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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파고스<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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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파고스<32>

김기협 위원의 SF기획 - 보네거트 작/박웅희 옮김

모두가 무용단 버스에 자리를 잡은 순간, 군중들 속에서 '세기의 자연 유람'이 취소되었다는 라디오 뉴스가 흘러나왔다. 군중들은 물론 그들을 저지하고 있는 군인들에게도, 그것은 호텔에 있는 식량이 이제 모두 그들의 것이라는 소리나 매한가지였다. 사실, 어느 시대든 역시 식량이 최고였다. 백만 년 동안 떠돌아다닌 내 말을 믿으시라.

만다락스 가라사대:

먹이가 우선이고, 도덕은 다음이다.
― 베르톨트 브레히트(1898∼1956)

하여, 호텔 입구를 향해 돌진하는 군중의 파도가 순식간에 버스를 삼켜 버렸다. 사람들은 버스나 그 안에 탄 사람들이야 안중에도 없었다. 하지만 뒤처진 군중들이 버스 옆을 쾅쾅 치며 아우성을 쳤다. 호텔 안은 이미 비집고 들어갈 틈새도 없었고, 따라서 자기들에게까지 돌아올 식량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분통이 터졌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버스 안에 있다는 건 확실히 섬뜩한 노릇이었다. 버스가 뒤집힐 수도 있었다. 방화를 당할 수도 있었다. 돌팔매질로 버스 유리창이 유산탄 파편으로 돌변할 수도 있었다. 그들은 버스 바닥에 앉아 몸을 수그렸다. 히사코가 앞 못 보는 셀레나에게 처음으로 친밀한 행동을 나타냈다. 그녀는 일본어로 속삭이며 두 손으로 셀레나의 무릎을 바닥에 꿇게 하고 머리를 숙이게 했다. 그러고는 자기도 셀레나와 *카자크 곁에 무릎을 꿇고서 그녀의 등에 자기 팔을 얹었다.

이후로 오랫동안 히사코와 셀레나는 정말이지 끔찍하게 서로를 위해주며 살아간다. 정말로 예쁘고 맘씨고운 아이도 기른다. 두 사람의 이런 모습에 내 얼마나 탄복했던가.

*제임스 웨이트는 다시 한번 아이들의 보호자 노릇을 했다. 그는 겁에 질려 바닥에 쭈그리고 있는 칸카보노 소녀들을 제 몸으로 가리고 있었다. 그야 사실 제 한 몸이나 구할 요량이었지만, 메리 헵번이 그의 양손을 꼭 쥐고 당겼으므로 두 사람은 하나의 인간 요새를 형성한 셈이 되었다. 그러니까 유리 파편이 덮친다 할지라도, 그것은 두 어른에게 박히지, 소녀들은 무사할 것이었다.

만다락스 가라사대:

세상에 이보다 큰 사랑은 없도다. 한 사람이 저희 친구들을 위해 목숨을 던지는 그런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 성 요한(B.C. 4?~30?)

*웨이트의 심장이 섬유성 연축을 일으킨 것은 그가 이렇게 꾸부정한 자세로 있을 때였다. 섬유성 연축이란 심장 섬유가 꼬여 경련이 일어남으로써 순환계 내의 혈액 순환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 못하는 상태를 이르는 말이었다. 여기에도 유전 문제가 작용하고 있었다. 그로서는 이런 사실을 알 리 없었지만, 부녀간이기도 했던 웨이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둘 다 40대 초반에 심장 발작으로 죽었다.

*웨이트가 일찍 죽는 바람에 산타 로살리아 섬에서 짝짓기 게임에 참여할 수 없었던 것은 오늘날 인류에게는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그러나 한편, 오늘날 인류가 시한 폭탄과 같은 그의 심장을 물려 받았더라도 사정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아무도 그 폭탄이 터질 만큼 오래 살진 못하니까. 오늘날은 *웨이트 또래만 되어도 노아의 시대 이전 유대 족장으로 969년을 살았다는 므두셀라와 같은 장수자에 속할 것이다.

한편, 저 아래편 부두에서는 또 다른 폭도들이, 그러니까 에콰도르의 사회 체제에 섬유성 연축을 일으킨 또 다른 기관이, 바이아 데 다윈 호에 올라가 식량은 물론 텔레비전, 전화기, 레이다, 수중음파탐지기, 라디오, 전구, 나침반, 화장지, 카페트, 비누, 주전자, 남비, 해도(海圖), 매트리스, 모터 보트 등 온갖 것들을 약탈하고 있었다. 이들은 심지어 닻을 올리고 내리는 윈치까지 훔치려 했으나, 이 장비는 다만 수리할 수 없을 정도로 손상시키는 데 그쳤다.

그래도 구명정만은 남겨 두었다. 물론, 그 구명정에 있던 비상 식량은 사라지고 없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폰 클라이스트 선장은 속옷 바람으로 망루로 달아나 있었다.

호텔에 돌입하면서 버스를 잠기게 했던 군중의 파도는 이제 버스를 남기고 썰물처럼 빠져 나갔다. 버스는 이제 어디든 맘대로 갈 수 있었다. 그 아수라장 속에서 다치거나 죽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누워 있었으나, 이제 그들 말고는 가까이에 아무도 없었다.

해서, *지그프리드 폰 클라이스트는 영웅적 인내심을 발휘해 헌팅턴 무도병의 발작과 환각들을 억눌러 가며, 가까스로 운전석에 앉았다. 그는 자신의 손님 열 명이 지금 그대로 바닥에 있는 것이 제일 안전하겠다고 생각했다. 외부에도 보이지 않고 서로 위안이 되어 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시동을 걸고 연료 탱크에 가솔린이 가득 들어 있음을 확인했다. 에어컨을 틀었다. 그는 영어로―그의 말을 알아들을 사람은 단 한 사람 메리 헵번뿐이었지만―버스 안이 금방 시원해질 것이라고 알렸다. 그것만은 장담할 수 있었다.

밖은 이제 어스름이 깃든 저녁이었으므로 주차등을 켰다.

페루가 에콰도르에 선전 포고를 한 것은 대략 그 무렵이었다. 그 시각 페루 전폭기 두 대가 에콰도르 상공에 떠서, 한 대는 과야킬 국제공항에서 나오는 레이다 신호에, 또 한 대는 갈라파고스의 발트라 섬 해군 기지에서 나오는 레이다 신호에 로켓을 겨낭했다.

그 해군 기지에는 훈련선 한 척, 해안경비정 여섯 척, 원양예인선 두 척, 초계잠수함 한 척, 드라이독 한 좌가 있었고, 그 드라이독에는 구축함 한 척이 얹혀 있었다. 그 구축함은 바이아 데 다윈 호를 제외하면 에콰도르 해군이 보유한 가장 큰 선박이었다.

만다락스 가라사대:

그것은 더없이 좋은 시대이자 지극히 험한 시대였다. 그것은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그것은 믿음의 시대이자 불신의 시대였다. 그것은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었다. 그것은 희망의 봄이자 절망의 겨울이었다. 우리 앞에는 모든 것이 있기도 했고 아무것도 없기도 했다. 우리는 모두 곧장 천국으로 가고 있기도 했고 우리는 모두 곧장 지옥으로 가고 있기도 했다.
― 찰스 디킨스(181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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