성 교육도 담당했다. 그녀는 그래서 자신은 사용한 적도 없는 여러 가지 피임 기구에 대해 설명해야 했다. 그녀에게는 남편만이 유일한 애인이었고, 더구나 남편은 늘 아이를 원했으므로 그런 피임 기구는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로이와 수년 동안 정성어린 성 관계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임신 한번 못해 본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지극히 순간적이고 하찮아 보이는 성적 접촉에 의해서도 여성이 얼마나 쉽게 임신할 수 있는지에 대해 학생들에게 경각심을 심어 줘야 했다. 그렇게 몇 년을 가르치노라니, 그녀의 훈계성 강의에는 자신과 친하게 지내던 학생들의 이야기도 포함되게 되었다. 바로 그곳 일리엄 고교생들의 이야기였다.

그 학교에서 임신 사건이 한 건도 없이 지나가는 학기는 매우 드물었다. 저 기억에도 생생한 1981년의 봄 학기에는 그런 사건이 무려 여섯 건이나 있었다. 진정 사실대로 말하거니와, 아이를 가진 여학생들의 절반가량은 짝짓기 상대에 대한 사랑을 운위했다. 하지만 다른 절반은 그 명백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출산을 초래할 어떤 짓도 한 바 없노라고 우겼다.

메리는 기억에도 생생한 1981년의 봄 학기가 끝날 무렵 동료 여선생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임신이 감기 걸리는 것만큼 쉬워요.”

확실히 거기엔 유사점이 있었다. 감기와 임신은 둘 다 점막을 가장 좋아하는 세균들이 일으키는 거니까.

10년 후 산타 로살리아 섬에서, 메리 헵번은 오로지 성욕을 해소하기 위해 방출된 한 남성의 씨앗에 십대 소녀가 얼마나 쉽게 수태하는지를 몸소 확인하게 된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