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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파고스<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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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파고스<39>

김기협 위원의 SF기획 - 보네거트 작/박웅희 옮김

제 2 부

그리하여 이렇게 되었다

***1**

칠흑 같은 밤중에 백색의 신형 선박이 해도도 나침반도 항해등도 없이 차갑고 깊은 대양을 최고 속도로 가르고 있었다. 그러나 인류의 견해에 따르면, 그 배는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페루의 미사일에 산산조각이 난 것은 바이아 데 다윈 호가 배가 아니라 산 마테오 호였으니까.

그것은 유령선이었다. 육지의 시계를 벗어나 선장의 유전자와 승객 10명 가운데 7명의 유전자를 나르는 유령선. 이 모험길은 그로부터 1백만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나는 유령선의 유령이었다. 나는 킬고어 트라우트라는, 뇌가 큰 SF 작가의 아들이다.

나는 미 해병대의 탈영병이었다.
스웨덴에 정치 망명을 한 나는 곧 시민권을 허락받아 그곳 말뫼에서 용접공이 되었다. 어느 날 선체에서 일하다가 철판 추락으로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목이 날아가 버렸다. 그때 나는 내세로 통하는 하늘색 터널에 들어가길 거부했다.

육화하는 것쯤이야 내 능력이면 언제든 가능했지만, 나는 그 능력을 초기에 딱 한 번 발휘했을 뿐이다. 그것도 바이아 데 다윈 호가 말뫼를 떠나 과야킬로 향하는 도중 북대서양에서 폭풍우를 만났을 때의 짧은 순간뿐이었다. 나는 망대에 모습을 드러냈는데, 스웨덴 기간 선원이 나를 쳐다보았다. 그는 술을 마시고 있었다. 머리가 잘려 나간 내 몸뚱이는 고물을 향하고 있었고, 두 손으로는 잘린 머리를 농구공처럼 떠받들고 있었다.

하여, 과야킬 항을 급히 떠나 그 첫 밤이 다 새도록 브리지에 함께 있었는데도, 아돌프 폰 클라이스트 선장은 곁에 서 있는 나를 볼 수 없었다. 그는 그 밤을 꼬박 새웠다. 이제 정신은 말짱했지만 심한 두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그 증상을 메리 헵번에게 "황금빛 스크루가 눈앞에서 뱅뱅 도는 기분"이라고 설명했다.

그에겐 간밤의 폭주를 기념하는 또 다른 유물이 남아 있었다. 버스 지붕에 기를 쓰고 오르다 거푸 굴러 떨어지면서 입은 타박상이며 찰과상이 그것이었다. 그도 자신이 얼마나 큰 임무를 맡게 될지를 알았더라면 그토록 취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는 그런 사정을 이미 고급 선원실 뒤쪽의 상갑판에서 *제임스 웨이트를 간호하느라 역시 밤을 새우고 있던 메리 헵번에게 변명한 터였다.

메리는 블라우스를 벗어 만 것을 베개 삼아 *웨이트를 눕혔는데, 굳이 그곳을 택한 것은 배에서 어둡지 않은 곳은 거기뿐이기 때문이었다. 거기만은 달이 진 후에도 별빛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해가 떠오르면 맨 철판 위에서 튀김 신세가 되지 않도록 그를 선실로 옮길 생각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전부 아래쪽 주갑판에 있었다. 셀레나 매킨토시는 그녀의 개를 베고 1등 선실에 누워 있었고, 여섯 칸카보노 소녀도 그곳에 있었다. 소녀들은 서로의 몸을 베었다. 히사코는 1등 선실의 화장실 안에서 변기와 세면대 사이에 쐐기처럼 끼여서 깊이 잠들어 있었다.

메리가 선장에게 넘겨 준 만다락스는 브리지의 서랍에 있었다. 배를 통틀어 하나뿐인 그 서랍에는 온갖 것이 다 들어 있었다. 서랍이 조금 열려 있었으므로, 만다락스는 간밤에 들은 사람들의 말을 죄다 번역해 놓고 있었다. 서랍을 넣을 때 어쩌다 그 언어로 설정되었는지 번역된 말은 키르기즈어였다. 거기엔 선장의 행동 계획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 내용은 이랬다.

곧장 갈라파고스 제도의 발트라 섬으로 간다. 그곳엔 입거(入渠) 시설과 비행장과 병원이 있다. 또 고성능 무선국이 있으니까 두 차례의 폭발이 어찌된 건지, 그러니까 선장의 주장처럼 지구 곳곳에 운석 소나기가 쏟아진 것인지 아니면 메리의 말대로 3차 대전이 벌어진 것인지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계획이 키르기즈어나 그 밖에 사실상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몇몇 다른 언어로 번역된 것은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그들은 갈로파고스로 가는 정상 항로를 한참 이탈해 있었으니까.

그의 무지 하나만으로도 바이아 데 다윈 호를 정상 항로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충분했다. 하지만 그는 첫날 밤 술기운 속에서, 유성이 떨어졌다 싶은 방향으로 선수를 몇 번이나 바꿈으로써 실책에 실책을 거듭했다. 그의 커다란 뇌가 그로 하여금 운석 소나기가 쏟아지고 있다고 믿게 했다는 것을 상기하라. 그는 유성을 볼 때마다 그것이 바다에 떨어져 커다란 파도를 일으킬 것으로 지레 짐작했던 것이다.

때문에 선장은 그 파도를 뾰족한 뱃머리로 받기 위해 배를 그쪽으로 돌렸는데, 해가 떠올랐을 때는 그의 커다란 뇌 덕분에 배의 위치도 방향도 가늠할 수 없는 지경에 처해 있었다.

한편, *제임스 웨이트 곁에서 수면과 각성 사이를 오락가락 하던 메리 헵번은 오늘날 사람들의 뇌로는 도저히 하지 못할 어떤 일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과거를 되살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다시 처녀였다. 침낭에서 자다가, 아주 희미한 새벽 어스름 속에서 쏙독새 우는 소리에 깨어나고 있었다. 그녀는 인디애나의 어느 주립 공원에서 야영을 하고 있었다. 유럽인들이 길들일 수 없고 식용으로도 쓸모가 없는 동식물은 하나도 용납하지 않겠노라고 선언하기 전에는 도처가 살아 있는 박물관이었지만, 이젠 그 작은 일부만이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꿈속의 메리가 그녀의 고치에서, 그녀의 침낭에서 고개를 내밀자, 썩어 가는 통나무들과 막힘 없이 흐르는 시내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영겁에 걸친 죽음과 소멸의 향기로운 퇴적 위에 누워 있었다. 미생물이거나 잎을 소화시킬 수 있는 동물이라면 거기 널린 게 다 먹이였겠지만, 1백만 년하고도 30년 전의 인간에게 아침 식사가 되어 줄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때는 유월 초, 한창 향기로운 계절이었다.

새 우는 소리는 쉰 발짝쯤 떨어진, 찔레나무와 옻나무가 얽힌 덤불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이 자연의 자명종 소리가 기꺼웠다. 침낭을 고치로 생각하고서, 지금처럼 이렇게 일찍 일어나 거기서 기분 좋게 성충이 되어 나오자는 것이 그녀가 잠자리에 들면서 세운 계획이었으니까.

이 기쁨! 이 만족!

정말 완벽했다. 함께 온 친구는 세상 모르고 자고 있었다.

해서, 그녀는 이 자명종 친구를 만나기 위해 푹신푹신한 숲마루를 슬그머니 건너 그 덤불로 갔다. 그러나 그녀가 본 것은 쏙독새가 아니라 키가 크고 비쩍 마른 수병 복장의 청년이었다. 높은 휘파람 소리로 날카로운 쏙독새 울음소리를 낸 것도 그였다. 그는 바로 로이, 미래의 남편이었다.

그녀는 잠시 갈피를 못 잡고 혼란에 빠졌다. 그토록 깊은 내륙에 수병 제복이라니, 참으로 기이한 파견대였다. 침입 당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공격을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 아주 이상한 사람이 그녀를 쫓아오려면, 그는 먼저 찔레 덤불부터 뚫고 나와야 할 것이었다. 그녀는 옷을 입은 채로 잤으므로, 신발을 신지 않은 발을 제외하면 옷을 다 입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오는 기척을 들었다. 그의 귀는 놀랍도록 예민했다. 그의 아버지도 그랬다. 그것은 대물림되는 특성이었다.

"안녕하십니까?"

그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그녀가 인사를 받았다.

훗날 그녀는 그 에덴 동산에 사람은 자기만 있는 줄 알았는데, 세상에 남부러울 것이 없다는 듯이 행동하는 이 수병 복장의 피조물을 만나게 되었다고 말했다. 로이는 로이대로, 실은 그녀야말로 세상에 남부러울 것 없다는 듯이 행동한 피조물이었다고 응수한다.

"여기서 뭘 하시죠?"

"여기서 자면 안 되게 되어 있을 텐데요."

그 점은 그의 말이 옳았고, 메리도 그걸 알고 있었다. 그녀와 친구는 그 살아 있는 박물관의 규정을 어기고 있었다. 그들은 밤에는 하등 동물만 있어야 할 곳에 있었던 것이다.

"해군이세요?"

"예, 그래요. 아니, 최근까지는 그랬습니다."

이제 막 해군을 제대한 그는 집에 돌아가기 전에, 히치하이킹으로 전국을 유람하고 다녔는데, 군복을 입고 있으면 사람들이 더 잘 태워 주기 때문이었다.

오늘날은 메리가 로이에게 그랬듯 "여기서 뭘 하시죠?"라고 물어 보아야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지금은 어디에 있든 거기 있는 이유가 한결같이 단순하고도 명료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로이처럼 복잡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도 아무도 없다. 그가 그 공원에 나타난 내력은 이랬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제대한 로이는 제대병에게 지급되는 티켓을 현금으로 바꾸어 침낭 하나를 사 가지고 히치하이킹으로 그랜드캐년과 옐로스톤 국립공원을 비롯해 평소 가 보고 싶었던 곳들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새를 몹시 사랑하는 로이는 새들의 언어로 새들과 이야기할 수가 있었다.

그는 오래 전에 멸종된 것으로 알려진 상아색부리딱다구리 한 쌍이 인디애나의 이 작은 주립 공원에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자동차 라디오에서 들었다. 그래서 곧장 이곳으로 온 것이었는데, 그 뉴스는 누군가의 장난질이었음이 밝혀졌다. 그 크고 아름다운 원시림 서식조는 정말로 멸종되었다. 인간이 그들의 자연 서식지를 모두 파괴해 버리는 바람에 그 딱따구리들이 필요한 만큼 고목과 평화와 고요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딱다구리에겐 평화와 고요가 긴요합니다. 당신도 그렇겠죠? 내가 방해가 되었다면 미안합니다. 나는 새가 하지 않을 짓이라면 어떤 일도 하지 않습니다."

로이가 말했다.

그녀의 커다란 뇌 속에서 어떤 자동 장치가 작동되자, 무릎에 힘이 빠지면서 뱃속에 청량한 느낌이 확 끼쳐 왔다. 사내에게 사랑을 느낀 것이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제 더는 그런 추억거리를 만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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